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물을 골인시켜라” ‘장검’ 빼든 검찰
  • 김지영 (young@sisapress.com)
  • 승인 2009.12.08 17:0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검찰의 사정 드라이브가 예사롭지 않다. 김준규 총장은 “외풍은 내가 막겠다. 누구든 원칙에 따라 수사하라”라며 강력한 수사를 주문했다. 대상은 그야말로 전 방위이다. 지난 정권의 거물과 재계, 지방 권력은 물


사정 정국이 열렸다. 검찰이 뽑아든 칼날의 번뜩임이 갈수록 그 빛을 더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불거지는 비리 의혹에 정치권이 숨죽이고 있다. 여권 실세도 예외는 아니다. 재계와 지방 권력도 좌불안석이다. 칼끝이 어디까지 향할지 가늠하기 어려운 탓에 긴박감이 더하다. “검찰이 사정 작업을 통해 존재 이유를 보여주려고 한다” “정치 권력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다”라는 얘기가 나온다.

집권 3년차, 김준규 검찰총장 체제가 출범한 것과 때를 맞추어 펼쳐지는 검찰의 전 방위 사정 흐름은 향후 정국과 관련해서도 주목되는 바가 크다. 지난 정권의 거물 인사들과 현 정권의 핵심 인사들이 사정 리스트에 오르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일선 검사들 사이에서는 잔챙이들보다 정·관계 거물을 집어넣어 검찰의 엄정함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이 많다”라고 최근 분위기를 전했다. 조직을 추슬러야 한다는 내부 분위기와 권력 관리를 위해 날을 세울 필요가 있다는 외부의 환경이 조응하면서 검찰의 사정 드라이브는 갈수록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요즘 검찰 내부에서는 김준규 총장의 트레이드마크인 ‘해맑은 미소’가 사라졌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취임 100일을 맞은 지난 11월27일 간부회의에서도 취임 초기와 확연히 달라진 그의 ‘무거운 표정’이 드러났다.

다음은 이날 회의에 참석했던 한 간부가 기자에게 전한 김총장의 주요 발언 내용이다. “그동안 검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사태 등으로 움츠렸다. 하지만 검찰 내부의 변화와 개혁을 통해서 어느 정도 조직의 안정을 다졌다. 이제는 검찰 본연의 업무인 수사에 매진할 때이다. 특히 여야 정치권이나 재계, 누구를 막론하고 원칙에 따라 수사를 해달라. 외풍(外風)은 내가 막아주겠다.” 이 간부는 “김총장은 앞으로 강도 높은 수사를 벌여나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혔다. 특히 중수부장 등 검찰 간부들에게 특별 수사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라고 말했다.

검찰이 이 시점에서 사정 드라이브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검찰 안팎에 조성된 복잡한 함수 관계가 얽혀 있다. 우선 김준규 총장의 개인적인 자존심 문제가 걸려 있다는 분석이다. 그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위장 전입 문제를 비롯해 미스코리아 대회 심사위원 문제 등과 관련해 진땀을 흘려야 했다. “오렌지족 이미지를 갖고, 엄정하게 법을 집행해야 하는 검찰총장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느냐”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게다가 김총장은 지난 11월3일 검찰 출입기자들에게 회식 자리에서 촌지로 4백만원을 돌려 파문을 일으켰다. 민주당은 검찰의 ‘특수 활동비’를 삭감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실제로 국회 법사위는 검찰의 특수 활동비를 내년도 예산 원안인 2백4억원보다 20억원이나 삭감한 1백84억원으로 확정했다. 김총장의 체면이 또 한 번 구겨진 것이다. 사정 기관의 한 관계자는 “김총장이 검찰 선후배들을 볼 낯이 없을 것이다. 무언가 승부수를 던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김총장을 비교적 잘 아는 한 부장검사는 지난 9월 초 기자에게 “김총장이 겉으로는 약한 것처럼 보이나 함께 지내보면 성깔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귀띔했다.

검찰 자체의 위기감과 이대통령의 독려도 ‘강공 전환’에 한몫

▲ 조직을 추슬러야 하는 내부 분위기와 권력 관리를 위해 날을 세울 필요가 있다는 외부 환경이 조응하면서 검찰의 사정 드라이브는 더욱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시사저널 임준선

무너진 검찰의 자존심을 다시 곧추세워야 하는 과제도 있다. 올해 들어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박대성씨와 정연주 전 KBS 사장이 무죄 판결을 받음으로써 검찰의 무리한 수사가 도마에 올랐다. 특히 ‘박연차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이 자살하자 ‘피의 사실을 과다하게 공표했다’라는 비난을 강하게 받은 검찰은 한때 패닉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여기에 노 전 대통령의 서거에 책임을 지고 검찰을 떠났던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이 지난 9월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변호를 맡고 있던 법무법인 ‘바른’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검찰에 대한 도덕성 논란마저 빚어졌다.

