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한 봉사 활동이 건강한 삶 주었다”
  • 노진섭 (no@sisapress.com)
  • 승인 2009.11.24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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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들 도우며 희망과 용기 얻고 간암 극복…투병하면서 욕심과 비관적인 생각 모두 버려

ⓒ시사저널 유장훈


간을 침묵의 장기라고 한다. 간에 이상이 생겨도 뚜렷한 증세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하다고 느끼면 간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경우가 흔하다. 박순범씨(63)도 간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동안 별다른 증세를 느끼지 못했다. 지난 1998년 늦가을 저녁, 지방에 있는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던 그에게 평소보다 더 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박씨는 “운전을 못 할 정도로 피곤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잤다. 잠시라고 생각했는데 1~2시간이나 잤다. 지금 생각해보니 간이 좋지 않다는 신호였다”라며 당시 느꼈던 피로감을 설명했다.

병원을 찾았다. 만성 B형 간염을 지나 간경화가 한창 진행되었다. 깜짝 놀란 박씨는 서울성모병원을 찾아 재검사를 받았다.

그는 “간암 직전 상태였다. 의사들은 나에게 쉬라고 했다. 완곡한 표현이지만, 이 말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주변을 정리하라는 사형 선고였다”라며 10년 전 일을 어제 일처럼 기억해냈다.

고민 끝에 1999년 6월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 사이 간경화는 암으로 발전했다. 의사는 색전술을 권했다. 색전술이란 암세포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혈관에 항암물질을 주입해서 암을 괴사시키는 치료법이다. 박씨는 항암제의 부작용 등을 우려해 색전술을 하지 않기로 했다. 대안은 간 이식이었다. 그는 “뇌사자의 간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내 키가 1백80cm에 체중도 95kg이었다. 이런 신체에 맞는 큰 간을 구하기는 하늘에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라고 말했다.

촌각을 다투는 마당에 일부 의사의 파업으로 병원을 나와야 했다. 자신에게 맞는 간을 확보할 때까지 집에서 기다려야 했다. 할 수 있는 일은 식이요법이 전부였다. 박씨는 “고기를 먹지 않고 생선도 흰 살 생선만 먹었다. 모든 음식은 싱겁게 먹었다. 특히 채소를 많이 먹었다. 식이요법은 치료 효과보다는 병 진행을 늦추는 정도라고 생각한다. 녹즙도 먹었는데 오히려 복수가 찼다. 간에 특별히 좋은 음식이 있다기보다는 매 끼니를 잘 먹는 것이 오히려 간에 좋다는 점을 경험했다”라며 식습관 변화를 설명했다.

돈·명예만 좇던 삶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삶으로

날이 갈수록 복수가 차고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갔다. 1년을 기다렸지만 뇌사자의 간을 구할 수 없었다. 당시 흔하지 않은 생체 이식을 시도하기로 했다. 산 사람의 장기를 이식하는 생체 이식은 박씨에게 모험이었다. 그는 “지금은 기술이 발전했지만 당시는 생체 이식 수술 수준이 낮았다. 생체 이식 사례도 드물던 시절이었다. 마침 처남댁이 간을 주겠다고 나섰다. 여자이지만 덩치가 좋아서 간 크기도 컸다. 내 간을 떼어내고 처남댁 간의 일부를 이식받았다”라고 말했다.

수술 후 또 다른 고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씨는 “수술 도중 신경을 건드려서 다리가 마비되었다. 횡단보도를 스스로 걷고 운전을 다시 할 수만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입이 돌아가고 휠체어에서 넘어지는 등 2년 동안 힘겨운 삶을 살았다. 힘들게 살다가 결국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힘들고 아파서 의사에게 죽여달라고 했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자신의 삶을 비관했다. 가망이 없다고 느꼈다. 우연히 하게 된 봉사 활동이 비관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간암 또는 간 이식 환자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했다. 오히려 박씨 자신이 희망을 얻었다고 했다. 그는 “수술을 앞둔 환자를 만나 격려해주었다. 나보다 심한 환자를 대하면서 내가 용기를 얻었다. 베푸는 일이 희망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체험했다”라며 자신의 경험담을 풀어놓았다. 

더 이상 휠체어를 타지 않는다. 운전도 한다. 투병 기간 동안 몸에 밴 등산 습관 덕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박씨는 “중풍으로 걷지 못하던 사람이 등산을 통해 걷는 것을 보았다. 나도 등산을 하면서 다리 감각이 돌아와 걷게 되었다. 집에서 10분 거리에 관악산이 있다. 매일 산에 간다. 왕복 2시간 반 정도 걸으면서 맑은 공기를 마신다”라며 등산 예찬론을 폈다.

발병 당시 하루에 담배 3갑을 피웠다. 거의 매일 양주 2병 정도의 술을 마셨다. 회사 생활은 삶의 전부였다. 사람답게 사는 삶이 아니었다고 회고한 박씨는 “나에게 회사는 인생이었고, 가정은 돈을 대주는 곳이었다. 가족과 살갑게 지낸 기억이 거의 없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타의에 의해 술도 마셔야 한다. 회사 일만 보고 살아온 삶이었다. 투병 후에야 사람을 쳐다보게 되었고, 인생을 정리하는 기회도 가졌다.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며 현재 삶에 대한 만족감을 나타냈다.

암을 이겨낸 사람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투병 전후 달라진 삶이다. 돈과 명예를 위해 살던 삶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인생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각박한 현실에서 그런 여유를 부리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이에 대해 박씨는 “대부분 자신이 없으면 회사가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버려야 한다. 꼭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면서 인정받으려고 무리한다. 부질없는 짓이다. 건강해야 일도 할 수 있다. 아무리 바빠도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으라고 조언하고 싶다”라는 말을 남기고 등산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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