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과 눈물’이 <일밤>을 구원할까
  • 정덕현 | 문화평론가 ()
  • 승인 2009.12.15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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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PD 투입된 <일요일 일요일 밤에>, ‘공익과 공감’ 추구한 버라이어티로 승부수 띄워

▲ 지난 11월25일 김영희 PD(앞줄 왼쪽 세 번째)와 출연진이 개편 기자간담회에서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MBC 제공


<일요일 일요일 밤에>(이하 일밤)가 일요일 저녁 황금 시간대에 시청률 3%까지 추락한 것은 아무리 같은 시간대 경쟁 프로그램들이 막강하다고 하더라도 안이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일밤>은 전신인 <일요일 밤의 대행진>에서부터 현재까지 무려 2백여 개가 넘는 코너를 선보이며 일요일 예능에서 명실상부한 최강자였기 때문이다. 늘 화제의 중심에 서 있던 <일밤>은 그러나 재작년부터 예능에 불어온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경향을 재빠르게 간파해내지 못했다.

<일밤>이 추락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토요일에 포진한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효시인 <무한도전>이 있었기 때문에 그 컨셉트의 중복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고, 새로 시도된 일련의 형식들이 지나치게 식상하거나 낯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게다가 잦은 프로그램 교체나 어느 정도 성공한 형식의 다른 시간대 독립 편성(<우리 결혼했어요>나 <세바퀴>처럼)이 <일밤>을 지치게 만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끊임없이 산고만 치르다 보니 제 자식 하나 건지기 어려웠고, 그렇게 나은 자식조차 금세 입양을 시켜버린 꼴이 된 것이다.

여기에 경쟁 프로그램이 모두 여행을 소재로 채택하고 있어서 이 일요일 저녁 시간대를 여행 버라이어티의 시간으로 만들어버린 영향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일밤>에는 강호동이나 유재석처럼 자신을 대표할 만한 대표 MC가 없다. 결국 프로그램 형식도 선점하지 못했고, 내놓는 것마다 식상한 데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일요일 주말 저녁 시간대를 여행 버라이어티의 시간으로 만들어낸 강력한 경쟁 프로그램들 앞에서 이렇다 할 강점이 없는 <일밤>은 말 그대로 사면초가에 빠졌던 셈이다.

이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대안으로 등장한 인물이 ‘쌀집 아저씨’ 김영희 PD이다. 그리고 이 쌀집 아저씨의 등장만으로도 우리는 <일밤>에 새로운 기대를 갖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바로 공익적인 버라이어티쇼에 대한 기대이다. 양심냉장고나 <느낌표>를 통해 우리에게 각인된 그의 버라이어티쇼는 웃음에도 따뜻함이 깃들 수 있고, 웃음이 그저 웃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김영희 PD에 대한 기대감을 높인 것은 그간 예능 프로그램이 지나치게 경쟁적으로 흘러오면서 만들어낸 ‘강하고 독한 인상’에 대한 반작용이다. 야생의 버라이어티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시청자들을 위해 얼마나 독하게 망가지는가를 보여주었고, 그 속에 담겨진 진정성까지 전해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버라이어티쇼들이 모두 독한 게임의 세계 속으로 달려갈 때, 다른 한 구석에서는 이 독한 게임의 레이스를 벗어나 뒤를 돌아보고픈 욕구 또한 생겨나기 마련이다.

이것은 디지털 속도의 시대에 우리가 아날로그를 꿈꾸는 이유이고, 한 치 앞을 모른 채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복고와 향수를 갈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즉, 김영희 PD라는 존재는 그동안 흔들리고 있던 <일밤>의 정체성을 일시에 만들어냈다. 그것은 짧고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디지털적인 버라이어티쇼가 아닌 느려도 여운이 길게 남는 아날로그적 버라이어티쇼이며, 자극적인 웃음에만 천착하기보다는 차라리 미소에 가까운 감동 있는 웃음을 꿈꾸는 버라이어티쇼이다. 한마디로 김영희표 버라이어티쇼는 복고적이다. 하지만 이 복고는 그저 과거로 돌아간 것의 반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쁜 일상에서 자칫 잊고 살아갈 수 있는 소중한 것들에 대한 돌아봄에 가깝다.

