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왕과 실학자가 합작한 ‘새로운 건설’
  • 이종호 |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전문위원 ()
  • 승인 2009.11.10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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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한 설계와 거중기 등 10종류의 첨단 장비로 쌓아올린 성곽

▲ (작은 사진)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수원 화성이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가운데 성곽길을 따라 시민들이 산책을 하고 있다. (큰 사진)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경기도 수원 화성 중 장안문이 위용을 뽐내고 있다. 장안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북쪽 대문으로 정문이라 할 수 있으며, 국보 1호인 숭례문보다 큰 문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이다. ⓒ시사저널 임영무  


한국 성곽 발달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수원 화성이 다른 성곽과 차별되는 것은 상업적 기능과 군사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평산성(平山城) 형태로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성곽은 전통적으로 평상시에 거주하는 읍성과 전시에 피난처로 삼는 산성을 기능상 분리했는데, 수원 화성 성곽은 피난처로서의 산성은 설치하지 않고 평상시에 거주하는 읍성에 방어력을 강화시켰다.

그러므로 수원 화성은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보기 어려운 많은 방어 시설을 갖추고 있다. 망루는 물론 총안(銃眼), 즉 총구멍도 설치해 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등 다목적 용도로 건설되었다. 화성 남·북단에는 장안문과 팔달문, 동·서단에는 창룡문과 화서문을 세우고 남서와 동북 방향 높은 지대에 각기 화양루와 동북각루를 세워 비상시 군사 요충이 되도록 했다. 화성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류천에는 수문이자 교량 역할을 하되 비상시에는 군사 시설이 되는 북수문과 남수문을 건설했다.

화성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도시 기반 시설로서 인근 지역과 연결되는 새로운 개념의 신작로가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팔달산 기슭의 행궁과 화성 유수부 앞에서 정면으로 용인 방면으로 이어지는 십자형 도로가 건설되었다. 이 십자로 변에 상가와 시장을 배치해 상업 도시로서의 화성의 성격을 명확히 했다.

화성의 건축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다산 정약용(丁若鏞)이다. 정조는 실학자 다산에게 ‘삼남의 요충이요, 서울의 보장지지(保障之地)로서 만세에 길이 의지할 만한 터’인 수원 화성을 건설토록 한다. 당시 30세이던 다산은 왕실 서고인 규장각에 비치된 첨단 서적들을 섭렵하고 기존의 여러 문헌을 참고해 새로운 성곽을 설계했다.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수원 화성의 장안문에는 사정거리가 7백m인 위력적인 화기 홍이포가 설치되어 있다. ⓒ시사저널 임영무

작업 능률 높이고 장인들의 기술 증진도 이룬 전환점 돼

다산의 계획안은 5편으로 <성설(城說)> <옹성도설> <현안도설> <누조도설> <포루도설>로 되어 있다. 다산은 이 가운데 <성설>에 성의 전체 규모나 재료, 공사 방식 등 전반에 관한 내용을 적었다. 정약용은 기와 굽는 가마의 형태, 굽는 시기, 운반 방법 등은 물론 철물 구입과 제련 및 제품의 근량 감찰법, 인부의 마음가짐과 감독 방법, 부역의 부과 및 대납, 출납의 세세한 기록 등 장부 처리 방식 등에 대해서도 현재의 풍속을 일일이 거론하면서 비판하고, 새로운 제안도 하는 등 개선책을 제시했다. 정약용이 축성 계획안을 작성할 때의 나이는 겨우 31세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에 조정에는 경험이 많은 축성 전문가와 전쟁에 일가견이 있는 장군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화성과 같은 중요한 공사 계획을 젊은 학자인 다산에게 맡긴 것은 정조의 원대한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정조가 바란 것은 기존의 생각과 방식으로 짓는 성곽이 아니었다. 정약용은 정조의 뜻을 정확하게 꿰뚫고 상업 도시에 걸맞은 새로운 성곽을 구상했다. 바로, 시대에 맞는 새로운 성곽이었다.

수원 화성의 건설 계획이 치밀하고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당초 10년 정도 걸릴 것으로 보았는데 예정한 공기보다 훨씬 단축된 34개월(중간의 6개월 정역(停役)을 감안하면 28개월)로 마무리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빨리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은 설계 계획의 치밀함에도 있지만, 첨단 건설 기계가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축성에 동원된 기계 장비는 모두 10종류였다. <화성성역의궤>에는 각 장비의 종류와 공사장에 투입된 숫자가 명시되어 있다. 거중기 11량, 유형거 11량, 대거 8량, 별평거 1백17량, 평거 76량, 동거 1백92량, 발거 2량, 녹로 2좌, 썰매 9좌, 구판 8좌이다. 대거, 평거, 발거는 소가 끄는 수레로 대거는 소 40마리, 평거는 소 열 마리, 발거는 소 한 마리가 끌었다. 별평거는 평거에 바퀴를 단 것으로 보인다. 동거는 바퀴가 작은 소형 수레로 사람 넷이 끌어 사용했으며, 썰매는 바닥이 활처럼 곡면을 이루어 잡아끄는 기구이고, 구판은 바닥에 둥근 막대를 여러 개 늘어놓고 끌어당기는 작은 기구이다.

화성 건축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것이 현대의 기중기와 같은 용도의 거중기이다. 거중기의 유용성은 적은 힘으로 큰 물건을 들어 올림으로써 인력을 절약할 수 있었고, 무거운 물건이 떨어지는 사고로 인한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사람이 직접 밧줄로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움직일 때 잘못해 손에서 밧줄을 놓치는 경우 물건이 떨어져 파괴되거나 사람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거중기는 이러한 위험을 예방할 수 있어 화성 건설에서는 작업 능률을 4~5배로 높일 수 있었다.

화성 축성 과정에서 각종 기계 장비가 적극 활용된 이유는 다산과 같은 실학자가 공사에 참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공사 여건이 노임제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장인의 부역 노동이 사라지고 하루 일당을 기준으로 한 노임제가 정착되자 장인 세계에 큰 변화가 처리되었다. 이제 장인들은 자신의 기술을 연마해 유능한 기술자로 인정받으면 다른 기술자보다 더 많은 노임을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이 장인들의 기술을 한층 증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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