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은 세대’들 뚝심으로 일 내다
  • 한준희 | KBS 축구해설위원 ()
  • 승인 2009.10.13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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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 이하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쾌거 이룬 이유

▲ U-20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홍명보 감독과 골을 넣은 김민우 선수가 얼싸안고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버림받은 세대’가 해냈다. 2007년 한국에서 개최된 17세 이하 월드컵에서 페루, 코스타리카에 패하며 16강 진출에 실패했던 바로 그 세대가 불과 2년 만에 이집트에서 우뚝 섰다. 1983년 강호들을 연파하고 신화를 써내려간 멕시코의 영광을 이 세대가 재연해내리라고 예측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카메룬과의 첫 경기에서 속절없이 패했을 때만 해도 상황은 비관적이었다. 같은 조에 속한 독일은 브라질, 스페인 등과 더불어 이번 20세 이하 월드컵의 강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히던 팀이다. 여기에 미국은 전통적으로 이 연령대의 축구가 강한 데다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우리가 꺾어보지 못했던 상대였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조 3위 와일드카드로 16강에 진출하는 어렴풋한 가능성만 살려놓아도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무승부를 거둔 독일전부터 완연히 궤도에 오른 우리 대표팀은 미국을 상대로 세 골을 몰아치며 쾌승을 거둠으로써 산뜻하게 16강에 진출했다. 다음 상대는 2009 남미 청소년 선수권에서 브라질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했던 파라과이였다. 조별 리그에서 개최국 이집트를 꺾고 강호 이탈리아와 비길 정도의 조직력을 자랑했던 파라과이를 상대로도 한국은 세 골을 터뜨렸다. 이쯤 되면 세계 축구계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쾌거는 어쩌면 바깥에서보다 오히려 우리 내부에서 더욱 놀랄 만한 일인지도 모른다. 2년 전 17세 이하 월드컵에서 ‘안방 망신’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던 바로 그 ‘버림받은 세대’가 1983년 이래 최고의 성과를 이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다섯 명의 선수를 제외하면 지금 뛰고 있는 20세 이하 대표 팀의 상당수는 그때의 멤버가 아니다. 하지만 정조국·최성국으로 상징되는 2003 세대, 박주영을 앞세웠던 2005 세대, 이청용·기성용으로 대별되는 2007 세대와 비교해, 믿을 만한 대형 스타나 화려한 기술을 자랑하는 선수도 없는 세대로 간주되어왔다. 그런데 이 세대의 선수들이 정말로 보잘 것이 없을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사실 지금 20세 이하 대표 선수들은 1989~90년에 태어난 이들로서 2002 한·일월드컵을 전후해 크게 발전한 인프라의 수혜를 입기 시작한 1세대라 할 만하다. 이들은 선배들과는 판이하게 훌륭한 잔디를 밟으며 성장했다. 물론 이렇게 좋은 시설의 수혜를 입었으면서도 17세 이하 월드컵에서 실패했던 것은 질책의 사유가 될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이들은 좋은 잔디 위에서 획득 가능한 ‘발목 활용’이라는 무기를 지니고서 자라났다. 이는 침착성과 자신감이 적절히 추가될 경우 골 결정력을 높여줄 수 있는 기반으로 작동할 수 있다.  20세 이하 대표팀의 슈팅 정확도는 괜찮은 편이다. 대표팀은 미국과의 경기에서 11개의 슈팅 가운데 일곱 개의 유효 슈팅을 기록했으며, 독일전에서는 아홉 개 중 네 개, 파라과이전에서는 12개 중 네 개를 골문 안쪽으로 보냈다.