청와대가 검찰의 어깨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여의도 정치권’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이명박 대통령이 “누구든 불법 행위를 저지르면 제대로 수사하라”라고 독려했다는 후문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가 한나라당 공성진 최고위원에 대한 검찰 수사와 관련해 “검찰이 성역 없이 수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특히 권재진 청와대 민정수석이 후배인 김총장의 뒤를 받쳐주면서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잠복해 있던, 검찰을 위협하는 요인들이 속속 다시 대두되고 있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여권의 핵심 실세인 이재오 국민권익위원회(권익위) 위원장이 이끄는 권익위가 검찰과 경찰보다 막강한 사정 권한을 갖게 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권익위가 최근 내놓은 ‘부패방지 및 국민권익위원회 설치와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권익위가 대통령 직속 기관이 되어 사실상 공무원 비리를 수사하는 권한을 보장하고 있다. 특히 검찰은 법원의 영장이 있어야 금융계좌를 추적할 수 있지만 권익위는 영장이 없어도 추적할 수 있도록 법안을 개정하려는 것이다. 여권에서조차 “검찰이 반발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우려할 정도이다.

해묵은 논란 가운데 하나인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도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민주당은 노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강하게 불거졌던 검찰 개혁의 일환으로 경찰을 1차적 수사 주체로 명문화하는 ‘형사소송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김희철 의원 명의로 12월3일 발의했다. 지난 11월 중순께에는 청와대의 한 참모가 경찰의 수사권 독립 필요성을 강조한 보고서를 이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의 분위기도 예전과 달리 검찰에 유리하지만은 않다. 여야를 막론하고 상당수 의원들이 경찰의 수사권 독립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법률 개정안들이 국회를 통과하게 되면 검찰의 권한과 역할은 상당 부분 줄어들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법조 당국의 한 간부는 “검찰의 역할이 줄어들 수 있는 분위기가 곳곳에서 나타나는 상황에서 검찰이 좀 더 강력한 사정 작업을 통해 정면 돌파하는 방법밖에 없다. 검찰이 사정 기관의 맏형으로서 계속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현재 가시화한 검찰 수사 가운데 지방자치단체장 등이 관련된 토착 비리 사건이 많다.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조선업계 7위 규모인 SLS조선에 대한 수사였다. 창원지검 특수부는 지난 9월 중순 경남 통영시에 있는 SLS조선 본사 등을 전격 압수수색했다. 그런데 거액의 비자금 조성 의혹을 받고 있는 이 회사의 이국철 회장에 대한 변호를 임채진 전 총장이 맡으면서 검찰 수뇌부가 상당히 곤혹스러워했다(<시사저널> 제1043호). 일각에서는 “SLS 수사를 제대로 못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부정적인 견해가 대두되기도 했다. 하지만 검찰의 칼날은 날카로웠다. 창원지검이 최근 통영시장 등을 소환 조사하면서 경남 지역 정·관계뿐만 아니라 기업체 등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장들도 현재 10여 명이 검찰의 수사선상에 올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통운, 두산인프라코어, SK건설, 태광그룹 등 대기업 비리에 대한 수사도 현재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사정 기관의 한 관계자는 “정치권 거물들에 이어 큰 기업이 사정 태풍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단순한 분위기로 보면 현재 경제 상황에서 재계에 사정 칼날을 대는 일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검찰 안팎의 움직임을 볼 때 그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는 없어 보인다.

정치권과 검찰 안팎에서는 사정 정국의 문을 열 ‘김준규의 첫 작품’인 ‘스테이트월셔 골프장 로비 의혹 사건’에 주목하고 있다(<시사저널> 제1046호). 스테이트월셔의 공경식 회장은 공의원 등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불법 정치 자금을 전달한 의혹을 받고 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공의원이 공회장으로부터 1억원 이상의 불법 정치 자금을 받았다면 영장을 칠 것이고, 그 이하면 불구속 기소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의원의 운명이 ‘1억원’을 기준으로 갈릴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검찰 내에서는 이 사건을 잘못 처리하면 “역시 검찰은 권력에 약하다”라는 인식을 다시 심어줘 ‘사정 드라이브’의 힘이 많이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일선 수사 검사들은 “거물을 골인시켜야 한다”라며 상당한 의지를 갖고 수사에 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폭탄으로 꼽히는 대한통운 비자금 사건의 경우에는, 지난 정권의 핵심 인사들 이름이 여럿 거론된다. 조선일보가 “수만 달러를 받았다”라며 실명을 보도한 한명숙 전 총리는 “사실과 다르다”라며 강력하게 부인했다. 민주당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권에 대한 수사에 끼워 맞춘 물타기 수사라고 반발하고 있으나 오래전부터 정·재계 물밑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나돌았다는 점에서 최종 결론은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일각에서는 검찰의 의지를 가르는 잣대로 ‘그림·골프 로비 의혹’과 관련 있는 한상률 전 국세청장에 대한 수사를 거론하는 흐름도 있다. 검찰이 진정으로 날을 세우려면 미국에 머무르고 있는 한 전 청장을 소환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검찰 또한 이런 여론을 의식하면서 한 전 청장과 관련한 다양한 수사 가능성을 짚어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