<단비>는 그 소중한 것을 찾아 물 부족으로 인해 하루 4천5백명이 사망하는 아프리카 잠비아까지 무려 25시간을 날아간다. “언제가 가장 불행하다고 느껴졌는가”라는 질문에 “늘 불행하다고 느낀다”라는 그들에게 희망이 되어줄 수 있는 우물을 파는 것이 그들의 미션이자 이 코너의 메시지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단 하나의 비밀’이라는 부제처럼 이 코너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행복’이라는 키워드이다. 과거 <느낌표>라는 리얼 공익 버라이어티를 통해 보여주었던 ‘행복한 사회’를 위한 노력은 이 코너에서는 글로벌한 지구촌으로 넓혀진다. 한지민이 그 불행한 현실 앞에서 흘리는 따뜻한 눈물 한 방울은 이 버라이어티쇼가 현지에서 겪는 좌충우돌의 웃음 코드와 거의 같은 가치의 힘을 가진다.

<우리 아버지>는 복고와 향수 코드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이 시대의 아버지들을 카메라의 중심에 세운다. 퇴근길에 만나는 아버지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평소 내색하지 못했던 그네들의 따뜻하고 아픈 속내를 접하는 장면은 때론 웃음이, 때론 눈물이 넘쳐난다. 옛 공중전화를 통해 가족과 전화통화를 하는 설정은 이제는 향수가 되어버린 아버지들의 존재감을 아련하게 떠오르게 한다. 이 전통적인 인터뷰 형식의 버라이어티쇼는 소통과 공감이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그 다양한 아버지들이 전하는 진솔한 이야기가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느끼는 그 순간, 우리는 이 코너가 가진 마법적인 공감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감동적인 스토리라도 웃음의 포인트와 균형 맞춰야

▲ 아프리카 잠비아에 간 MC 한지민씨가 현지의 한 아이를 안고 있다. ⓒMBC

하지만 <대한민국 생태구조단 헌터스>는 예전 김영희 PD가 보여주었던 일련의 생태 버라이어티쇼들을 연상시키면서도, 그것과 결을 달리한다는 점에서 <일밤>의 미운 오리 새끼가 될 가능성이 크다. 과거의 생태 버라이어티쇼는 사라져가는 종을 살리는 측면에서 생태라는 용어가 가능했지만,
<헌터스>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 늘어난 멧돼지의 개체 수를 조절한다는 측면에서 생태라는 용어가 무색하게 느껴진다. 물론 멧돼지들의 피해를 입은 농민들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되는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멧돼지 포획을 지지하는 듯한 코너의 뉘앙스는 쉽게 공감하기가 어렵다. 사안의 민감함도 문제이지만 투입된 물량이나 노력에 비해 이야기가 재미없다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노력 대비 효과도 적고, 좋은 평판 또한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이 코너가 가진 한계를 드러낸다. 이 코너로 인해 자칫 다른 코너들이 가진 일련의 색채마저 바랠 수 있다는 점은 앞으로 이 코너의 길지 않은 존속을 예상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행착오에도 <일밤>의 변화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일단 공익과 공감이라는 확실한 프로그램 형식을 선점했고, 그것이 현재의 자극적인 예능 프로그램들 속에서 참신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이 변화는 요즘 버라이어티쇼들이 추구하는 ‘이야기성’을 충분히 갖추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인다. <단비>에는 글로벌 환경에서 벌어지는 체험형 봉사의 따뜻한 이야기가 들어 있고, <우리 아버지>에는 이 시대 아버지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공감의 스토리가 내재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일련의 감동을 주는 스토리들이 그저 감동과 눈물에만 머무르지 않고 예능이 갖추어야 하는 웃음의 포인트와 균형을 맞추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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