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부산 ‘지방 대통령’ 배출 고시 출신 모임 ‘겸선회’ 눈길
  • 이춘삼 | 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09.10.27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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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관계·군 대통령 측근 다수, 현직 장관은 3명…ROTC 출신 대장 2명도 나와

▲ 서울 고려대학교 안암캠퍼스에 있는 고대교우회관 ⓒ시사저널 박은숙

고려대 교우회의 집계에 따르면 전체 교우회 울타리 안에 들어 있는 갖가지 교우 동아리가 2천여 개에 이른다. 이들 모두 나름으로 열심히 회원 친목 도모와 모교 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다. 동인회, 동우회, 동호회, 서클, 동기회, 단과 대학별·학과별·학번별 조직이 가로세로로 촘촘하게 얽혀 있는 모습이다.

이들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모임 중 하나가 겸선회(兼善會)이다. 겸선회는 사법시험과 3급시험(행정고시)에 합격한 동문들의 모임이다. 1965년 무렵에 만들어졌으며 현재 회원은 3백여 명. 법원·검찰과 정부 각 부처에서 고위 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거나 정계·학계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 겸선회 관계자에게 회원 명부를 보여달라고 했더니 난색을 표시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여서…”라고 했지만 어떤 사람이 무슨 공직에 있다는 사실이 그것만으로 프라이버시일 수는 없다. 정보 기관인 국정원의 원장-차장까지도 이름과 직책, 이력이 인터넷 사이트의 데이터 베이스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가 공개를 거절한 이유는 어쩌면 다른 데 있을 것이다.

고려대 동문들은 “관계(官界) 요로에 진출한 모교 출신 인사로 누가 (재직하고) 있느냐”라는 질문을 받으면 대체로 답을 하기에 앞서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행여 잘못했다가는 “끼리끼리 나눠 먹는다”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고, 이래저래, 달갑지 못한 인상을 주기 십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동문 대통령을 둔 죄 아닌 죄(?) 때문일 수도 있다.

MB 정부의 인사 정책을 언급할 때 자주 입에 오르는 말이 이른바 ‘고·소·영’이다. ‘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출신에 편중된 인사를 가리키는 신조어이다. 고려대 동문들은 ‘고·소·영’이라는 말에 펄쩍 뛴다. 오히려 ‘고·소·영’으로 분류된다는 이유로 기회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이 더 큰 피해자라는 불만도 나온다.


일부 동문들 “고려대 득세론, 실체는 다르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고 했다. ‘인사의 특정 집단·세력 편중’이 만약 사실이라면 이는 국론 분열의 원천이 될 위험성이 다분한 악성 종양이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시비곡직을 분명히 가리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다. 그러나 오히려 반대로 이 정부 출범 초기 고려대 동문들 사이에는 다른 의미로 인사에 대한 불만이 들끓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해도 해도 너무 심하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당연히 기용되어야 할 사람이 정부가 눈치를 보는 바람에 빛을 보지 못한 채 묻혀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는 문제 제기이다.

