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체’는 고공 비행하고 호화 군단은 바닥 치고…
  • 허재원 | 한국일보 기자 ()
  • 승인 2010.01.0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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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농구 ‘맞수’ 통신회사 KT-SK 엇갈린 성적의 이면

▲ 지난 12월27일 열린 프로농구 경기에서 서울 SK의 문경은 선수(왼쪽)가 리바운드 볼을 다투다 웅크리고 있다. ⓒ연합뉴스

2009~10시즌 프로농구를 뜨겁게 달구는 키포인트 중 하나는 서울 SK와 부산 KT 간의 ‘통신 대전’이었다. KTF가 KT로 통합되면서 ‘KT 소닉붐’이라는 새 이름으로 거듭난 KT는 이제 SK와 진정한 라이벌전을 펼치게 되었다며 칼을 갈았다. 그룹 규모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던 KTF와의 라이벌 관계를 애써 부정했던 SK 역시 이제 KT전만큼은 사활을 걸고 임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덧 정규 리그의 전환점을 돈 상황에서 두 팀의 명암은 극도로 엇갈리고 있다. KT는 시즌 초반부터 줄곧 선두 경쟁을 벌이고 있는 반면, SK는 지난 18경기에서 1승17패를 하며 바닥을 치고 있다.

KT는 시즌 개막 전에 안양 KT&G, 대구 오리온스와 함께 ‘3약’으로 분류되었다. 이렇다 할 스타 플레이어도 없었고, 뚜렷한 전력 보강도 없었다. 김도수와 조성민 등 포워드진이 상무에서 제대했지만, 성적에 영향을 줄 만한 파괴력은 갖추지 못했었다. 설상가상으로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3순위로 선발한 그렉 스팀스마까지 팀에 적응하지 못해 시즌 개막도 하기 전에 퇴출당했다. 노쇠한 포인트가드 신기성, 예전 같지 않은 파워포워드 송영진, 기대에 못 미치는 외국인 선수까지, KT의 올 시즌 전망은 암담했다.

그러나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KT는 전창진 감독의 지휘에 따라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움직였다. 상대적으로 풍부한 국내 포워드진이 적절하게 출전 시간을 배분하면서 쉬지 않고 뛰었다. 공격에서는 볼을 갖지 않은 선수들도 쉴 새 없이 움직였고, 수비에서는 상대 공격수들의 목을 옭아맬 정도의 질식 수비를 펼쳤다.

시즌 첫 경기였던 10월17일. 올 시즌 적수 없는 최강으로 꼽혔던 전주 KCC를 91 대 83으로 완파할 때부터 KT의 돌풍은 시작되었다. 시즌 초반만 해도 단순한 이변으로 여겨졌던 KT의 돌풍이 감독과 선수들 간의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키며 일약 쓰나미급 태풍으로 확대되었다.

KT 상승세의 정점은 12월11일, ‘괴물 센터’ 나이젤 딕슨을 KT&G에서 영입한 것이다. 빈약한 센터진이 유일한 약점으로 꼽히던 KT는 2백3cm, 1백54kg의 거구인 딕슨의 가세로 일약 유력한 우승 후보로 떠올랐다. 농구계 한 관계자는 “KT의 상승세는 단기전으로 펼쳐지는 플레이오프에서는 분명 한계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딕슨이 제 컨디션을 유지하는 상황이라면 얘기는 달라질 것이다”라며 경계감을 숨기지 않는다.

SK의 부진, 감독의 잦은 교체로 이어져

SK는 지난 몇 년 동안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유럽 농구 최고 레벨의 외국인 선수들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영입하기도 했고, 미국 프로농구(NBA) 꿈을 버리지 못하던 방성윤에게 아낌없이 투자해 SK 유니폼을 입히기도 했다. 그러나 SK는 2007~08시즌 턱걸이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것이 전부였고, 나머지 시즌은 모두 플레이오프의 이방인 신세가 되었다.

