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지먼트로서 우뚝 선 한국의 티모시 쿡은 누구인가
  • 이철현 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09.10.13 17:4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리더를 리드하는’ 재계 2인자 열전

 

ⓒ일러스트 박현정

 


기업의 경영 주체는 리더(leader)와 매니지먼트(management)이다. 리더는 기업 비전을 제시하고 전략을 구상하며 임직원에게 열정을 불어넣는다. 매니지먼트는 기업 비전에 맞춰 조직에 질서를 부여하고 일상의 조직 운영을 책임진다. 스티브 잡스 애플 회장이 리더라면 티모시 쿡 애플 최고운영책임자(COO)는 매니지먼트이다. 카를로스 곤 르노닛산얼라인언스 사장이 리더라면 티에리 무론게 르노 최고재무책임자(CFO)가 매니지먼트이다. 스티브 잡스의 천재성과 티모시 쿡의 조직 운영 능력이 융합하면서 세계 MP3플레이어 시장 70% 점유라는 아이팟 신화가 만들어졌다. 카를로스 곤이 지닌 혁신적 사고 능력과 열정은 무론게의 치밀한 회계·재무 능력이 뒷받침되면서 닛산자동차의 V자 회복을 가능케 했다.

국내 기업 문화에서 매니지먼트로 분류할 만한 2인자를 찾기는 쉽지 않다. 기업 소유주가 최고경영자를 겸직하므로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된다. 기업 설립과 성장 과정에서 창업자는 가부장적 권위로 기업을 이끌었다. 국내 1, 2위 기업집단인 삼성그룹이나 현대·기아차그룹에서 기업 소유자가 지닌 가부장적 권위는 창업주에 못지않다. 절대 권력을 행사하다 보니 리더만 있고 매니지먼트는 없다. 국내 기업에서 2인자는 매니지먼트라기보다 비서나 보좌진 성격이 짙다. 국내 대기업집단 2인자라고 분류할 만한 이들 가운데 비서나 집사 출신이 다수인 것은 이 때문이다. 대기업 임원 출신의 한 관계자는 “계열사 인사 가운데 소유주가 경영 수업을 받거나 수행 업무를 담당한 부서 출신들이 어김없이 기업 실세로 등극한다”라고 말했다.

내세울 만한 경영 실적 없어도 회장의 신임 한 몸에 받아

강유식 ㈜LG 부회장이 대표 사례이다. 강부회장은 기업 경영인이라기보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집사’와 다름없다. 구씨와 허씨 집안이 결별하는 과정에서 구씨 집안의 이해를 대변하며 LG와 GS 그룹 분리를 주도한 이도 강부회장이다. 지난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한나라당에 이른바 차떼기 수법으로 불법 정치 자금 1백50억원을 제공하는 업무를 주도하기도 했다. 구본무 회장은 강부회장을 절대적으로 신임한다. 구회장은 강부회장에게 LG그룹 지주회사인 ㈜LG 대표이사를 맡겼다. ㈜LG는 주력 계열사인 LG전자와 LG화학 지분 30% 이상을 비롯해 14개 주요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강부회장은 ㈜LG 재경팀·인사팀·경영관리팀·브랜드관리팀·법무팀을 이끌며 14개 계열사 임원 인사와 실적 관리를 통해 계열사를 통치한다. 강부회장은 구회장이 1995년 LG그룹 회장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장실 부사장으로 전보 발령받았다. 회장실이 구조조정본부로 확대 개편되자 구조조정본부를 이끌면서 구회장을 그림자처럼 보좌했다. 2003년 지주회사 체제로 바꾸는 작업을 순조롭게 마무리한 이도 강부회장이다. 

총수 입맛에 맞게 처신한 것이 경영 실적이라면 실적이다. 최지성 삼성전자 완제품(DMC) 부문 사장은 이들과 다르다. 비서실 출신이지만 자기가 맡은 영역에서 눈부신 성과를 내 2인자 자리를 꿰찼다. 지난 2006년 디지털미디어(DM) 총괄 사장 시절 보르도 브랜드를 내세워 미국 시장에서 소니를 제치고 액정표시장치(LCD) TV 시장 점유율 1위라는 쾌거를 거두었다. 당시 삼성전자 글로벌 마케팅 임직원 전원이 미국 뉴욕에 모여 비공개 축하연을 열었다. 그날 축하연의 주인공은 최지성 사장이었다. 최사장은 삼성전자 애니콜을 세계 휴대전화 단말기 시장에서 모토로라를 제치고 시장 2위 브랜드로 끌어올렸다. 삼성전자가 지난 3분기 영업이익이 4조원을 넘기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부문은 휴대전화 단말기를 필두로 한 완제품 부문이다.

