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나는 외국인 최고 경영진 기업 문화에 새바람 몰아친다
  • 김회권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09.10.27 18:2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LG전자, 9명 중 6명으로 최다…기아차는 피터 슈라이어 영입으로 큰 효과 보기도


국내 대기업 집단 최고 경영진에 파란 눈의 외국인이 늘어나고 있다. 총수 일가가 다수를 차지하는 국내 대기업 집단에 혁신적인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이다. 해외 현지 법인의 대표에 외국인을 기용하는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하지만 대기업 집단 관제탑(컨트롤타워)이라고 할 수 있는 국내 본사 최고 경영진에 외국인 임원을 영입하는 시도는 혁신이라고 부를 만하다. 한두 사람을 영입하면서 첫발을 내디딘 곳도 있고, 최고 경영진급 상당수를 외국인으로 교체한 곳도 있다. 글로벌 인재를 채용하기 위한 전담 부서를 신설하는 업체도 눈에 띈다.

가장 앞선 곳은 LG전자이다. 본사 최고 경영진 아홉 명 중에서 여섯 명이 외국인이다. 미국 제약업체 존슨앤존슨과 화이자를 거쳐 지난 2007년 12월에 임명된 더모트 보든 최고마케팅책임자(CMO)가 LG전자의 1호 외국인 경영진이다. 토마스 린튼 최고구매책임자(CPO), 디디에 쉐네보 공급망관리최고책임자(CSCO), 브래들리 갬빌 최고전략책임자(CSO), 제임스 셰드 최고 현장유통책임자(CGTMO), 피터 스티클리 최고인사책임자(CHO)가 경영진에 합류했다. 남용 LG전자 부회장을 포함한 세 명만이 국내 CEO 레벨 임원이다.

LG전자에 외국인 임원이 많은 것은 남용 부회장의 지론 때문이다. 남부회장은 취임 일성으로 “(국적과 관계없이) 세계에서 이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인물을 채용하겠다”라고 공언했다. 남부회장은 LG전자를 국적 없는 회사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실천하고 있다. 핵심 분야에 언제라도 외국인 임원을 영입한다는 입장은 지금도 그대로이다.

삼성전자는 외국인 임원 10명을 보유하고 있지만 대부분 연구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삼성전자 소속 외국인 임원은 주로 연구·개발(R&D) 전문가이다”라고 설명했다. 삼성 쪽 분위기는 외국인 임원을 기용하는 그 자체에 방점을 찍고 있지는 않다. LG전자가 적극적으로 영입에 나서는 것과 달리 글로벌화가 먼저 이루어진 삼성이 상대적으로 더딘 것이 특이하다.

최근 외국인 임원을 기용하는 데 의욕을 보이는 곳은 SK그룹이다. SK그룹의 주력 사업인 통신과 에너지는 내수용 사업이다. 해외 매출 비중이 적은데도 외국인 임원을 영입하는 것이 앞선 두 전자회사와 차이를 보인다. SK그룹은 글로벌 인재를 발굴하고 관리하기 위해 미국의 주요 기업에서 인사관리 업무를 수행한 린다 마이어스 상무를 ㈜SK의 ‘글로벌 인재 매니지먼트(GTM)’ 부서 책임자로 임명했다. SK텔레콤도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 등에서 인사와 조직 개발을 주로 수행했던 스티븐 프롤리를 부사장으로 영입하면서 직원의 글로벌화를 도모하겠다고 나섰다.

외국인을 최고경영자(CEO)로 영입한 곳도 있다. 두산그룹은 지난 2006년 미국 출신의 제임스 비모스키 부회장을 CEO로 영입했다. 지난 7월에는 펩시와 사모투자 그룹 서버러스 등에서 인력 관리와 보상 시스템 구축 등을 전문으로 해 온 찰스 리홀리를 ㈜두산의 인사총괄사장(CHRO)으로 임명했다.

이들 사례만 보면 외국인 임원을 영입하려는 노력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좀 더 시야를 넓히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국내 10대 대기업 중 외국인 임원을 기용하고 있는 곳은 다섯 군데에 불과하다. 삼성전자와 LG전자를 제외한 나머지 세 곳(KB금융, 신한지주, SK텔레콤)은 각각 한 명의 외국인 임원을 두고 있을 뿐이다. 포스코, 한국전력, 현대차, 현대모비스, LG화학에는 외국인 임원이 없다. 문지원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각 기업마다 필요 정도가 다르다. 조직 규모나 사업 형태에 따라서 차이를 보인다. 글로벌 시장을 무대로 사업을 전개하는 곳은 아무래도 해외 시장에 정통한 베테랑들을 원하니까 활용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곳도 있기 마련이다”라고 말했다.

