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야심가의 ‘친환경’ 작품
  • 이종호 |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전문위원 ()
  • 승인 2009.12.01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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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말 14년에 걸쳐 만든 지중해-대서양 오가는 ‘뱃길’

▲ 미디 운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뒤 관광 명소가 되었다. ⓒAP


대서양과 지중해를 연결하려는 생각은 로마 시대의 네로 황제도 구상했을 만큼 매우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당대에 세계를 제패하겠다고 야심을 키운 16세기의 루이 14세에 의해 실현된다. 루이 14세가 운하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경제적인 목적도 있지만, 필요한 곳에 군사를 곧바로 보낼 수 있다는 정치·군사적 이점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미디 운하의 건설은 한 야심가의 작은 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지중해 남부에 위치한 베지에에서 태어난 피에르 폴 드 리끄(Pierre Paul de Riquet, 1604~80년)이다. 12세기에 이탈리아로부터 이주한 그의 선조는 대대로 랑그독 지방(Languedoc)에서 대농장을 경영하는 대지주로서 그의 아버지 길롬 드 리끄(Guillaume de Riquet)도 운하 건설에 관심을 갖고 계획에 착수했으나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치자 포기한 전력을 갖고 있었다.

당대에 루이 14세는 세계를 제패할 꿈을 갖고 있었으므로 군사적인 목표를 위해서 드 리끄의 프랑스 남부를 관통하는 미디 운하뿐만 아니라 북부의 릴(Lille)에서 베르사이유(Versailles), 동부의 스트라스부르그(Strasbourg)에서 루이지안느(Louisiane)까지를 관통하는 운하 건설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루이 14세는 이미 1660년에 프랑스를 관통하는 운하를 건설해도 좋다고 승낙한 상태였다. 이로써 운하를 건설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 중의 하나였던 봉건 귀족들의 반대를 잠재울 수 있었다. 가장 큰 문제점이 사라지자 1661년 드 리끄는 자신의 미디 운하 건설 계획안을 가지고 1661년 루이 14세와 프랑스의 경제장관인 콜베르를 만나서 아이디어를 설명했다.

드 리끄가 어려서부터 갖고 있던 운하 건설의 꿈은 그의 나이 63세였던 1667년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공사는 세 곳으로 나누어져 시행되었는데 드 리끄는 검은 산으로부터 나오는 물을 셍페레올 저수지에 담는 것은 물론 툴루즈에서 중세 시대의 성채로 유명한 까르까손을 통과해 트레베까지 공사를 완성했다. 그는 그동안 번번이 실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되었던 쇠이 드 노루즈 지방의 난공사도 해결했다. 

미디 운하 공사는 준공되는 구간마다 순차적으로 개통되었고, 운하의 관리권은 드 리끄가 확보해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총 2백45km에 달하는 운하는 착공한 지 14년 만인 1681년에 1만4천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완성되었다. 그가 건설한 뚜루즈로부터 지중해에 면하는 세트까지를 정시옹 운하라고 부른다. 이 운하는 툴루즈에서 역으로 보르도까지의 라테랄 운하로 연결되고 이어서 대서양까지 이어지므로, 프랑스는 운하로 대서양과 지중해를 연결할 수 있었다. 대서양과 지중해를 연결하려는 로마 시대로부터의 꿈이 드디어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1681년 5월에 열린 운하의 개통식에 운하 건설의 당사자인 드 리끄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1680년 10월에 사망했다.

매년 수백만 명 관광…여름에는 ‘교통 정체’ 빚는 요트의 천국

▲ (왼쪽)곳곳에 설치된 인공 구조물도 눈길을 끈다. (오른쪽)관광객을 실은 유람선들.< ⓒ이종호

미디 운하 건설에는 3백28개에 달하는 대형 공사가 수반되었는데 이 중에는 1백26개의 다리, 64개의 수문, 1백65m에 달하는 터널, 수도교, 배수관 등이 포함되었다. 리브롱 수로는 드 리끄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 구간은 해수면에서 고작 1~3m밖에 높지 않으므로 도수교 건설조차 하기 힘든 난점이 있었다. 그런데도 때때로 폭우가 닥치면 수로 전체를 강타할 우려조차 있었다. 드 리끄는 수로의 물길을 아치로 만든 구조물 두 개로 나누어 통과토록 했다. 19세기 중반에는 그의 아이디어를 더욱 보완해 레일로 움직이는 개폐문이 아치와 연결되어 관통하는 물을 조절할 수 있도록 했다.

드 리끄는 운하를 건설하면서 단순히 전략적으로 수로를 개통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자연적인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각 장애물에 맞는 공법을 스스로 개발하면서도 친환경적인 요소를 강조했다. 자신의 운하 건설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임을 알고 새로 건설되는 대형 구조물에 예술성을 부여하는 것은 물론 공사 구간과 파괴된 곳의 이질감을 가능한 한 없애기 위해 파라솔 소나무, 플라타나스, 실편백나무 등을 심어 각종 인공 구조물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운하가 개통되어 프랑스의 주 생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 포도와 곡물 운송이 툴루즈로부터 세트까지 단 4일에 주파할 수 있게 되자 운하는 항상 붐볐고, 프랑스의 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운하가 성공리에 운행되자 1777년부터 1789년까지 추가로 로빈 운하가 건설된다. 이 두 개를 합쳐서 미디 운하라고 한다.

대서양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운하는 기차가 출현하는 19세기 중반까지 호황을 누리지만 그 후부터 급격히 물동량이 줄어들어 1970년에는 산업적인 운하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1996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됨에 따라 미디 운하는 관광지로 개발되어 해마다 수백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특히 요트로 운하를 관통하려는 사람들이 전세계적으로 몰려들고 있어 관광 최전성기인 여름에는 극심한 ‘교통 정체’를 빚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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