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주치의 줄 이어 내고 의약 기술 선진화에 앞장
  • 이춘삼 | 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0.01.12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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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시사저널 이종현

의과 대학 김영삼 전 대통령 재임 시절에 김 전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가 대통령 주치의인 고창순 박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박사님은 대통령 덕분에 건강을 되찾으셨다.”  당시 김대통령은 매일 새벽 5시 반부터 7시까지 조깅을 포함해 여러 가지 운동을 했는데, 이 과정에 주치의가 동행해야 했다. 고박사는 몇 차례 수술을 받은 끝에 건강이 쇠약해져 있던 터라 함께 뛰는 것이 힘에 부치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건강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몇 가지 암을 극복해낸 의지력을 높게 평가받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 재임 시절에 김 전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가 대통령 주치의인 고창순 박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박사님은 대통령 덕분에 건강을 되찾으셨다.”  당시 김대통령은 매일 새벽 5시 반부터 7시까지 조깅을 포함해 여러 가지 운동을 했는데, 이 과정에 주치의가 동행해야 했다. 고박사는 몇 차례 수술을 받은 끝에 건강이 쇠약해져 있던 터라 함께 뛰는 것이 힘에 부치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건강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몇 가지 암을 극복해낸 의지력을 높게 평가받았다.

김 전 대통령의 경남고 3년 후배이며 중·고교 시절 함께 축구반을 했던 인연이 있는 고박사는 김 전 대통령 재임 기간 내내 주치의로 근무했다. 아예 숙소를 청와대 근처로 옮기고 매일 대통령의 건강을 살폈다. 그는 이런 기회에 대통령에게 의료계가 당면하고 있던 문제들과 국내 과학기술 분야 발전 방안 등에 대해 진언을 했고, 민심의 흐름에 대해서도 전달자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변에는 그의 활달한 성격을 두고 “사회과학을 할 것이지 왜 의사가 되었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고창순 박사 말고도 많은 서울대 의대 교수들이 주치의로서 대통령을 보필했다. 대통령 주치의로 위촉을 받았다는 것은 곧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 된다. 딱 한 번 예외가 있었는데 김대중 대통령 때였다. 대통령 주치의는 매주 한 번씩 청와대에 들러 대통령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해외 순방에 동행한다. 주치의뿐 아니라 각 전공 분야의 유명 의사들로 구성된 자문단 30여 명이 대통령의 건강을 챙긴다. 대통령이 지방에 출장을 가거나 휴가 중일 때는 경호처 소속 의무실장이 대통령의 건강을 살핀다. 주치의 중 한용철 교수와 최규완 교수가 서울대 생활을 마친 후 삼성의료원의 1대·2대 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세간에는 의사라는 직업이 아들에게 시키기는 마땅치 않고 사위 직업으로는 괜찮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의사 일이 그만큼 고되다는 뜻일 것이다. 재벌가에서는 서울대 법대를 나온 판·검사와 더불어 서울대 의대 나온 의사를 좋은 사윗감으로 환영하는 풍조도 있다고 한다.

서울대 의대 출신들의 주변 인맥을 들여다보면 이런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신영수 세계보건기구(WHO) 서태평양지역 사무처장(전 서울대 의대 교수)은 신덕균 전 동방유량 회장(작고)의 차남이고, 장인이 천병규 전 재무부장관(작고)이다. 형인 신명수씨(경기고-서울대 상대 졸업)는 신동방(1995년 동방유량이 신동방으로 개칭되었음) 대표이사 회장이고, 동생 성수씨는 고려산업 대표이사 회장이다.

신명수 회장의 장녀 정화씨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재헌씨의 부인이고 재헌씨의 누나인 소영씨가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부인이므로 이들의 혼맥은 실타래처럼 얽혀 있다고 할 만하다. 경복고-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재헌씨는 미국 조지타운 대학 로스쿨을 마치고 뉴욕 주 변호사 자격을 획득해 현재 법무법인 ‘바른’의 국제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서울대 공대에 재학하던 중 미국 유학을 떠난 소영씨는 현재 SK그룹 소유인 아트센터 나비(전 워커힐 미술관)의 관장을 맡고 있다.

의과대, 서울대 단과대학 중 유일하게 단독 동창회관 보유

한만청 전 서울대병원장의 형인 한만년 도서출판 일조각 사장(작고)에게는 4남1녀가 있는데, 장남 성구씨와 삼남 준구씨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것을 포함해 5명 모두가 대학 교수이다.