해외 사업 활발한 기업에서 ‘영입’ 적극적

외국인 임원 영입에 적극적인 곳은 해외 사업이 활발한 곳이다. 해외 사업의 비중이 높은 곳을 위주로 외국인 전문 인력의 수요가 발생하고 공급을 받고자 한다. 박형철 머서코리아 대표는 “최소한 자사 매출의 50% 이상이 해외에서 발생하고 국내 본사의 한국인 직원과 해외 현지 인력 비중을 보았을 때 50%가 넘는다면 외국인 임원을 영입할 조건이 된다”라고 설명했다.

기업 총수들이 직접 발 벗고 나서 영입이 이루어지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최근 달라진 디자인으로 조명을 받고 있는 기아차의 피터 슈라이어 부사장은 정의선 당시 기아차 사장(현 현대차 부회장)이 ‘디자인 경영’이라는 화두를 내걸고 영입했다. LG전자의 CEO 레벨 임원들 역시 남용 부회장의 적극적인 인재 영입 정책의 결과물이다. 두산 역시 박용만 회장의 강한 의지가 반영되고 있다.

CEO들이 요구해 앉힌 외국인 임원들의 전공은 과거에는 주로 연구·개발 분야였지만, 지금은 경영 전반이나 인사 등 기업의 핵심 분야이다. 특히 SK그룹이나 두산그룹의 사례에서 보듯 인사 분야에 외국인 임원이 임명되면서 조직이 받는 충격은 적지 않다.

인사는 전통적으로 순혈주의가 강한 곳이다. 순수 공채 출신인 ‘성골’이 중용되는 부서이다. 특히 인사 책임자 자리는 그룹 총수의 의중을 꿰뚫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필수 조건이었다. 이제 그곳에 파란 눈의 외국인이 앉게 된 것이다. 인사 부문을 혁신해 조직 문화 전반의 혁신을 유도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헤드헌터는 “CEO들은 해외 출장을 다니면서 선진 조직 문화를 많이 접할 수밖에 없다. 조직의 위와 아래에서 느끼는 선진화의 체감 정도가 다르다. 아래로 자신의 생각을 가장 빠르게 전달하는 방법으로 이런 식의 충격 요법을 택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기업의 규모는 글로벌화되었지만 조직 문화는 여전히 수출 주도형 기업을 벗어나지 못한 국내 기업의 딜레마를 깨기 위해 이런 방법을 택했다는 설명이다.

조직 구성원들에게 자극제 되기도

CEO가 영입해 한국에 온 외국인 인사 담당 임원은 먼저 한국식 인사 관리 제도와 충돌한다. 일례로 업무 평가제를 들 수 있다. 개인에 관한 업무 요소에 한정지어 평가하는 것이 글로벌 스탠다드이지만 한국식 제도에는 개인과 조직이 혼재되어 있다. 조직의 실적이 좋으면 개인에 대한 평가도 후해지고, 반대로 조직의 실적이 낮으면 개인에 대한 평가도 박해진다. 한국인 임원에게는 당연하지만 파란 눈의 이방인에게는 생소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외국인 임원이 영입된다는 의미가 한국식 인사 관리 제도가 도전받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외국인 임원이 들어오면서 가장 빠르게 변화를 겪은 곳은 LG전자이다. 불과 2년도 안 된 기간 동안에 여섯 명의 외국인 경영진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한때는 불만의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조직 문화의 차이가 컸다. LG전자의 한 부장급 간부는 “LG의 조직 문화가 인화와 단결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외국인 임원이 들어오면서 그런 전통적인 요소들이 퇴색된 감이 있다는 지적이 나오곤 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올해 금융 위기 와중에도 LG전자가 좋은 실적을 내면서 그런 불만도 잠잠해졌다.

기아자동차는 외국인 영입 효과를 가장 크게 본 곳이다.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 중 한 명인 피터 슈라이어 기아차 디자인총괄 부사장(CDO)의 영입과 맞물려 세련되게 바뀐 기아차의 디자인이 좋은 반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언론에서는 “기아차의 패밀리 룩 디자인을 완성했다”라며 슈라이어 부사장을 호평했다. 반면, 임원 한 사람이 바꾼 결과라는 평가에 대해 불만 섞인 목소리도 있다. 기아차의 한 직원은 “디자인팀이 차량 디자인을 완수하면 슈라이어 부사장은 이를 감수하고 자문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마치 슈라이어 부사장이 A부터 Z까지 모두 한 것처럼 보도되는 것은 오보이다”라고 말했다. 기아차의 한 간부는 “디자인 경영은 정의선 부회장이 제안한 것인데, 슈라이어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옳지 않다. 비록 스타 디자이너라는 것 때문에 띄워줄 필요도 있지만, 조직 사회에서 그 사람 혼자 다 한 것은 말이 안 되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CEO 의도대로 외국인 임원이 새바람을 불러일으킬지는 미지수이다. 전문가들은 “아직 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평가를 논하기는 이르다”라고 말한다. 구체적인 평가를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반면, 현실적으로 도움을 주는 측면은 존재한다. 찰스 홀리 사장은 두산그룹의 인수·합병(M&A) 이후 과정에서 활약 중이다. 두산그룹이 지난 2007년 인수한 미국 소형 건설장비 전문 업체인 밥캣 등 해외 업체와 조정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인사 제도로 갈등이 발생할 수 있는 소지를 잘 조율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조직 내 직원들에게는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외국인 임원이 팀에 있는 경우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해 외국어 공부의 필요성을 자연스레 느끼는 등 글로벌 마인드를 부여할 수 있다. 통역이 있다고는 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LG전자의 한 부장급 간부는 “회의나 발표가 영어로 진행되는 경우 통역이 있다고는 해도 100% 이해하기가 어렵다. 다 이해한 사람도 있고 80%만 이해한 사람도 있고. 꼭 국제연합(유엔) 회의 같다”라고 말했다.