이기수 고려대 총장(고려대 법학 65학번)은 지난해 말 한 일간지에 ‘고·소·영이라는 말을 이제 거두라’라는 취지의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현실을 뜯어보면 세간의 오해와 달리 ‘고·소·영’의 존재 자체가 극히 미미하다. 이런저런 구실로 특정 학교 출신들이 오히려 역차별을 받고 있을 정도이다”라고 억울한 심정을 토로한 그는 “저급한 말장난에 구애받지 말고 참신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역설했다. 그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했다. 당시 고려대 출신을 보면 장관 1명, 차관 2명, 청와대 수석 1명뿐이며 장·차관을 합친 숫자는 44명 중 3명에 불과해 역대 정부 중 최저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서울대 출신으로 경제 부처에 재직하다 최근 한 법무법인으로 자리를 옮긴 한 인사는 “MB 정부 출범 이후 공무원 인사의 고려대 편중 현상이 심각하다고 보는가”라는 질문에 “그렇게 보는 것은 억지이다”라고 답했다. 그는 고려대 출신들이 네트워크와 단결력이 뛰어나고 예전부터 똘똘 뭉쳐 단합을 과시하는 전통이 있다는 점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깜냥이 안 되는 사람을 학연만으로 여기저기 끼워넣는 일은 보지 못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고 했다. ‘인사의 특정 집단·세력 편중’이 만약 사실이라면 이는 국론 분열의 원천이 될 위험성이 다분한 악성 종양이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시비곡직을 분명히 가리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다. 그러나 오히려 반대로 이 정부 출범 초기 고려대 동문들 사이에는 다른 의미로 인사에 대한 불만이 들끓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해도 해도 너무 심하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당연히 기용되어야 할 사람이 정부가 눈치를 보는 바람에 빛을 보지 못한 채 묻혀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는 문제 제기이다. 이기수 고려대 총장(고려대 법학 65학번)은 지난해 말 한 일간지에 ‘고·소·영이라는 말을 이제 거두라’라는 취지의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현실을 뜯어보면 세간의 오해와 달리 ‘고·소·영’의 존재 자체가 극히 미미하다. 이런저런 구실로 특정 학교 출신들이 오히려 역차별을 받고 있을 정도이다”라고 억울한 심정을 토로한 그는 “저급한 말장난에 구애받지 말고 참신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역설했다. 그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했다. 당시 고려대 출신을 보면 장관 1명, 차관 2명, 청와대 수석 1명뿐이며 장·차관을 합친 숫자는 44명 중 3명에 불과해 역대 정부 중 최저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서울대 출신으로 경제 부처에 재직하다 최근 한 법무법인으로 자리를 옮긴 한 인사는 “MB 정부 출범 이후 공무원 인사의 고려대 편중 현상이 심각하다고 보는가”라는 질문에 “그렇게 보는 것은 억지이다”라고 답했다. 그는 고려대 출신들이 네트워크와 단결력이 뛰어나고 예전부터 똘똘 뭉쳐 단합을 과시하는 전통이 있다는 점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깜냥이 안 되는 사람을 학연만으로 여기저기 끼워넣는 일은 보지 못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는 가까운 예로 윤진식 대통령실 정책실장 겸 경제수석의 경우를 들었다. 윤수석으로서는 대통령과 대학(경영학과) 선후배 사이인 데다 대선 캠프 참모, 대통령직인수위를 거친 경력 등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몸을 사리지 않고 일하는 스타일, 차가울 정도로 원칙에 충실한 자세,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소리 없이 일을 처리해내는 능력 등의 강점이 그를 그 자리에 오르도록 만든 일차적 요소일 것이라는 풀이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그 이상의 중책을 맡기기에 충분한 재목임에도 시대 상황에 따라 한 템포 쉬고 있는 상태로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관찰이었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고려대 출신으로 정부 내 요직에 진출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현재 내각에는 현인택(정외 74) 통일부, 이귀남(법학 69) 법무부, 정종환(정외 65) 국토해양부, 이렇게 세 명의 장관이 들어가 있다. 또, 청와대에는 윤진식(경영 67) 정책실장, 박형준(사회 78) 정무수석, 어윤대(경영 63) 국가브랜드위원장, 곽승준(경제 80) 미래기획위원장, 박선규(교육 81) 청와대 제1 대변인이 있다.

고려대 출신들은 김중권(법학 59) 변호사(법무법인 양헌 고문)가 김대중(DJ) 대통령 당선인 비서실장 자리를 거쳐 1998년 2월 비서실장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1999년 11월까지 재임하던 시기를 관료 사회에서 고려대의 전성기로 꼽는다.



DJ 정부의 출범과 함께 시작한 1기 비서실장으로서 그가 맡은 역할은 명백했다. DJ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관료 사회와 다소 거리가 멀었던 DJ와는 보완적 관계를 형성하는 입장에 있었기에 그에게는 TK(대구·경북) 쪽과 관료 사회를 아울러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자연히 공직자 인사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장관 자리보다 시선을 덜 끄는 차관급 인사에서는 막강한 파워를 행사했다. 그의 성품 자체가 그런 편이라고 한다. 그는 1989년 민정당 사무차장직을 떠날 때 후임자에게 몇 사람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건네면서 “각별히 챙겨 달라”라고 부탁을 했을 정도로 연이 있는 사람들에게 신경을 많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가 하면 노무현 대통령 시절의 이병완(신방 73) 비서실장은 그와는 전혀 다른 입장을 취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이실장이 결벽증이 있다고 여겨질 정도로 이런 문제와 거리를 두어 몸조심을 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실장은 한 정권 내에서 비서관으로부터 시작해 비서실장까지 오른 최초의 사례를 남기기도 했다. 기획조정비서관-정무기획비서관-홍보수석을 거쳐 대통령 임기 3년차에 이르렀을 때 비서실장에 임명된 그는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굳히기 전까지 자중하는 자세를 견지하며 인사 문제와 관련해서는 목소리를 전혀 내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던 시기, 선린 관계에 있으면서 동시에 영원한 경쟁자 구도를 형성해 온 고려대와 연세대 사이의 세력 분점에 결정적 변화를 몰고 온 일이 있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386 세대 최측근으로 통했던 안희정과 이광재의 상반된 인생 역정이 그것이다. 고려대 철학과 83학번인 안희정씨가 고려대 인맥을 대표했다면 연세대 쪽에서는 화공과 83학번인 이광재가 대표 선수로 떠올랐다. 노무현 의원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한 경력을 지닌 이광재씨는,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국정상황실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청와대에 들어갔으며 2004년 5월 17대 국회에도 진출했다.

