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한·일전’, 막이 열렸다
  • 김회권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09.11.02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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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타, ‘캠리’ 출시하고 한국 공략 본격 시동…현대·기아차의 본거지 치려는 의도로 읽혀

▲ 지난 10월26일 국내 최대 규모의 도요타 자동차 강남 전시장이 문을 열었다. ⓒ시사저널 박은숙


세계 1위 자동차업체 도요타는 현대·기아차에게 스승이자 적이다. 세계 유수 자동차업체가 그렇듯이 현대·기아차는 도요타의 생산·판매 방식을 벤치마킹했다. 그와 동시에 현대·기아차는 세계 시장에서 도요타가 차지한 자동차 시장 점유율을 잠식하느라 끊임없이 애썼다. 현대·기아차가 공격하고 도요타가 방어했다. 이제 바뀌었다. 현대·기아차가 70% 이상 차지한 내수 시장에 도요타가 들어왔다. 이제 도요타가 공격하고 현대·기아차가 수비할 차례이다.

도요타가 내세운 선봉장은 캠리이다. 도요타는 지난 10월20일 중형 세단 캠리(3천4백90만원)와 캠리하이브리드(4천5백90만원)를 출시한다고 발표했다. 하이브리드 차종 프리우스(3천7백90만원)와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RAV4(2WD 3천2백10만원, 4WD 3천4백90만원)도 함께 출시한다. 도요타는 1980년부터 캠리를 생산하기 시작해 6세대 모델까지 출시했다. 캠리는 2000년 이후 세계 시장에서 지난해까지 4백만대가량 판매한 슈퍼베스트셀링 차종이다. 도요타는 목표 시장을 장악하고자 마음먹으면 어김없이 캠리를 내세운다.

수입차가 대중적인 모델을 앞세워 출시한 적은 과거에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쓴잔을 마셨다. 그 사이 현대·기아자동차는 국내 시장에서 철옹성을 구축했다. 내수 시장 지배력이 공고해진 것이다. 그러나 도요타는 다른 자동차 회사와 다르다. 세계에서 가장 영업을 잘한다고 해서 ‘판매의 도요타’라고 불린다. 지금까지 도요타는 한국 시장에서는 고집스럽게 프리미엄 브랜드인 렉서스만 판매했다.

이제 중형 세단 시장을 공략하는 데 첫발을 내디뎠다. 발을 디딘 것은 그만큼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선봉에는 캠리가 있다. 캠리를 출시했다는 것은 세계 시장에서 치고 올라오는 현대·기아차의 본거지를 치겠다는 의도도 담겨 있다.

도요타는 일본 업체답게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후노 유키토시 도요타 본사 부사장은 “한국 시장에서는 국산차를 구매하는 고객과 수입차를 구매하는 고객이 다르다. 대량 판매하거나 이윤을 남길 뜻이 없다”라고 말했다. 매장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국내에서 영업하고 있는 매장 다섯 곳 가운데 가장 큰 서울 강남구 논현동 매장은 고객으로 붐비고 있다. 하루 평균 2백50여 팀이 논현동 매장에 들른다. 도요타 논현동 매장에서 일하는 영업사원은 “(영업사원들이) 밥을 못 먹을 정도로 안내하느라 정신이 없다. 더러는 안내를 못 받은 채 그냥 둘러보시는 분들도 있다”라고 말했다.

도요타를 잘 아는 수입차 경쟁 업체들은 가격에 상당히 놀란다. 캠리 2.5 가격은 3천4백90만원이다. 한 수입업체 관계자는 “관세, 딜러 수수료를 비롯해 이것저것 빼면 매우 낮은 가격이다. 당초 예상보다 5백만원 이상 낮다. 이윤을 남길 생각이 없다는 말이 정직하게 들릴 정도이다”라고 말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도요타는 1960년대 신진자동차와 제휴해 국내 시장에 진출했다가 철수한 전례가 있다. 이번에는 철저히 준비하고 들어왔으니 다를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 제조업의 상징인 탓에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면 역풍이 불수 있다. 이 탓에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 도요타는 시장에 진입할 때 대량으로 판매하지 않고 사회 공헌 사업 등을 통해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면서 점점 확장해가는 전략을 구사한다”라고 말했다.

낮은 가격 책정…현대차의 가격 경쟁 주도권 약화 노린 듯

혼다도 도요타를 따라 차량 가격을 낮추고 있다. 지난해 수입차 점유율 1위였던 혼다는 10월1일부터 ‘어코드’와 ‘레전드’의 가격을 5.7~9.9%까지 인하했다. 혼다코리아 관계자는 “혼다의 전략은 합리적인 가격으로 차량을 소비자에게 보급하는 것이다. 도요타가 가격을 발표하기 전부터 이미 엔화 환율 때문에 올린 가격을 내리려고 준비하고 있었다”라며 도요타와의 연관성을 차단했다.

‘도요타가 노리는 상대는 혼다나 다른 수입 업체가 아니라 현대·기아차이다’라는 주장은 가장 설득력 있는 이야기이다. 도요타는 올해 월 5백대, 내년 월 7백대 판매를 목표로 하고 있다. 도요타의 브랜드라면 그 정도 판매량을 올리기 위해서 굳이 가격을 낮출 이유가 없다. 한 국내차 회사 관계자는 “왜 낮은 가격을 책정했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혼다의 ‘어코드’나 닛산의 ‘알티마’와 가격을 비슷하게 맞춰도 도요타라는 네임밸류 때문에 판매량을 달성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데도 예상을 뛰어넘는 낮은 가격으로 들어온 것을 보아서는 혼다와 닛산은 우리의 경쟁 상대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현대·기아차를 노린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동안 일본 자동차회사들은 엔화 강세로 손해를 많이 보았다. 2008년 이후 엔화 가치는 원화에 비해 36%나 올랐다. 상대적으로 현대·기아차는 가격 경쟁력 면에서 이점을 누렸다. 현대차는 이때를 이용해 세계 시장 공략을 가속화했다. 현대차의 양손에는 ‘원화 약세’라는 권총과 ‘내수 시장’이라는 대포가 들려 있었다. 글로벌 마케팅을 공세적으로 펼칠 수 있었던 데는 탄탄한 내수 점유율을 바탕으로 비축한 총알이 있었다. 송상훈 교보증권 연구원은 “이번 도요타의 진출은 현대차의 안방을 직접 공략하기보다는 현대차가 초과 이득을 취하지 못하게 만들어 가격 경쟁의 주도권을 약화시키려는 측면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현대차의 한 관계자는 “신경은 조금 쓰이지만 송두리째 시장을 내준다거나 현대차의 판매가 흔들릴 정도로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현대·기아차는 고객을 상대로 강남 지역에서 테스트 드라이빙 행사를 가지는 등 프로모션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또, YF소나타와 내년 1월 출시할 그랜저 신형 모델을 캠리의 대항마로 내세운다는 계획을 세웠다.

사전 예약 한 달 만에 도요타 코리아는 2천7백여 대 사전 예약을 접수했다.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현대차와 혼다, 도요타를 둘러싼 비교 논쟁이 한창이다. 도요타는 국내 시장 진입을 선언했을 뿐이지만 이미 어느 정도 내수 시장의 균열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신중한 판매의 제왕 도요타가 어떤 움직임을 보여줄지, 수입차 점유율 1위의 혼다는 어떻게 버텨 낼지, 국내 내수를 주름잡는 현대차는 어떻게 국내 시장을 방어할지, 이제 내수 시장이 뜨거워질 차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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