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군사위만 접수하면 주석은 ‘떼논 당상’
  • 소준섭 | 국제관계학 박사 ()
  • 승인 2009.09.22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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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중국 부주석, 후진타오 뒤 이을 인물로 주목…군부 기반 두터워 유리

▲ 후진타오 중국 주석(왼쪽)과 시진핑 부주석이 전국인민대표대회가 끝난 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AP통신


최근 국제 사회는 중국 시진핑 부주석을 주목하고 있다. 그는 2008년 3월15일, 제11기 전국인민대표자대회(약칭 전국인대) 1차 회의에서 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중국의 관례대로라면 후진타오의 뒤를 이어 중국 제5대 지도 집단의 핵심 인물이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최근 들어 그가 공개적으로 발언 수위를 높이는 경우도 부쩍 늘어났다. 시진핑은 누구이고, 그는 과연 후진타오의 후계자가 될 것인가?

시진핑은 현재 중국 부주석이자 중국공산당 서기처 서기이며 중국공산당 당교(黨校) 총장이다.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勛)은 중국공산당 원로로서 일찍이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었다. 시진핑이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중앙선전부 부장(장관)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가 열 살이 채 안 되었을 때 반당분자로 몰려 1962년 10월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고, 허난성 뤄양의 국수 공장에 보내져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68년에는 감옥에 보내져 문화대혁명 시기 내내 갇혀 있어야 했다.
아버지 없이 소년기를 보낸 시진핑은 15세에 샨시 성의 한 공장에 들어갔고 얼마 뒤 그 생산대대에서 공산당지부 서기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1975년 베이징의 칭화(淸華) 대학 화학공정학과 입학을 추천받아 이른바 ‘공농병학원’(工農兵學員)이 되었다.

 1985년 그는 중국 남부 푸(福建) 성 샤먼 시의 부시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푸 성 성장(省長)으로 재직하기까지 장장 17년에 걸쳐 푸 성에서 근무했다. 이어 2002년 10월, 저장 성 부성장(副省長)에 임명되었고, 그해에 칭화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획득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저장 성 서기로 승진한 그는 저장 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 자리도 겸임하게 되었다. 그는 저장 성에 재직하고 있을 때 많은 업적을 쌓은 것으로 평가받았다. 저장 성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 뒤 2007년 3월 천량위(陳良宇) 상하이 시 당서기의 부패 사건이 발생했을 때 시진핑은 후임 당서기로 취임해 천량위 사건을 엄격하면서도 공정하게 처리했다.

시진핑은 2009년 2월 멕시코를 방문했을 때 유명한 말을 남겼다. 멕시코 현지 화교들을 만난 자리에서 “국제 금융 위기 과정에서 중국은 13억 인구의 먹고사는 문제를 기본적으로 해결했고, 이는 전 인류에 대한 가장 위대한 공헌이다. 배 부르고 할 일 없는 일부 외국인들이 우리 문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간섭하고 있다. 중국은 첫째 혁명을 수출하지 않았고, 둘째 기아와 빈곤을 수출하지 않았으며, 셋째 당신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 것인가?”라고 일갈했다. 평소 언행이 신중하기로 정평이 나 있던 시진핑의 이날 ‘깜짝 발언’은 서방 국가의 이른바 ‘중국 때리기’에 대한 정면 돌파를 의미한 것으로서 시진핑의 정치적 위상을 높인 중요한 계기였다고 평가되었다.  