SK의 올 시즌 준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지난 시즌 막판 KT&G의 특급 포인트가드였던 주희정을 영입한 데 이어 NBA 빅스타 출신 사마키 워커까지 선발하며 그야말로 초호화 라인업을 완성했다. 주희정-방성윤-김민수-사마키 워커로 이어지는 ‘호화 군단’은 ‘특2강’으로 꼽혔던 KCC, 삼성과 비교해도 전혀 밀릴 요소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방성윤·김민수·주희정이 차례로 부상으로 쓰러졌다. 심판의 결정적인 오심은 허무한 패배를 불렀다. 거듭되는 버저비터의 피해자는 어김없이 SK였다. SK는 시즌 초반 4연승한 이후 끊임없이 추락했다. 8연패 이상을 두 번이나 반복하며 하염없이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결국 SK는 다시 감독을 퇴진시켰다. 이상윤-김태환-김진으로 이어지는 SK의 감독 라인은 이번에도 역시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단명하는 아픔을 겪었다. ‘신산’(神算)이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는 신선우 감독을 새로 영입했지만, 그 역시 뚜렷한 해결책은 없어 보인다.

이미 선수들은 승리에 대한 의지를 잊은 듯하다. 협력 수비는 보이지 않고, 수비 전환은 느리기만 하다. 리바운드 참여도 저조하고 경기에 몰입하는 집중력도 수준 이하이다. 우승 후보로까지 꼽혔던 ‘호화 군단’ SK의 처참한 몰락은 “농구는 결코 개인 경기가 아니다”라는 단순한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다.


▲ 지난 11월6일 부산 KT 전창진 감독이 원주 동부를 이긴 뒤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KT와 SK의 특별한 관계와 함께 두 팀을 이끄는 사령탑의 남다른 인연 역시 관심의 초점이다. 올 시즌 KT로 자리를 옮겨 첫해부터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전창진 KT 감독과 성적 부진으로 물러난 김진 전 감독의 뒤를 이어 SK 재건의 조타수가 된 신선우 감독은 프로농구를 대표하는 지장으로 꼽힌다. 두 명감독은 통신사 라이벌이라는 관계까지 맞물려 매 경기 불꽃 튀는 대결을 펼치고 있다.

두 감독은 2003~04시즌과 2004~05시즌 챔피언 결정전에서 연거푸 만나 격전을 치른 인연을 갖고 있다. 당시 신감독은 KCC, 전감독은 TG삼보의 사령탑을 맡고 있었다. 용산고 선후배인 두 사람의 두 시즌 연속 격돌은 최고 라이벌전이었다. 2002~03시즌 초보 감독으로 신인 김주성을 앞세워 첫 우승의 영광을 안았던 전감독은 2003~04시즌 정규 리그에서 우승하고도 챔피언 결정전에서 신감독이 이끈 KCC에 3승4패로 무릎을 꿇었다. 당시 전감독은 신감독이 정규 리그 막판 단행한 외국인 선수 RF 바셋의 트레이드가 편법이라며 비난의 칼날을 날카롭게 세우기도 했다. 결국, 전감독은 이듬해인 2004~05시즌 챔피언 결정전에서 재격돌해 4승2패로 설욕에 성공했다. 2004~05시즌 뒤 두 감독이 나란히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것도 묘하다. 평생 KCC맨으로 남을 것으로 보였던 신감독은 선수 시절부터 코치·감독까지 지낸 정든 KCC(현대)를 떠나 LG로 이적했다. 전감독 역시 TG삼보의 모기업이 매각되면서 동부로 새 옷을 바꿔 입어야 했다. 우승 청부사로 LG에 갔던 신감독은 3년 임기 동안 정상 정복에 실패한 뒤 야인으로 물러났다. 반면, 전감독은 2007~08시즌 동부에서 한 차례 더 우승의 영광을 누린 뒤 이번 시즌을 앞두고 10년 동안 정든 원주를 떠나 부산 KT로 옮겼다.

두 감독은 나란히 최다인 3회 우승의 기록을 지니고 있다. 올 시즌 전혀 다른 환경에서 선수들을 지도하는 두 감독은 다시 격돌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의 처지는 너무나도 극명하게 엇갈려 있다. 전감독은 지난 시즌 최하위였던 KT를 리그 선두로 이끌면서 다시 우승에 도전하고 있고, 신감독은 최하위 SK의 새 수장으로 왔다. 둘의 진정한 맞대결은 SK가 조직을 재정비한 뒤인 다음 시즌에야 제대로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두 대형 통신사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 ‘통신 대전’을 지휘하는 두 명장의 맞대결에 벌써부터 관심이 고조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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