이길여 경원대 총장은 길병원, 가천의과학대, 경원대, 경인일보를 경영하는 CEO이다. 그녀는 서울대 의대 동창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동창회관인 7층짜리 빌딩 함춘회관 건립을 기획했고 착공·준공까지 마쳤다. 건립 기금 모금에는 최다액인 3억원을 기탁했다. 이 건물은 서울 종로구 연건동의 서울대병원 구내에 있다. 서울대 단과대학 가운데 동창회관을 가진 대학으로는 의과대학이 유일하다.

이명박 대통령의 주치의인 서울대병원 순환기내과 최윤식 교수는 이대통령이 서울시장이 된 2002년부터 건강을 돌봐왔다. 최교수는 이대통령의 사돈이기도 하다. 최교수의 장남 의근씨(서울대병원 내과 전임의)가 이대통령의 둘째딸과 2002년 결혼했다. 노관택 전 서울대병원장의 외아들 노동영씨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서울대 의대 외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그는 유방암 치료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다. 서울대 의대와 서울대병원의 고위직에 경기고 출신들이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는 것도 한 특징이다. 법조계에 경기고 세(勢)가 강한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김정룡 한국간연구재단 이사장은 서울대병원 내과에 재직할 때 간질환 치료의 권위자로서 ‘간정룡’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김진복 전 서울대병원 외과학 교수(작고)는 위암 수술의 세계 최고 권위자로 1만5천여 건의 위암 수술을 집도해 세계  기록을 세웠다. 이명철 핵의학과 교수는 서울대 생명공학공동연구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2002~06년에는 세계핵의학회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세계핵의학회 총회를 서울로 유치해 개최했다. 2008년에는 제6차 세계동위원소대회 조직위원장으로서 대회를 성공리에 마쳤고, 2009년 세계동위원소기구 차기 회장으로 선출되어 2011년 회장에 정식 취임하게 된다. 국제과학복합연구단지(청라지구 BIT Port) 추진단장도 맡고 있다. 고 강원룡 전 경동교회 명예목사가 처 백부이며, 탁월한 인맥 관리로 폭넓은 대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일제 강점기 경성의전 외과 주임교수를 지냈고 도쿄 대학 의학박사였던 백인제 백병원 설립자는, 독일 유학에서 익힌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국내 도규계(刀圭界)의 1인자로 손꼽혔다. 백박사는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고, 병원은 그의 조카인 백낙환 현 인제대 백병원 이사장이 물려받았다. 성상철 서울대병원장은 분당서울대병원장을 거쳐 2004년 5월 현직에 부임했으며, 2007년 5월 연임되어 오는 5월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다. ‘TK 사단의 대부’로 불리는 신현확 전 총리의 사위이기도 하다.

서울대 의대 출신 가운데 권이혁 전 장관만큼 다채로운 경력을 지닌 사람도 드물 것이다. 서울대병원 초창기에 병원장을 맡아 병원 운영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서울대 의대 학장 시절에는 의학 교육의 체계를 개편했다. 이후 서울대 총장, 문교·보사·환경부 장관을 두루 역임했으며, 학술원 회장직을 맡아 국민 보건 향상은 물론 의학 및 교육 분야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문태준 전 보사부장관도 경력이 다양하다. 10년 정도의 의사 생활을 마치고 정계에 입문해 7~10대 국회의원을 지냈는데 8대 국회에서는 운영위원장, 9대 국회에서는 상공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24~26대 대한의학협회 회장을 지냈다.

