일본 자객도 살리고 역사 왜곡까지 도왔다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09.09.08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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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살해범으로 자백한 조선인 이주회의 실체 드러나

▲ (큰 사진)용산 서룡사 국사대의 이주회 비석 제막식에 참석한 흑룡회 단원들. (오른쪽 아래)서룡사 국사대에 안장된 이주회의 묘. ⓒ시사저널 임영무


1895년 10월8일 새벽 5시쯤. 경복궁 광화문에서 어둠의 정적을 깨고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작전명 ‘여우 사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조선공사 미우라와 일본 자객 48명은 총성과 함께 일제히 황후의 거처인 건천궁에 난입했다. 이어서 궁녀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고 끔찍한 살육이 시작되었다.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는 이렇게 잔인하게 살해된 후 시신은 불에 태워 버려졌다.

이 사건이 발생한 후 일본 자객들은 모두 본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3개월 후에 열린 일본 법정은 ‘증거 불충분’을 들어 이들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일국의 국모를 죽인 일본 자객들 중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일본에서 ‘애국지사’로 칭송받으며 승승장구했다.

일본 자객들은 어떻게 해서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일까. 명성황후가 살해된 후 조선에서는 이와 관련해 세 명의 조선인이 대역 죄인으로 체포되었다. 일본인에 고용되었던 평민 박선(당시 26세)과 한성부 친위대 부위 윤석우(당시 40세) 그리고 한성부 군부협판 이주회(당시 52세)가 그들이었다. 1895년 11월13일의 대한제국 관보를 보면 고등재판소는 이날 세 명에게 모반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6일 후인 11월19일에 모두 교수형에 처한다. 당시 여러 기록에는 박선과 윤석우는 죽는 순간까지 범행 사실을 부인하고 눈물로 통곡했으나, 이주회는 “내가 황후를 살해했다”라고 끝까지 진범임을 주장했다.

순종대에 이르러 윤석우와 박선은 모반 혐의를 벗고 사면 복권되었다. 둘은 명성황후 사건의 또 다른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결국, 역사의 공식적인 기록에는 명성황후 살해 사건의 진범은 일본 자객이 아니라 ‘조선인’으로 기록되었다. 그가 바로 ‘이주회’였다. 일본 자객들이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던 것도 조선에서 진범이 잡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주회는 왜 명성황후를 살해한 진범이라고 자백한 것일까. 그는 누구이며 이 사건에 얼마나 관련되어 있었는지 의문이다. <시사저널>은 명성황후 살해 1백14주년을 앞두고 역사적 진실을 찾기 위해 ‘이주회’라는 인물을 집중 추적했다.

지난 1993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지은 ‘친일파 99인’ 이주회 편(강창일 배재대 교수·현 민주당 의원 지음)을 보면 그는 1843년 경기도 광주 산성리에서 태어났다. 무과를 거쳐 오위장에 올랐고,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워 대원군의 심복이 된다. 그리고 연일현감으로 승진했고, 외무위원 벼슬까지 탄탄대로를 걷는다. 이주회는 김옥균, 우범선 등과도 가깝게 지냈다.

1885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이주회는 화를 입을까 두려워 일본으로 도망쳤다. 그는 3년 동안 도쿄에서 머무르며 일본의 극우 세력들과 친교를 맺는다. 그리고 얼마 후에 사면되자 전남 순천 앞바다에 있는 금오도에 정착해 개간 사업을 벌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면서 이주회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동학군을 토벌하려 일본 전함 스쿠바가 순천에 들어오자 이주회는 일본군의 선봉장이 된다. 이때의 공로로 함장 구로오카가 이노우에 주한공사에게 천거하고, 다시 박영호 내무대신을 통해 지금의 국방부 차관에 해당하는 군부협판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그리고 1년 후 벌어진 명성황후 살해 사건에 가담한다.

강창일 민주당 의원은 “이주회는 명성황후가 죽어야 나라가 살고 조선과 일본의 협력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던 확신범이었다. 이주회는 또 명성황후 사건에 개입한 조선인들의 총책이었다. 그동안 우리 역사에서 ‘이주회’라는 인물에 대해 숨기다시피 했는데, 이제는 재조명해서 제대로 된 역사를 알려야 한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 취재에 따르면 이주회는 일본 우익 세력이자 폭력 조직인 흑룡회가 보낸 첩자였다. 1885년 갑신정변을 피해 일본으로 도피했을 때 그는 흑룡회 단원이 된다. 흑룡회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자객들이 속한 조직이다. 따라서 이주회는 명성황후 살해 사건의 단순 가담자가 아니라 사실상 일본 자객들과 같은 조직원이었던 것이다. 흑룡회는 이주회를 조선 군부에 깊숙이 심어놓기 위해 조선 대신들에게 천거하거나 압력을 넣었고, 군부 협판 자리에 앉히는 데 성공한다. 일본 자객들이 궁궐에 잠입해 명성황후를 살해할 수 있었던 것도 이주회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 (왼쪽)대한제국 관보에 실린 이주회 재판 판결문. (오른쪽)모반 혐의를 적용해 ‘교수형’을 선고한 기록이 있다.



일본 우익단체, ‘영웅’ 대우에 추도 법회까지

이주회와 흑룡회의 관계는 그가 처형당한 후에 더욱 명확해진다. 1895년 11월19일에 처형된 이주회의 시신은 산속에 버려졌다. 그의 처와 아들(병구, 당시 7세)은 서울을 빠져나왔고, 나중에 아들 병구는 호구지책으로 금강산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한일병합이 되자 송병준의 사위이자 이주회의 부하였던 구연수(총독부 경무관)가 이주회의 처와 아들을 서울로 불러들여 뒤를 봐주었다. 조선총독부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일본에서는 명성황후 살해의 주역인 미우라를 중심으로 우익 단체(흑룡회)가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1929년 흑룡회 간부들과 단원들은 대거 서울 용산에 있는 일본 사찰 서룡사 국사대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일본에서 모금한 돈을 가지고 산속에 버려졌던 이주회의 유골을 수습해 이곳에 무덤을 만들고 추도 법회를 열었다.

<시사저널>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찾아낸 <동아선각지사기전>에는 당시 서룡사 국사대에 이주회의 묘를 안장할 때 일본 흑룡회의 조직원들이 대거 참석한 사진이 실려 있다. 현재 서룡사는 흔적이 없이 사라졌으며, 이주회 묘의 행방도 묘연하다. 이주회가 처형된 후 일본 도쿄에 있는 한 사찰에서는 해마다 흑룡회 주도로 이주회에 대한 추도 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이주회는 ‘의인’이자 ‘영웅’이었던 것이다. 현재 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구미가 흑룡회의 맥을 잇고 있다.

명성황후 살해 사건의 자객 중 한 명인 고바야카 히데오는 ‘민후 조락 사건’이라는 수기를 비밀리에 남겼다. 여기에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주범은 조선인’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물론 일본의 관련성을 회피하고 ‘조선의 국모를 죽인 것은 조선인이다’라고 왜곡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에서 이 수기를 발견한 문화재 제자리찾기 사무총장 혜문 스님은 고바야카가 쓴 수기를 번역해 곧 책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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