최사장의 입지는 삼성전자 부품(DS) 부문을 이끄는 이윤우 부회장보다 탄탄하다. 직위에서는 이부회장보다 밀리지만 삼성전자 대표로 최사장을 꼽지 않는 이는 드물다. 최지성 사장은 지난 6월 이명박 대통령 방미 당시 경제인 수행단에 삼성그룹 대표로 동행했다. 최사장은 요즘 이재용 전무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고 있다. 최사장은 삼성전자 주요 고객사 최고 경영진을 만날 때마다 이전무를 합석시키고 있다. 최사장에게 소유주를 보좌하는 것은 낯설지 않다. 그는 지난 1982년부터 3년 동안 회장 비서실 기획팀 소속으로 일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최사장은 향후 삼성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비서나 집사에 불과한 일부 2인자, 경영 지배 구조의 후진성 드러내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은 2인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현대·기아차그룹 관계자는 “(정몽구) 회장이 정주영 명예회장 시절 가신들 탓에 박해를 받은 기업을 잊지 못해 가신이 주변에 나오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2인자로 주목받으면 가차 없이 내처진다. 정회장이 수시로 사장 인사를 단행하는 것도 이 때문으로 해석된다. 현대·기아차그룹 임원들만큼 언론에 나오는 것을 무서워하는 대기업집단 임원진이 없다. 임원 인터뷰 요청이 올 때마다 현대·기아차그룹 임원들은 한결같이 “(정몽구) 회장이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계열사 경영진이 나서는 것은 불경이다”라고 말했다. 현대정공 시절부터 정몽구 회장을 보좌한 박정인 HMC 명예회장마저 현대모비스 부회장 시절 인터뷰에 나오기를 꺼려 했다.

그런 만큼 김동진 현대모비스 부회장은 보기 드문 사례라 할 만하다. 현대·기아차그룹 사장단이 수시로 교체되는 가운데 김부회장은 승승장구했다. 지난 2000년 상용차 부문 사장을 맡은 이래 2001년 현대차 총괄사장, 2003년 현대차 총괄부회장을 맡았다. 2008년9월 현대모비스 부회장으로 옮기기 전까지 6년 가까이 현대차 대표이사를 지냈다. 현대·기아차 사장단 가운데 최장 기록이다. 김부회장은 정회장의 심중을 가장 잘 헤아리는 측근으로 평가받는다. 사심이 없고 사내 정치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정몽구 회장의 신임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는 유형이 아니다 보니 오랫동안 정회장의 분신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김부회장은 5천억원에 불과하던 연구개발비를 2조원 가까이 증액하고 미국 앨라바마 공장을 준공해 현대차가 세계 금융 위기 와중에서 미국 시장에서 약진하는 발판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강정원 KB금융지주 회장 대행은 2인자로 오랫동안 와신상담하다가 1인자에 오른 인물이다. 강대행은 지난 2004년 국민은행장에 취임하면서 지금까지 2인자로서 지냈다. 지난 9월29일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이 물러난 후 회장 대행과 국민은행장을 겸직하면서 국내 최대 금융 기관의 수장으로 부상했다. 강대행은 뱅커스트러스트 한국 대표를 지낼 때부터 황 전 회장과 경쟁을 벌였다. 황 전 회장이 이대통령의 지원에 힘입어 KB금융지주 회장에 입성하자 주요 경영 사안마다 이견이 돌출했다. 유상증자를 비롯해 주요 회사 경영 정책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내며 황 전회장을 견제했다. 강대행은 자리에 오르자마자 황 전 회장측으로 분류되던 인사들을 조사역이나 무보직으로 밀어내고 측근 인사를 요직에 등용했다. 최측근 인사인 최인규 국민은행 전략담당 부행장에게 KB금융지주 전략담당 부사장을 겸임하게 했다. 황 전 회장을 구명하는 데 나섰던 부서장 다수는 영업점으로 밀어냈다.

강대행은 2인자이기를 거부한 2인자이다. 국내 기업 문화에서 2인자는 총수의 분신이다. 언감생심 1인자를 꿈꿀 수 없다. 강대행의 경우는 국내에서 보기 힘든 사례이다. 강대행이 2인자이기를 거부하고 1인자와 대립할 수 있는 것은 KB금융지주가 지분 분산이 잘 이루어진 금융 기관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비서나 집사에 불과한 인사가 2인자로 군림하는 것은 국내 대기업집단이 보유한 경영 지배 구조의 후진성 탓이다. 순환출자 구조 같은 변태적 지배 구조로 인해 5%에 미치지 못하는 지분을 가진 총수가 대기업 집단을 황제처럼 통치한다. 국내 자본주의 역사가 이제 반세기에 불과한 탓도 있다. 경제 구조가 고도화하고 지분 구조가 분산되면 개선될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권력 지향 기질이 있는 인사가 경영 실적을 내세워 1인자에 오를 수 있을 때 한국 대기업집단은 경제 규모에 어울리는 경영 지배 구조를 갖출 수 있지 않을까.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