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이지 않는 재벌가 ‘딸들의 반란’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0.01.12 18:1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상속 제외되자 소송 벌이며 권리 찾는 사례 잇따라…혼외 자녀 경우 유전자 검사 거쳐 재산 분할 요구하기도

▲ 재벌가의 집안에서는 혼외 자녀가 상속 권리를 주장하며 형제들을 상대로 법정 소송을 제기한 경우가 많다. 사진은 모의 재판 모습. ