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장지연·안익태 왜 울다가 웃었을까
  • 안성모 (asm@sisapress.com)
  • 승인 2009.12.08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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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에 올랐지만 진상규명위원회의 명단에 빠진 인물들

▲ 11월8일 숙명여대 앞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옹호하는 보수단체 회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진상규명위원회가 최종적으로 발표한 ‘친일 명단’에는 당초 거론되었던 유력 인사 중 상당수가 빠졌다. 민간 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는 이름이 올랐지만, 위원회의 보고서에는 제외된 이들이 적지 않다. 더 엄격한 잣대로 조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위원회의 설명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과 만주국군 복무 사실을 근거로 박 전 대통령을 <친일인명사전>에 올렸다. 연구소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1940년 4월 신경군관학교 예과 과정에 입학했고, 1942년 10월 성적 우수자로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했다. 1944년 4월 졸업한 박 전 대통령은 그해 12월 일본군 소위와 만주국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으며, 1945년 7월 만주국군 중위로 진급했다.

<친일인명사전> 등재를 놓고 논란이 일자 민족문제연구소는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국군에 혈서로 충성을 맹세하며 지원했다는 당시 만주신문 기사를 공개하기도 했다. 반면, 진상규명위원회는 박 전 대통령을 친일 명단에 올리지 않았다. 당대 기록물 등 1차 사료가 확보되지 않아 유보했다는 것이다. 성대경 위원장은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만주신문 기사도 사전 발간 직전에 알게 되어 다시 거론할 수 없었다”라고 밝혔다.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 매일신보 주필도 제외되었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구실을 한 매일신보에 참여한 장지연은 친일 성향의 글을 다수 발표해 일본의 식민 지배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위원회는, 장지연이 친일적인 글을 많이 쓰기는 했지만 반민족 행위로 결정하기에는 미흡하다고 판단했다. 춘추에 ‘황국신민 양성에 힘을 다한다’라는 글을 기고하고, 매일신보 인터뷰에서 ‘황국 신민화 교육을 위한 의무 교육 실시’를 역설했다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현상윤 고려대 초대 총장도 이번 친일 명단에는 오르지 않았다.

무용가 최승희, 정일권·장면 전 총리도 빠져

문화계에서는 무용가 최승희가 빠졌다. 한국의 고전무용을 현대화한 최승희는 당시 ‘동양의 무희’라는 찬사를 한 몸에 받았지만, 일본군 위문 순회 공연을 갖는 등 친일 행적이 논란이 되어왔다. 일본군을 위한 국방기금 명목 등으로 7만5천원을 헌납하기도 했다. 위원회는 ‘친일 행위는 인정되지만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드물게 조선 문화를 세계에 알린 점 등이 고려되어 기각되었다’라고 밝혔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도 친일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1930년대부터 유럽에서 활동한 안익태는 일명 <만주환상곡>을 작곡하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일본 탄생 2600년 축전곡>을 세계 최초로 지휘하는 등의 행위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정치인으로는 정일권·장면 전 국무총리가 제외되었다. 정 전 총리는 194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관동군 헌병 중위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 전 총리는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직을 맡았던 경력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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