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견은 싸움을 부른다. 이견 때문에 살인하고,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세종시 문제로 ‘이견’들이 맞서고 있다. 참여정부 시절 동조했던 일부 여당 의원들은 이제 와서 이견을 보이냐고 비난을 받기도 한다. 4대강 사업에서도 이견이 충돌하고 있다. 동조하는 쪽에서는 어쩔 수 없이 동조한다는 속내를 내비치기도 한다. 이견이 맞서 충돌하는 정치판을 보면서 실망하는 국민도 있다. 그러나 최선의 합의에 이르는 과정에 이견이 없는 것이 문제일 수 있다.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를 알게 되면 지금 우리 사회의 분열상에 대해 오히려 낙관할 수도 있겠다. 이 책이 한국에서 번역·출간된 이유가 그렇다.
한국 사회는 영원히 다른 생각에 대해 관용을 베풀지 못하는 사회일까. 군부 독재 시절에는 ‘총화단결’을 국민에게 강요했다. 그것은 작은 조직 사회에서도 규율처럼 이야기되었다. 당시 “말 많으면 빨갱이이다”라는 억지 논리는 ‘반공방첩’ 구호와 함께 산골 촌로에게까지 먹혀들었다.
이견을 말하는 사람을 억압하는 것을 리더십으로 착각하는 상황에서 다양한 의견이 조직과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에너지로 작용하기는 어렵다. 이 책에는 실패 사례라 할 역사 속 장면들도 들어 있어 눈길을 끈다.
1961년 4월17일, 미국의 해군과 공군 그리고 중앙정보국은 피그스 만에서 쿠바를 침공하려는 1천5백여 명의 반카스트로파 쿠바 망명자들을 지원했다. 그 침공은 비참한 실패로 끝났는데, 두 척의 미국 보급선이 쿠바 전투기에 의해 격침되었고, 다른 두 척은 후퇴했으며, 네 척은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2만명의 정예군으로 구성된 쿠바군은 이들 가운데 상당수를 사살했고, 생존자 대부분을 생포했다. 미국은 포로들을 송환받기 위해 쿠바에 5천3백만 달러를 해외 원조의 형태로 제공해야 했고, 국제적인 비난과 함께 쿠바와 소련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쿠바 침공이 실패한 뒤, 케네디는 “내가 어쩌다 그런 어리석은 계획을 추진했을까”라고 한탄했다. 그 수수께끼에 대한 답은 케네디의 참모들이 무능력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대단히 노련하고 출중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참모들 중 그 누구도 침공에 반대하거나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 아서 슐레진저에 따르면, 케네디의 측근 가운데 몇몇은 개인적으로 그 계획에 의심을 품었지만 자칫 ‘온건파’라는 딱지가 붙는 것을 두려워했고, 또 감히 동료의 시선을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의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동조하는 행위 또한 나쁘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저자는 “대체로 동조는 현명한 행위이다.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따라 하다 보면 우리는 훨씬 잘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동조하는 이유는 종종 정보의 부족 때문이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결정하는지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정보 가운데 하나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군중 심리’를 설명하는 데 적절하다고 보인다. 사람들이 군중 심리에 휩쓸려 이견을 버리고 동조한 것을 옹호할 수도 있겠다.
문제는 전염병 돌 듯 넓게 퍼져가는 동조 때문에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정보까지 덮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동조에 익숙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따르고 침묵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드러내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이 책은 이견 없는 사회, 갈등 없는 조직이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견과 갈등을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제도적 원리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운다.
“우익 청년 탄생기도 있어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