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거오득’ 인사, 차기 대권 씨를 심는가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09.09.0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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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총리 후보로 지명되면서 대권 구도에 새로운 지형이 형성되었다. 실제로 정 전 총장에 대해 “누구보다 대권 야망이 강해, 총리로만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 시사저널 자료사진


예상은 적중했다. 결국, 신임 총리 내정자는 충청권 인사였고, 개혁 성향의 중도 인사였고, 상대적으로 ‘젊은’ 인사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9월3일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61)을 총리 후보자로 발표했다. 청와대에서 밝힌 것처럼 두세 차례의 변곡점이 있었음을 감안하더라도, 큰 범주에서 이대통령이 매만지고 있는 정국 전환 구상의 시나리오대로 가고 있는 셈이다.

이대통령은 원세훈 국정원장 임명-백용호 국세청장 임명-정운찬 국무총리 내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형님 정치’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정치를 펼치고 있다. 이것은 여권 내 권력 지형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번 인사에서 주목된 박형준 정무수석, 주호영 특임장관은 정두언 의원,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 등과 남다른 관계에 있는 이들이다. 최소한 이번 인사를 통해 ‘정무’ 분야는 이들 소장파의 영향력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전략적인 구상에 능한 이들의 부상은 이미 이대통령이 정국 운용 형태에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사저널>은 지난 제1031호(2009년 7월20일자 발매) ‘벌써 후계자 찾고 있나’ 보도에서 ‘MB(이대통령)의 정계 개편 시나리오의 핵심은 중도 서민층과 충청권의 민심을 잡으면서, 박근혜 전 대표의 강력한 대항마로 부각할 수 있는 여권의 차기 대권 주자용 인사를 발탁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정운찬 총리 후보자는 이런 조건을 채울 만한 최적의 카드로 선택된 것이다.

이번 9·3 개각 및 청와대 개편의 주인공으로 정후보자와 윤진식 신임 청와대 정책실장이 꼽힌다. 윤실장은 대통령비서실의  ‘부실장’으로 격상되었다. 사실상 MB 정권 집권 2기 내각은 정후보자가, 청와대는 윤실장이 이끄는 쌍두마차 체제가 될 전망이다. 공교롭게도 정후보자는 충남 공주, 윤실장은 충북 충주 출신으로 충청권과 인연이 깊다. 이번 인사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또 한 명의 주요 인사는 박형준 청와대 정무수석이다. MB의 정국 전환 구상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최전선에 그가 서 있다.

지난 6월 중순. 집권 2년차의 이명박 정부는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도는 20%대 초반까지 급락했다. 당시 청와대 한 관계자의 표현대로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때 이대통령이 들고 나온 것이 바로 ‘중도 강화론’이었다. 박수석은 앞장서서 중도 강화론을 설파했다. 중도라는 말은 여러 가지를 함축하기에 아주 시의적절했다. 서민, 정치적 부동층, 젊은 층의 개혁 성향, 충청권 등 나이, 성향, 지역 등의 모든 중간층을 중도라는 그릇에 담겠다는 것이다. 이들의 지지가 없이는 향후 이명박 정부의 안정적 국정 수행이 어렵다는 위기의식을 담은 보고서가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이대통령도 여기에 공감했다.

이때부터 청와대는 사실상 총리를 포함한 개각과 청와대 개편 구상에 들어갔다. “인위적인 개각은 없다”라는 의례적인 답변을 청와대는 계속 되풀이했지만, 그 뒤에서는 실제 활발한 인물 고르기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명박 정부 인사 스타일에 큰 변화를 알린 첫 신호탄은 6월21일 나왔다. 검찰총장과 국세청장에 충청권의 50대 초반 인사들을 깜짝 발탁한 것이다. 이는 전주곡이었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비록 천성관 전 검찰총장 후보자가 중도에 낙마하기는 했지만, 청와대는 개혁적인 인사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다음 카드는 역시 총리였다. 중도 개혁 성향으로 상대적으로 젊은 인사가 발탁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지역은 충청권 인사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차기 여권의 대권 주자 판도에 변화를 몰고 올 인사를 의식적으로 키우게 될 것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MB 플랜’을 이어갈 수 있는 ‘후계자’를 키워야 한다는 얘기가 청와대 주변에서 부쩍 자주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간은 지체되기 시작했다. 인사 검증 과정이 여의치 않다는 후문도 들렸다. 방향 선회도 고려했고, 그런 과정에서 ‘한·자 연대론’도 불거져 나왔다. 현실적으로 충청권에 지분을 갖고 있는 자유선진당과 손을 잡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이었다. 당장 내년 6월의 지방선거를 의식한 부분이었다. 

여권이 한사코 충청권에 집착한 이유는 장기적인 포석을 내다본 탓이었다. 영남권과 수도권을 연결하는 ‘보수대연합’을 구상했기 때문이다. 그를 위해서는 충청권의 흡수가 절대적이다. 즉, 영남-충청-수도권을 연결하는 벨트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호남을 고립시키겠다는 전략이 마련되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이후 한때 호남 총리론이 고개를 들다가 결국 무산된 것도 이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이대통령은 선진당과의 공조가 매끄럽게 전개되지 않으면서, 과감히 방향을 선회했다. 여기에는 충청권에서 생각만큼 선진당과 이회창 총재가 강력한 지지 기반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적 인식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선진당을 흔들고, 나아가서 충청권의 분열을 틈타 새로운 대안을 만들겠다는 또 다른 전략이 만들어졌음직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즉, 맹주 없는 충청권에 새로운 깃발을 꼽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청와대는 이번 개각을 발표하기 전에 전략적인 언론 플레이를 펼쳤다. 청와대에서 사전에 “총리 후보군 중에 ‘차기 대권 주자군’이 포함되어 있다”라는 말을 슬쩍 흘린 것이다. 이는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역시 효과 만점이었다. 고도의 정치술을 발휘하는 모습도 연출했다. 이대통령까지 나섰다. 확실히 달라진 모습이다. 야당 정치인 출신의 한 정치분석가는 “MB가 모처럼 정치적 결단력을 발휘했다. 정운찬 카드 하나로 일거에 선진당을 흔들었고, 친박(친박근혜)계를 흔들었고, 민주당까지 흔들었다. 여기에 충청권 민심까지 요동치게 만들고, 여권 내의 중도·비판 세력까지 잠재우는 일거오득, 그 이상의 효과를 가져 왔다”라고 평했다.

