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은 ‘생활의 정치’가 필요하다
  • 염재호 ㅣ 현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
  • 승인 2009.10.1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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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는 그의 저서 <민주주의의 민주화>에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아직 뿌리내리지 못하는 현상에 주목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을 통해 민주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우리나라는 외형적으로 볼 때 민주 정치의 새로운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외형적 민주주의의 성취가 본질적 민주화를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에 민주화의 여정은 아직 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선거운동 과정에서의 불법과 비리는 많이 근절되었고, 금융실명제 실시로 인해 정치 자금이 투명해진 것은 가히 선거 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가 과연 선진적인 민주주의를 이루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민주화가 이루어졌는데도 유권자들은 정치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최근 내년도 기초지방선거에서 정당 공천을 반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한국여성유권자연맹과 YMCA 등 시민단체들이 기초지방선거에서 정당 공천제 반대 운동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시민단체들뿐 아니라 사회 원로들과 여론 주도층에서도 기초지방선거에서 정당 공천제를 반대하는 운동에 적극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지방의 기초단체장과 기초의회 의원을 정당이 공천하는 것이 오히려 주민들의 정치적 이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도입된 정당 추천제는 중앙 정치의 또 다른 문제를 증폭시키고 있다. 우선 지역의 정당 공천 과정에서 그 지역 출신 국회의원의 영향력이 절대적이고, 후보자들은 정당의 공천을 받게 되면 정당의 배경에 숨어서 개인적 선거 비리가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지역주의가 강한 우리나라의 선거 풍토에서, 지방에서 정당의 공천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선거에서의 당선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후보들은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한 선거운동보다는 공천을 위한 운동이 더욱 심화되는 현상을 보인다. 공천 과정에서 금품 수수 및 접대뿐 아니라 당 후원금과 공천 헌금과의 구별이 모호하기도 하는 등 공천 비리가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정치·사회·경제 등 모든 분야가 중앙 집권적이다. 심지어 시민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시민단체들의 운동도 풀뿌리 민주주의라기보다는 엘리트가 중심이 되어 중앙 집권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따라서 종종 시민운동도 지역 주민들의 생활보다는 중앙 정치에 관련된 정치적 이슈에 쉽게 동원되곤 한다.

영국의 정치사회학자 앤소니 기든스는 21세기 정치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생활의 정치(life politics)’가 ‘이념의 정치’를 대체하게 되었다고 했다. 일본에서도 지방선거에서는 무소속 후보들이 90% 이상 당선되고 있다. 유럽에서도 환경 문제를 주장하는 녹색당이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는 등 이념보다는 삶의 질과 관련된 이슈가 정치적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본다. 정당의 이념보다는 지역 주민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이슈들이 유권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가 공고화되려면 지역에서 주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가 우선되어야 한다. 이제 지역 문제는 이념 문제보다 생활의 문제를 더욱 중요시해야 한다. 자치단체장이나 기초의원들의 경우도 정당의 대리인 역할을 하기보다는 지역 주민의 삶의 질과 밀착된 일을 해야 한다. 이제 기초지방선거는 지역 중심의 생활 정치로 돌아갈 수 있게 풀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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