박용현 두산그룹 회장은 11·12대 서울대병원장을 지내기까지 의술 외길을 달려온 인물이다. 두산그룹 창업주인 고 박두병 회장의 6남1녀 중 4남이면서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기업 경영이 아닌 의사의 길을 택했다. 그러다 2009년 3월 그룹 총수의 자리에 오르면서 본격적인 경영인으로 변신했다. 연간 예산 8천억원 규모의 서울대병원을 6년간 잘 이끌어온 점에서 경영 능력을 입증받았다고 볼 수 있다.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도 의과대 출신으로 제약회사 CEO가 된 특수한 경우이다. 처음에 의약품 및 위생재료 도매업으로 사업을 시작한 강중희 창업주의 아들인 강회장은 독일에서 의학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후 동아제약을 맡아 굴지의 제약회사로 키워냈다. 강회장이 직접 작명한 ‘박카스’가 2007년까지 1백59억4천여 병이 팔려나가는 등 효자 노릇을 하면서 동아제약은 1967년 이후 국내 제약업계 매출액 1위 자리를 굳게 지켜왔다. 강회장은 전경련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국내 의료진의 임상 수준은 이미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 있다. 해외 환자를 유치하는 의료관광 산업의 활성화가 이를 방증한다. 이에 발맞추어 서울대 의대의 의학 분야 연구 실적 또한 양적·질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고 있다. 서울대 의대와 서울대병원이 SCI(Science Citation Index : 과학 기술 논문 인용 색인) 등재 학술지에 발표한 연구 논문 숫자는 최근 10여 년간 약 7배 증가했다. 1996년 2백10편에서 2005년 1천65편, 2008년 1천4백19편으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지난해에는 일본 도쿄 대학 의대의 실적을 앞질렀다(서울대 의대 1천7백99건, 도쿄 대학 의대 1천6백62건). SCI 등재 학술지는 SCI를 관장하는 미국의 정보과학연구소(ISI)가 전세계 잡지를 대상으로 심사해 결정하며, 여기 수록된 논문은 연구 성과와 신뢰성을 인정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지난해 영국의 더 타임스 등이 실시한 세계 대학 평가에서 서울대가 47위에 머무른 반면에 의학·생명과학 분야는 24위를 차지한 사실이 서울대 의대의 위상을 잘 말해준다.

치과 대학 영화배우 신영균씨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서울대 치대를 졸업하고 해군에서 치과 군의관으로 복무한 그는, 동남치과를 개업해 치과의사로 일하다가 1960년 영화계에 진출했다. 학창 시절 연극반에서 발휘했던 끼를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던 것이다. 데뷔작 <과부> 이래 1978년 <화조>까지 19년 동안 총 2백94편의 작품에 출연해 엄청난 열정을 과시했으며, <연산군> <마부>
<빨간 마후라> 등 수작을 남겼다. 그 공으로 대종상, 청룡영화상, 춘사대상 등 여러 상을 수차례씩 휩쓸기도 했다. 배우협회 회장, 영화인협회 이사장, 예총회장과 15·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현재 명보극장 회장이며, 그가 사재를 들여 제주도에 세운 신영영화박물관을 운영하는 신영문화예술재단의 이사장이기도 하다.

치과의사 출신 변호사 1호 전현희씨는 현직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민주당 비례대표 7번이며 보건복지가족위원회 소속이다. 서울대 치대를 졸업하고 임상 치과의사로 근무하다 3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고려대 특수법무대학원 의료법학과를 수료했다. 치과의사협회, 피부과개원의협의회, 안과·가정의학과의 개원의협의회 등에서 고문 변호사로도 활동했다.

윤흥렬 전 세계치과의사연맹(FDI) 회장(작고)은 1990~93년 대한치과의사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2003~05년 2년간 한국인 최초로 FDI 회장을 지냈다. FDI는 전세계 1백49개국 75만명의 치과의사들을 회원으로 둔 단체로써 FDI 회장직은 그만큼 명예로운 자리이다. 명노철 사단법인 웰인터내셔널 이사장은 한국국제협력단(KOIKA)이 수여하는 제3회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수상자 일반 부문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약학 대학 대한약사회장을 연임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원희목 의원(한나라당·비례대표)은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경험이 있다. 나이 50줄에 들어섰던 2005년 부쩍 피곤을 느끼고 살이 빠진다 싶어 건강 검진을 받았더니 ‘2~3개월 시한부’의 간암 말기라는 것이었다. 아내는 이 소리를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러나 국립암센터 박재갑 전 원장이 재검사를 권했고, 그의 운명이 바뀌었다. 재검사 결과 병명은 말기 암이 아니라 ‘헤파틱 헤만지오에필텔로이드’였다. 의사들에게조차 생소한 이 병은 가만히 있으면 별 탈 없는 양성 혹일 수도 있고, 자라면 악성 종양이 되기도 하는 경계성 암이다. 그의 경우 간에 고루 퍼진 자잘한 혹들이 자라고 있어 악성 암이기는 하지만 간 이식만 하면 살 수 있다고 했다. 결국, 처남의 간을 이식받은 끝에 건강을 회복하고 제2의 생을 얻었다.

박순덕 변호사는 서울대 약대에서 약학을 공부한 약사이면서 서울대 법대에 학사 편입해 이수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이혼·가사 전문 변호사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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