왼발잡이 세 명의 활약 빛나

▲ 10월6일 파라과이와 벌인 U-20 월드컵 16강전에서 김민우가 두 번째 골을 넣고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민우·김영권·김보경이 하나같이 왼발로 터뜨렸던 골들은 이 세대의 선수들이 ‘결코 보잘 것 없지 않은’ 킥 능력의 소유자들임을 증명해 보였다. 축구에서 요구되는 기본적 덕목에 있어 분명히 강점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선수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 왼발잡이 세 명은 좀 더 언급할 가치가 있다. 17세 이하 월드컵에서 불운의 주인공이었던 김민우(연세대)는 고교 축구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팀들 중 하나인 언남고의 주역으로 맹활약했던 선수이다. 언남고 3총사로 유명했던 서용덕·최정한·김동희가 모두 연세대로 진학한 이후에도 언남고는 김민우의 경기 조절 능력에 힘입어 계속 강호의 지위를 유지했다. 왼발 사용 능력, 드리블 능력에다 시야까지 갖춘 그는 공격형 미드필더, 측면 미드필더, 측면 수비와 수비형 미드필더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다기능 선수이기도 하다. ‘김민우 시프트’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로 이번 20세 이하 대표팀은 최단신(172cm) 김민우의 특성과 장점을 1백20% 활용해 크나큰 유익함을 섭취했음에 틀림없다.

수비수 김영권(전주대)의 활약도 빛났다. 지난해 19세 이하 아시아선수권 시리아전에서 결정적인 헤딩골을 터뜨리며 한국의 본선 진출에 공을 세웠던 그는 이번 대회 미국과의 경기에서 공격수 뺨치는 절묘한 왼발 감아차기 골을 터뜨리며 ‘골 잘 넣는 수비수’ 지위를 확고히 했다. 중앙 수비수로서 스피드가 좋은 편에 속한다는 점도 김영권의 강점이다. 고교 강호 신갈고 시절부터 ‘될성부른 떡잎’의 자질이 충분했던 김보경(홍익대) 또한 칭찬이 아깝지 않다. 대학 진학 후 지난해 1, 2학년 대회에서 홍익대의 우승을 이끌기도 했던 김보경은 김민우와 공통점이 많다. 김민우처럼 수비수 위치까지 소화하지는 않더라도, 날카로운 왼발에다 개인 전술과 패스 역량, 측면과 중앙을 가리지 않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할 수 있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이 대학생 선수들 이외에도 20세 이하 대표팀에는 이름이 좀 더 많이 알려진 프로 선수들도 있다. 중원의 핵 구자철(제주)을 비롯해 윤석영(전남), 이승렬(서울), 조영철(알비렉스 니가타), 서정진(전북) 등이 그들이다. 결국, 이번 대표팀에 두드러진 슈퍼스타급 선수들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각의 선입견처럼 가망 없는 선수들로 구성된 가망 없는 팀은 결코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다. 20세 이하 대표팀이 대성공한 중심에는 역시 홍명보 감독이 있다. 어떤 감독들이 ‘11’이라는 팀의 능력을 9나 10밖에 발현시키지 못하는 데 반해, 이른바 명장의 소리를 듣는 지도자들은 보유하고 있는 자원의 역량을 극대화시키는 포메이션과 전술을 구사함으로써 12, 13의 효과를 낳곤 한다. 올해 2월 취임한 ‘초보 감독’ 홍명보는 이번 대회에서 틀림없이 후자의 경우로 분류되어야 한다. 우선 독일전부터 구사했던 4-2-3-1 포메이션이 매우 큰 효과를 가져왔다. 상대가 빠르게 우리 위험 지역으로 넘어오는 것을 허용했던 카메룬전과는 달리, 독일전을 기점으로 우리의 미드필드 장악력은 눈에 띄게 좋아졌고 이것이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 첫 경기의 실패를 거울 삼아 신속하고도 올바른 수정에 성공한 셈인데, 이는 지도자들에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홍감독은 선수들의 이름값에 연연하기보다 자신이 의도하는 전술에 가장 적합한 선수들을 선택하는 데서도 안목을 발휘했다. 선수들에 대한 칭찬과 격려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가시적인 공격 포인트를 올리지 못해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선수들의 공헌도를 틈틈히 언급함으로써 팀 전체의 분위기를 좋게 가져갔다.

‘감독 홍명보’가 첫 번째 대회에서부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은 역시 그의 풍부한 국제 경험과 보스 기질에서 찾을 수 있다. 홍감독은 감독으로서는 비록 초보이나 선수로서 수많은 각종 대회에 출전했던, 비길 데 없는 경험을 지닌 인물이다. 토너먼트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고 그때그때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효과적인지를 잘 알고 있다. 무게감과 유연성을 겸비한 리더십의 소유자라는 측면이 신세대들의 자연스러운 존경심을 이끌어냈다는 생각이다. 홍명보 감독에게서 앞으로도 계속 ‘한국의 베켄바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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