안희정과 이광재의 엇갈린 운명

이광재씨가 돈과는 관련이 없는 기획 파트를 맡았던 것과 달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금 관리를 담당했던 안희정씨는 장수천 문제를 포함해 불쑥 불거져나온 불법 대선자금 수수 혐의로 재판을 받는 처지가 되고 1년간 복역하기에 이른다. 이는 그로 하여금 그후 5년간 공직 선거에 나설 수 없는 운명에 빠뜨렸고 줄기차게 발목을 잡는 족쇄로 작용했다. 이 사태가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안희정씨는 그 후로도 금배지를 달아보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희정씨의 낙마는 필연적으로 고려대 세(勢)의 약화로 귀결되었다. 역사에 가설은 없다고 하지만 안희정씨가 당시 함께 청와대에 들어갔더라면 양자의 균형점은 일정 정도 모양새를 갖출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세력 균형이 깨어짐으로써 이광재씨의 입김은 무풍지대에서 대항 세력 없이 강화되었다. 이광재씨의 독주에 힘입어 한쪽 세력으로의 쏠림 현상은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맥락에서 김우식 전 연세대 총장의 비서실장 기용을 김만수(연대 사회 84) 전 춘추관장과 박범계(연대 법학 85) 전 민정2비서관 등 386 출신 비서관들의 지원 사격에 힘입은 이광재씨의 작품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학창 시절 보살핌을 받은 은사에 대한 보답이었다는 것이다.

고려대는 전통적으로 법대 출신의 관계 진출이 강세를 이루어왔다. 전·현직을 막론하고 법학·행정학과 출신들이 상당수 주요 포스트에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법대 출신은 다수가 사법고시나 행정고시를 통해 관계에 진출해 다른 단과 대학보다 수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최근 시행된 인사에서는 검찰총장보다 사법시험 기수가 1기 아래인 이귀남(법학 69, 사시 22회) 법무부장관의 발탁이라든가 30년간 중앙정보부에서 몸담았다 퇴직한 후 민간 기업에서 근무하던 박성도씨(법학 65)가 국정원 2차장에 기용된 일, 이상득 의원 보좌관을 지낸 박영준(법학 80)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이 서울시 정무담당 국장-당선인 비서실 팀장-대통령실 비서관을 거쳐 현직에 임용된 사례 등이 눈에 띈다.

전국 16개 광역자치단체장(시장·도지사) 중에는 고려대 동문으로 오세훈(법학 79) 서울시장과 허남식(심리 68) 부산시장, 두 사람이 있다. 오시장은 2006년 5월 지자체 선거에서 당선되어 전임 이명박 시장으로부터 지휘봉을 물려받았다. 모교에서 석·박사(법학) 학위를 취득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조계에 입문했다. 변호사로 활동하던 중 MBC, SBS에서 시사 프로그램 진행을 맡으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부산시에서 잔뼈가 굵은 허부산시장은 현재 전국시도지사협의회장을 맡고 있다. 2004년 6월 보궐선거를 통해 시장직에 선출되었고 2006년 재선에 성공했으며, 지금까지는 눈에 띄는 대항마가 없어 3연임도 무난할 것으로 주변에서는 보고 있다.

또 하나 고려대에는 다른 학교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 있다. 여러 많은 직능별 교우 모임 중에 ROTC교우회의 활동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1963년 2월 고려대 102학군단이 제1기 2백38명의 소위를 임관시킨 이래 2009년 47기까지 7천명에 가까운 장교를 배출했는데 그중 장군 진급자가 7명에 이른다.
특히 박세환(1기·정외 59·전 국회의원·재향군인회장) 장군은 ROTC 출신으로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장군 진급의 기록에 이어 별 네 개를 달았으며, 2기의 김진호 대장(사학 60)은 국군의 최고위직인 합참의장에 오르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전국 대학의 십 수만  ROTC 출신 중 대장에 오른 사람은 이 두 명뿐이다. 이같은 독보적인 기록은 호랑이를 심벌로 내세우는 고려대의 기상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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