상하이는 중국 경제의 중심지로서 장쩌민 일가의 태자당과 상하이방 정부가 관상(官商) 관계를 성공적으로 운용하면서 발전해 온 곳이다. 상하이 시 당서기 자리는 태자당의 핵심 지위를 점하기 위한 중요한 자리이다. 중국 공산당 원로 간부들의 자제들은 이른바 ‘태자당(太子黨)’으로 불리는데, 시진핑 역시 당연히 태자당의 일원이다. 그는 국무원 부총리 왕치산(王岐山), 중국인민은행행장 저우샤오촨(周小川)과 함께 칭화 대학 신세대 태자당으로 칭해진다. 시진핑은 상하이 당서기를 맡으면서 상하이방의 깊은 인맥 및 ‘장쩌민 일가의 태자족’과 접촉을 할 수 있었는데, 이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할 절호의 기회였다. 시진핑에 이어 상하이 시 당서기에 임명된 위정성(兪正聲) 역시 태자당의 핵심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 제1기계공업부 부장을 지냈으며, 한때 마오쩌뚱의 처 장칭(江靑)과 결혼한 바 있었다. 특히 위정성은 덩샤오핑의 총애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07년 최고 지도부로 발돋움한 뒤 반년 만에 1순위 후계자로 ‘우뚝’

2007년 가을에 개최된 중국 공산당 제17 전대에서 시진핑은 아홉 명으로 구성되는 중공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및 중앙서기처에 진입함으로써 일약 중국 최고 지도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그는 2007년 이후 불과 반년 만에 저장 성 당서기, 상하이 시 당서기, 중국 공산당 서기처 서기 등 3계단을 뛰어올라 중국 최고 직무의 제1 순위 후계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해 11월에 시진핑은 당시의 실력자였던 쩡칭훙(曾慶紅)을 밀어내고 중앙홍콩·마카오공작협조소조 조장(組長), 중앙외사영도소조 부조장, 중앙당건설공작소조 부조장 등 당내 모든 직무를 총괄적으로 담당하게 되었고, 곧 이어 중앙 당교 총장 직위도 그에게 넘어왔다. 그리하여 54세였던 시진핑이 국가 부주석 쩡칭훙의 모든 직무를 대체하게 된 것이다. 시진핑은 이에 그치지 않고 쩡칭훙의 또 다른 역할 즉, 태자당의 핵심 인물이라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태자당은 이미 중국 정·관계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떠올라 있는데, 향후 시진핑이 후진타오에 이어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리커창(李克江)을 대표로 하는 공청단(共靑團, 공산주의청년단)을 논외로 한다면, 오직 태자당에서의 옹립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시진핑의 ‘쾌속 성장’에는 적지 않은 의문표가 던져지기도 한다. 푸 성 재직 당시 업적이 별로 없었다는 비판이 적지 않고, 오히려 현지 방송국 여성 진행자와의 스캔들 소문까지 있었다.  

시진핑은 인간 관계와 이미지가 좋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 처리가 합리적이어서 다른 사람의 원망을 듣지 않아왔다. 박력이 부족하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될 정도이다. 그리고 부친이 문화대혁명 당시 4인방의 박해를 받아 대중들의 ‘동정표’도 있다.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은 중국 공산당 내의 소수 ‘개명 인사’로서 ‘개혁·개방’을 줄곧 주창했으며, 톈안먼 사건 당시에도 무력 진압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시진핑은 평소 중국 공산당 원로들을 잘 받들어 이들에게 높은 점수를 얻고 있다. 특이한 점은 그가 군부에 폭넓은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일찍이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 비서로 근무하는 등 군대 업무 경력도 있는 데다가 특히 그의 아내 펑리위안(彭麗媛)이 군 문선대의 유명한 가수였다는 사실이 더해진 결과이다. 상하이 당서기로 재직할 때는 현지 육·해·공군 부대를 모두 방문하기도 했다. 시진핑은 이렇듯 당 원로들과 군부라는 든든한 배후를 가지고 있다.      

중국의 후계 구도는 지도자 개인의 카리스마가 현저하게 약화된 1990년대 이후 권력 서열의 비정상적 변동을 피하고 관례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시진핑은 이미 당의 일상 사업을 관장하는 서기처의 책임자로서 권력 기반을 구축하는 데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가 부주석이라는 요직도 점하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중국 최고 지도자에게 필수적인 군사 업무에 대한 경험을 축적하기 위한 중앙군사위 제1부주석 자리인데, 이 점에서도 두터운 군부 기반을 보유하고 있는 시진핑이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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