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거운 ‘기무치’ 울리는 한국 전통 김치 전도사
  • 김세원 | 편집위원 ()
  • 승인 2009.09.2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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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석 ㈜영명 대표, 일본에서 ‘김치’로만 연 3백억 매출

▲ 오영석 대표(왼쪽)는 일본인들에게 김치 담그는 법을 가르치고 김치를 세계인의 음식으로 만드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에 김치박물관을 세웠다. ⓒ시사저널 임영무


일본 도쿄의 번화가 신주쿠(信宿) 요츠야(四谷) 산초메 사거리에 자리 잡은 한식당 처가방(妻家房·일본명 사이카보). 한옥 기와 지붕 아래 상호 간판이 붙어 있는 겉모습은 다른 한식당들에 비해 별로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면 김치를 담그는 옛 풍경 사진과 각종 김치 모형, 보존용 장독 등이 전시되어 있다. 10여 평 남짓한 공간이지만 김치의 유래와 원리를 쉽게 이해하도록 꾸며놓은 김치박물관이다.

한류 바람을 타고 한국 음식을 대표하는 김치에 관심을 갖게 된 일본 사람들에게 이곳은 김치의 메카가 되었다. 박물관에서 김치의 유래를 배우고 한식당에서 원조 김치를 시식한 뒤 주말에 열리는 김치교실에 참가하면 직접 김치를 만들어 가져갈 수도 있다. 한식 체인점 처가방을 운영하는 ㈜영명의 오영석 사장(59)은 1996년 10월 김치가 아니라, 김치 문화를 알리기 위해 김치박물관을 열었다. 한류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가 1999년 부인 유향희씨(58)를 강사로 내세워 김치교실을 열었다.

격주로 열리는 김치교실의 정원은 20명. 해마다 5백명, 지금까지 5천여 명의 일본인이 김치교실을 통해 김치 마니아로 탈바꿈했다. 유향희씨는 “멀리서 신칸센을 타고 와 김치교실에 참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라고 귀띔한다. 참가자들은 실습비와 재료비 3천 엔을 내고 2시간 동안 김치 만드는 법을 배운 뒤 자신이 직접 담근 반 포기가량의 김치를 싸들고 집에 간다.     

오씨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기무치 아저씨’로 통한다. 1989년 게이요(京玉) 백화점 식품코너에서 김치를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얻은 별명이다. 그는 ‘처가방(사이카보)’이라는 브랜드로 식품 판매 부문과 식당 부문으로 나눠서 한국 가정식 음식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일본 전역의 대형 백화점 식품코너 15곳과 푸드코너 다섯 곳에서 여러 종류의 김치를 판매하고, 22개의 직영 한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총 직원은 아르바이트 인력을 포함해 6백여 명으로 이 중 50여 명이 한국인 조리사이다. 

어린 시절 남자가 부엌을 들락거리면 남자답지 못하다는 교육을 받았던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가 평생의 동반자로서 김치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일본에서였다. 영남대 화학과를 중퇴하고 고향인 대구를 떠나 명동에서 의상실을 운영하던 그는 1983년 본격적으로 패션을 공부하기 위해 서른셋의 나이에 아내와 두 아이를 이끌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87년 도쿄의 문화복장학원을 졸업한 그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게이요 백화점에 취업했다. 부인복 상품 기획을 담당하며 패션 디자이너로서 경력을 쌓아가던 그가 평생의 꿈을 접고 김치에 인생을 걸게 된 전기는 엉뚱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오씨는 1989년 일본에서 새로 태어난 막내아들의 돌잔치에 백화점 동료들을 집으로 초대해 한국 음식을 대접했다. 일본인 동료와 상사들은 아내 유씨가 정성껏 만들어 내놓은 김치와 제육 보쌈, 파전 등을 먹으면서 ‘오이시이(맛있다)’를 연발했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 요리라고는 야키니쿠(불고기)밖에 모르던 시절이었다. 이들의 반응이 얼마나 호들갑스럽던지 오사장 내외가 어리둥절해질 정도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때까지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던 유씨가 전업 주부직에 사표를 내겠다고 선언했다. 현지인들도 환호하는 요리 솜씨를 그냥 썩히기 아까우니 무언가 사업을 해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한국 전통의 맛 그대로 살린 것이 비결

