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은 몸만 오르내린 곳이 아니었다
  • 조철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09.09.29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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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적 시각에서 계단에 천착한 한 건축학자의 문명사 비판

ⓒ시사저널 박은숙

집에서 밖으로, 다시 밖에서 집으로. 하루의 일과를 계단에서 시작하고 계단으로 끝내면서도 어제도 오늘도 별 생각 없이 오르고 내렸던 계단. 내일, 인간사에 빼놓을 수 없는 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을 하고 이런저런 계단과 마주할 생각을 해보자.

계단을 처음 만든 인류의 조상은 과연 무슨 목적을 가졌을까? 편리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을까? 혹시 인류가 인류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이런 물음에 답하듯 건축사학자 임석재 이화여대 교수가 계단의 역사, 시대의 사상, 건축가의 시각, 우리 주변의 생활 이야기 등을 인문사회학적 시각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문명사의 관점으로 풀어쓴 <계단, 문명을 오르다>를 펴냈다.

저자는 “개인의 심리 작용에서 문명을 상징하는 내용까지 계단 속에 담긴 뜻은 무궁무진하다. 계단은 건물 내의 작은 공간 또는 부재밖에 되지 않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건물 전체에 버금간다. 하나의 독립 장르를 이룬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계단만으로 하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다. 계단 하나만 추적해도 서양의 전 문명을 읽어낼 수 있다”라고 계단에 천착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저자는 서양 건축사에 등장하는 명품 계단과 주변에 수없이 널려 있는 계단에 대한 인간의 공통적인 관념을 파악하고, 지금 계단에서 일어나는 일상을 인문사회학적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다. 무심코 지나치는 계단 중에서 그 형태나 인문사회학적으로 재미있고 의미 있는 예들을 찾아내 일상의 조형 환경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니, ‘높이가 다른 두 곳을 이어주는 발걸음의 수직 이동 수단’이라는 뜻을 가진 건축물의 하나인 계단에는 인간의 종교적·정신적·기능적 활동의 결과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계단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했다. 서양 건축의 전 역사와 궤를 같이 해 오면서 각 시대의 문명 현상이 잘 드러난 곳이 계단이다. 각 시대의 사회문화적 의미가 건축을 통해 집약적으로 응축된 보물 창고가 계단이다. 인류가 소통하고 교류하던 공간이기도 했던 계단은 종교적 상징성, 정치적 기념비성, 사회적 공공성, 경제적 욕망, 심리적 섬세함 등 인간을 둘러싼 개인·집단·정신·육체를 아우르는 문명 작용의 집합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고대 계단은 바벨탑과 피라미드로 대표되는데, 이는 하늘을 향한 수직 욕망이 내재된 계단이었다.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기능에 충실한 인간 중심의 계단이 출현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저자는 “계단은 원래 한 문명을 대표하는 문화적 상징성이 농축된 부재였다”라고 강조했다. ‘계단’에는 건물주의 발주 의도, 건축가들의 디자인 의도, 이용자들의 즐기고 감상하는 고유한 방식 등이 내재해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이 기능과 효율이라는 20세기 자본주의 역사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저자는 “기능과 효율이 계단을 지배하면서 인간사는 삭막해지고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계단을 주고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얻은 것은 결코 남는 장사가 아니다. 다양한 즐김의 대상이었던 계단이 기피의 대상이 되고 계단 앞에 서면 한숨부터 나온다는 것은 우리의 가치관이 심하게 삐뚤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라고 말하며,  물질문명의 폐해를 치유하기 위해 21세기에 등장하기 시작한 정신 복원 작업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계단의 원형을 되찾는 노력을 기대했다.

 



ⓒ이정우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고 세상에 대고 외쳤던 때가 1994년이었다. 15년이 지나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서른 살이 쓴 것 같은 여행 기록을 엮어냈다.

새 산문집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문학동네 펴냄)는 ‘시인 최영미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 전작들과 달리 ‘인간 최영미가 제대로 살기 위해’ 헤매 다닌 진솔한 발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지난 여행을 회고하며 ‘길에서 만나 길에서 헤어진’, ‘인생에서 단지 몇 시간을 공유’했을 뿐인 사람들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고 아픈 과거를 보여주고, “다 지난 일이다. 나는 너를 이해한다”라는 위로를 듣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일상에 휘둘리는 삶을 거부하고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 그저 ‘존재하는’ 인간이 아니라 ‘살아가는’ 인간이 되려 낯선 풍경 속을 정처 없이 헤맸다.

파리에서 베네치아로, 암스테르담에서 쾰른으로, 리옹에서 교토로, 버클리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시카고에서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오는 그녀의 풍성하고 다채로운 여행 기록이 부럽기도 하다. 여행이 그동안 살아온 날들을 이해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희망하게도 해준다는 것에 공감하는데, 그보다 그녀가 이 책을 낸 다음의 선언 같은 말에서 ‘서른의 최영미’를 다시 만나는 듯했다.

“여행은 짧은 시간에 우리를 성숙시키고, 또한 파괴시키기도 한다. 지루하더라도 내가 하루하루 일상을 견디듯이, 힘들더라도 나는 모험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지금, 살아 있다는 것처럼 치사하고 고귀하며 흥미로운 우연을 나는 모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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