일각에서는 ‘심대평 카드’와 또 다른 제3의 카드 등이 돌고 돌아서 마지막에 정후보자에게 순서가 온 것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는 전언이다. 한나라당에서 소장 개혁파로 분류되는 한 초선 의원은 “당내 소장파들 중에서 정후보자를 추천하는 목소리가 많았었다. 충청권 인사 중에 그만한 인물은 없다는 데에 다들 공감하고 있었다. 청와대에도 이런 뜻이 전달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미 개각 얘기가 오가던 6월께부터 정운찬 총리설은 유력한 카드였다”라고 귀띔했다. 안상수 원내대표 역시 9월3일 개각 발표 직후 “정후보자는 그간 우리 당에서도 많은 분이 총리 후보자로 청와대에 건의했었다”라고 밝혔다.

개각설 나돈 6월께부터 총리설 부각…“준비하고 있었다” 증언도

▲ 사실상 ‘정치인’으로 변신을 감행한 정후보자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가 향후 정국을 또 한 번 요동치게 할 것으로 보인다. 이대통령과 정후보자가 어떤 관계를 유지하느냐가 관건임에 틀림없다. ⓒ연합뉴스

이번 인사를 발표하면서 청와대는 정후보자 띄우기에 상당히 공을 들이는 모습이다. ‘삼고초려’라는 이례적인 용어까지 거듭 구사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들려오는 얘기는 또 다르다. 정후보자는 이미 8월 개각설이 한창 나돌던 지난 6월께부터 입각 가능성을 주변에 내비쳤다는 것이다. 정후보자와 가까운 한 인사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한 나라의 총리직을 맡는 것인데, 어떻게 아무 생각 없이 갑자기 며칠 만에 덜컥 맡겠나. 전부터 고심이 있었고, 또 어떻게 하겠다는 어느 정도의 결심이 이미 섰으니까 나선 것이지”라고 밝혔다. 이 인사는 최근까지 정후보자와 의견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즉, 정후보자로서도 이번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모험에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정후보자를 접촉해 온 이들은 “생각보다 정후보자가 정치적 야망이 대단하다”라고 전한다. 정치평론가 유창선 박사는 “기본적으로 정후보자는 대권에 뜻이 있는 사람이고, 기회만 닿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대권에 도전)하려고 할 것이다. 이번 인사로 그 기회와 가능성은 더 충분히 열린 셈이 되었다”라고 평했다.

최대 관심은 정후보자가 과연 어느 전철을 밟을 것이냐에 있다. 과거 YS(김영삼 전 대통령) 정권에서 총리를 지낸 이홍구·이수성 전 총리의 길을 걸을 것이냐, 아니면 이회창 총재의 길을 걸을 것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이다. 당시 세 사람은 모두 YS 정권 말기, 총리직을 발판삼아 유력 대권 주자로 부각되었다. 결과적으로 YS에 순응했던 이홍구·이수성 전 총리는 실패했고, YS에 반발했던 이총재는 성공한 셈이 되었다. 이미 총리직을 수락한 정후보자의 구상 속에도 이런 과거의 교훈이 머릿속에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강원택 숭실대 정치학과 교수는 “총리직 수락 과정에서 두 사람 간에 어떤 교감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국정은 대통령이 끌고 나가는 것이고, 총리는 대통령에게 일정 부분 권한을 위임받는 것에 불과하다. 정후보자도 정치적인 야망이 있으니 만큼 본인이 하기에 따라서 더 큰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은 사실이다”라고 덧붙였다.

반면, 정치컨설팅업체 ‘민기획’의 박성민 대표는 “섣불리 여권의 유력 대권 주자로 말하기에는 이르다”라고 밝혔다. 그는 “결국 MB의 정운찬 총리 내정은 갑자기 이루어졌다고 본다. 심대평 카드 등이 무산되면서 자칫 여론에 몰릴 수도 있는 상황에서 이를 일거에 뒤덮고 정국의 주도권을 계속 확보할 수 있는 파괴력 있는 카드로 내세운 것이다. 하지만 정후보자의 정치적 기반은 지난 2007년 대선 때나 지금이나 상당히 취약하다. 충청권에서의 지지 기반도 현재로서는 결코 박 전 대표보다도 탄탄하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회의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사실상 ‘정치인’으로 변신을 감행한 정후보자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가 향후 정국을 또 한 번 요동치게 할 것으로 보인다. 이대통령과 정후보자가 어떤 관계를 유지하느냐가 관건임에 틀림없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가 “테니스 코트에서 야구를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라고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테니스를 좋아하는 이대통령과 야구를 좋아하는 정후보자의 괴리감을 빗댄 표현이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기자에게 “최근 테니스공 야구대회가 사회인 체육에서 새롭게 각광받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시대가 변하는 만큼 사고도 바뀌어야 한다”라고 응수했다. 누구 말이 더 맞을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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