1993년 4월 유씨는 도교 요츠야에 김치와 젓갈을 파는 반찬 가게를 열었다.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은 심심한 ‘기무치’가 아닌 칼칼한 한국 김치를 당당하게 내놓았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던 손님들이 어느새 하나 둘 단골이 되었다. 입소문이 나면서 오사장이 근무하던 게이오 백화점에서 유씨에게 식품매장에 점포를 내라고 제안했다. 그해 9월, 요츠야에 1호점을 낸 지 5개월 만에 2호점 김치 매장을 게이오 백화점 내 식품코너에 열었다. 사업이 확장되자 오사장은 1995년 2월 다니던 게이오 백화점에 사표를 내고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1996년 5월에는 한국 지방자치단체와 일본의 대형 백화점을 일대일로 연결하는 사업에 착안해 일본 사이타마 현에 있는 마루히토 백화점에서 1주일 동안 전라북도 물산전을 성사시켰다. 덕분에 토종 경상도 사나이가 명예 전라북도 도민증도 받게 되었다. 호사다마였을까. 점포를 여섯 개까지 늘리면서 승승장구하던 중 사건이 터졌다. “한 고객이 깍두기가 상했다고 문제 제기를 했다. 달려가 보니 맛을 깊게 내기 위해 양파를 갈아 넣은 것이 보글보글 끓어오른 것을 보고 상했다고 클레임을 건 것이었다. 김치가 발효식품이라는 사실을 몰라 상했다고 오해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씨는 일본인에게 우리 김치를 올바로 전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96년 10월, 1호점 옆에 일본 최초로 김치박물관을 열었다. 소식을 듣고 일본 방송국에서 취재를 나왔고, 그의 김치박물관이 전파를 타자 TV를 본 시청자들이 꼬리를 물고 박물관을 찾아왔다. 서서히 김치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다 한 일본인 고객이 “냄새만 맡게 할 것이 아니라 이왕이면 김치와 다른 한국 음식의 맛도 느낄 수 있게 식당을 여는 것이 어떠냐”라고 한 조언을 받아들여 김치박물관 옆에 한국 전통 가정음식점 ‘처가방’을 열었다.

사위가 처갓집에 가면 장모가 제일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다가 대접하듯 한국의 전통 가정식을 내놓는다는 뜻에서 ‘처가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내 유씨의 맛깔난 음식 솜씨와 정성에 힘입어 ‘처가방’은 식사 시간이면 빈 자리가 없이 문전성시를 이룰 만큼 대성공을 거두었다. 

오씨는 한국 음식의 전통적인 맛을 살리기 위해 식자재를 100% 한국에서 가져간다. 전북 부안 곰소의 소금, 충남 광천의 새우젓갈, 경북 청송과 영양·영주 등의 고추, 충남 서산의 마늘 등 최고만을 고집한다. 뿐만 아니라 손맛을 제대로 내기 위해 조리장을 비롯해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을 모두 한국인으로 고용했다.

마침 2002년 한·일월드컵이 개최되고, 그 무렵부터 <겨울연가> 바람이 불면서 한식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는 TV 방송에서 ‘한국 축구선수들은 왜 강한가’라는 특집을 방영한 후  한국이 축구를 잘하는 이유가 김치 때문이라며 김치가 잇따라 집중 보도되기도 했다. 덕분에 오씨는 매년 점포를 2개씩 확장해나갔다. 2001년 10억 엔이었던 연매출액이 지난해 30억 엔(약 3백억원)을 돌파했다.  
오씨는 지난 8월 서울 청담동에 ‘도쿄사이카보’라는 일본 가정식당을 열었다. 예전에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한식이라면 ‘야키니쿠’밖에 몰랐던 것처럼 일식이라면 스시와 사시미밖에 모르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일본 가정에서 해먹는 일본 전통 음식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서울대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하고 미스 재일교포로 선발되기도 한 큰딸 지선씨(30)에게 운영을 맡겼지만  그는 요즘도 1주일이 멀다 하고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김치 홍보에 앞장서고 있다. <김치를 디자인하는 남자>라는 자서전을 우리말과 일본어로 펴내기도 했다.

“김치는 입맛을 돋워주는 것은 물론 비타민·무기질 등 영양소가 풍부하고, 다이어트에 항암 효과까지 있는 대표적인 웰빙식품이다. 김치를 좋아하게 되면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함께 좋아진다. 음식을 통해 한국과 일본이 서로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씨는 “한류 열풍으로 인해 한국 음식이 널리 알려져 요즘 일본에서는 불고기, 갈비, 비빔밥 등 대표 한식에서 탈피해 가정식 한국 음식의 소비자가 늘고 있는 추세”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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