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청정’해서 슬픈 우리의 아이들
  • 김재태 부국장 (purundal@yahoo.co.kr)
  • 승인 2009.11.10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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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중년을 넘긴 사람들이 지닌 어린 시절 ‘기억의 수첩’에는 전염병에 관한 기록이 적지 않을 것이다. 흰 연기를 줄기차게 내뿜는 소독차의 꽁무니를 낄낄거리며 뒤쫓던 그 시절에는 장티푸스, 이질, 콜레라, 디프테리아 등 지금은 이름조차 생소해진 전염병들이 주변에서 흔하게 나돌았다. 워낙 의식주의 위생 상태가 비루하고 조악했던 탓이다. 지금의 아이들에게 길거리에 떨어져 있던 음식찌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주워 먹던 그 시절의 얘기를 들려주면 다들 무슨 외계의 방언이라도 듣는 듯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원시인 취급을 할 것이다. 그만큼 요즘의 아이들은 ‘청정’하다. 충만한 건강 지식과 아이를 잘 키우겠다는 열성으로 무장한 부모들 덕에 아기 때부터 좋은 것들을 먹고, 입고, 덮으며 자란 덕분이다. 그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잘 살균된 음식을 섭취하며 청정하게 커온 아이들이 지금 위험에 빠져 있다.

가을의 문턱을 넘어서면서 빠르게 번져온 신종 인플루엔자(H1N1)의 기세가 거세다. 남의 일로만 여기며 느긋했던 사람들이 주변에서 확진 환자들이 나오면서 경계심을 더욱 곧추세우는 모습이다. <시사저널>이 지난 5월에 권위 있는 국내 바이러스 전문가의 분석 자료를 토대로 예측해 보도했던 ‘가을 대유행’이 이제 일상의 한가운데로 비집고 들어온 셈이다.

정부가 발 빠르게 대응해 백신 공급을 늘리고 진료 체계를 다잡으면서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형국이지만 불안한 분위기는 여전하다. 취약 지대인 학교의 방역이 아직 불완전한 가운데 학생들 사이에는 ‘신종플루에 걸려서 학교에 안 가기’ 같은 위험천만하고 어처구니없는 행동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다.

치사율은 낮으나 전염 속도가 엄청난 이 신종플루와의 전쟁에서 가장 걱정되는 집단은 어린아이들이다. 전문가들도 어린아이들의 감염 빈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지구 환경이 변하면서 앞으로 어떤 새로운 전염병이 창궐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전문가들의 경고 앞에서 우리는 좀 더 몸을 낮출 수밖에 없다. 신종플루에는 타미플루라는 맞춤 치료제가 있어서 그나마 숨통을 틔울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어떤 엄청난 일이 또 벌어질지 알 수 없다. 문제는 면역력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체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조사 결과는 상황을 더욱 어둡게 한다. 아기 때부터 면역력을 키울 기회조차 제대로 갖지 못한 데다, 체육 시간이 점차 줄어들고 운동장이 사라지는 환경에서 각종 사교육에 지쳐 체력을 탕진하는 학생들이 건강의 사각지대에서 벗어나올 수 있는 길을 이제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찾아야 한다. ‘청정’한 아이, 공부는 잘하되 나약한 아이보다 건강하면서 강건한 아이를 키워내는 것, 그것이 미래의 재앙에 맞설 가장 좋은 백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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