여전히 국내 대기업 중 외국인 임원이 없는 곳이 많지만 앞으로는 바뀔 가능성이 크다. 문지원 연구원은 “이미 산업화 시대의 조직 논리가 깨졌고, 글로벌화가 진척되면서 다양화에 초점을 두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여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계적인 흐름이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 임영무

"외국인 임원의 영입은 공고한 흐름이다." 기자가 외국인 임원 영입이 ‘하나의 흐름’이냐고 묻자 박형철 머서코리아 대표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최근 박대표는 외국인 인재를 구해달라는 기업들의 부탁을 많이 듣는다. 머서는 뉴욕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인사컨설팅업체이다. 머서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이용해 외국인 인재를 영입하려는 기업들의 청탁이 많을 수밖에 없다.

최근 기업들이 외국인 임원을 영입하는 것은 ‘한 명의 천재를 데리고 와서 조직을 살리겠다’는 의도는 아닐까?

그런 개념은 아니다. 글로벌 기업으로 나가는 단계를 우리도 밟아나가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GE나 화이자 본사에는 다양한 인종, 다양한 국적의 사람이 있다. 기업이 진정으로 글로벌화되었나를 보려면 본사의 인종과 국적을 보면 된다. 우리나라 기업의 비즈니스는 글로벌화되었지만 인재 풀이나 프로세스는 그렇지 못하다.

히딩크 감독을 영입하는 것과 많이 비교한다.

그런 식의 전문가 영입과는 좀 다르다. 단기 전문가를 뽑았으면 그 역량만 딱 빼먹으면 끝일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은 앞으로도 자기네 이익을 많이 창출해야 한다. 오히려 전문성을 가진 사람에게 동기 부여를 위해 장기 인센티브를 주는 등 전문성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도록 밀어주는 것이 옳다.

갑작스런 외국인 임원 영입이 가지고 오는 문제점은 없나?

서서히 변화하는 것과 바로 본사로 능력 있는 사람이 임명되어서 오는 것 중 어떤 것이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신 CEO의 역할이 중요하다. CEO가 드라이브를 걸었으면 정착이 될 때까지 관리를 잘 해주어야 한다. 외국인 임원을 영입하는 것 자체가 조직에는 하나의 신호탄이다. 이럴 때 CEO가 제반 지원을 잘 해주어야 한다. 

외국인 임원 영입 대상자가 국내 기업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으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아직까지는 외국인 임원급들에게 서울이나 한국의 인지도가 낮다. 본국의 경력이 끊기면서 이주해 오는 것이라 두려움이 많다. 서구에서 한국으로 오는 것은 우리가 동남아로 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오케이를 하더라도 임원들에 대한 처우나 보상도 아직 초보 단계이고 보상 관행이나 협상 수준이 부족하다.

외국인 임원들이 적응하기도 쉽지 않을 듯하다.

다행인 것은 이 추세대로라면 외국인 임원이 늘어날 테니까 여건은 좋아질 것이다. 기업들 입장에서도 ‘컬처 코치’를 둘 필요가 있다. 직급이 낮더라도 조직에서 잔뼈가 굵은 분이 조직 문화에 관해 코치를 해주는 것이다. 외국인이라고 무조건 동양적인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낯설고 모르니까 힘들 뿐이다. 비업무적인 부분에서 도와주면 비용을 적게 들이면서 충성도도 오래 유지할 수 있다.

외국인 임원이 많이 올수록 국내파들의 입지가 줄어들 수 있다.

어느 나라 사람이 되었든 그 자리에 어울리는 역량을 가진 사람이 와야 한다. 예를 들어, 삼성이 GE와 동급의 회사라면 삼성의 재무책임자나 GE의 재무책임자는 동급이다. 한국 사람일 수도, 외국 사람일 수도 있다. ‘어느 국가 소속’인지보다는 ‘어느 기업 소속’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