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추픽추 사람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 이종호 |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전문위원 ()
  • 승인 2009.10.2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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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의 후예들이 산꼭대기에 세운 절묘한 공중 도시

▲ (큰 사진)잉카제국의 초반기 수도였던 마추픽추는 해발 2천2백80m나 되는 높이에 건설되었다. (오른쪽 아래)마추픽추를 최초로 발견한 미국인 하이럼 빙험의 표지석.


1909년 미국 예일 대학의 하이럼 빙험(Hiram Bingham)은 1911년 페루의 가파른 산허리에서 한 도시를 발견했다. 빙험이 발견한 유적은 잉카의 초반기 수도인 ‘마추픽추(늙은 봉우리라는 뜻)’이다. 마추픽추는 잉카의 수도였던 쿠스코 시에서 우르밤바 강(아마존 강의 원류)을 따라 북서쪽으로 1백14㎞ 내려간 지점에 건설되었으며 해발 2천2백80m이다. 마추픽추는 총면적이 5㎢로 도시 절반가량이 경사면에 세워져 있고, 유적 주위는 성벽으로 견고하게 둘러싸여 완전한 요새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마추픽추의 평면은 그야말로 놀랍다. 마추픽추는 잉카인들의 이중성(상과 하, 우측과 좌측, 남성과 여성, 시간과 공간)이라는 믿음을 토대로 하는 절묘한 위치에 의도적으로 건설되었다. 우선 마추픽추는 와이나픽추(Huayna Picchu)라는 원뿔 모양의 봉우리와 마주보고 있는데, 와이나픽추는 잉카인들이 토템으로 신봉하는 두 가지 동물의 형태를 갖고 있다. 와이나픽추 봉우리를 앞에서 보면 마치 퓨마의 형상으로 보이며 좌측에 있는 세 개의 작은 봉우리는 마치 새(예 콘도르)가 날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잉카인들에게 와이나픽추는 지상과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신성한 산으로 그곳에서 바라보이는 대지에 신성한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마추픽추가 빙험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이래 차츰 비밀이 밝혀지고 있다. 우선 마추픽추는 제례 의식의 중심지로 약 1천2백명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며, 테라스 형태의 농업 구역과 도시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계단식 밭에서는 옥수수와 감자뿐만 아니라 ‘안데스의 초록빛 황금’인 코카 잎도 재배했고, 가축을 따로 길렀다.

사람이 살던 흔적 전혀 보이지 않아

▲ 인티와타나는 사제들이 동짓날 하루 동안 태양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곳이다.

마추픽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수준 높은 건축 기술이다. 커다란 돌을 다듬은 솜씨가 상당히 정교하다. 각 변의 길이가 몇 m나 되고 모양도 제각각인 돌들을 정확하게 잘라 붙여서 성벽과 건물을 세웠다. 특히 중요한 건물의 경우 돌의 표면을 젖은 모래에 비벼서 매끄럽게 만들었기 때문에 종이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연결되어 있다.

마추픽추에서 눈에 띄는 것은 천문 관측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건축물이다. 하나의 거대한 돌을 깎아 만든 인티와타나(Intihuatana, 케추아어로 태양을 끌어들이는 자리)는 해시계와 유사한데 동짓날(남반구에서는 여름) 하루 동안 사제들은 그곳에서 제물을 바치며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잉카인들은 태양이 두 개의 ‘의자’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북쪽의 주 의자와 남쪽의 보조 의자가 그것이다. 태양이 남쪽 의자에 자리 잡을 때인 하지가 한 해의 시작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잉카인들은 인티와타나에 이마를 대면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고 믿었다.

빙험은, 현장에서 잉카 제국을 상징하는 도자기, 금속, 섬유 등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마추픽추가 어떤 정책적인 결단(군사 전략적 측면, 실용성 미비)에 의해 포기되었다고 추정했다. 학자들은 대체로 태양신의 후예로 숭배받은 잉카 제국의 아홉 번째 통치자로서 ‘세상의 개혁자’로 불리는 파차쿠텍(재위 1438?71년)이 마추픽추를 건설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반면에 ‘3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을 근거로 망코 카팍이 세운 잉카 최초의 수도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것은 망코 카팍이 “내가 태어난 곳에 세 개의 창이 있는 석조 벽을 세우라”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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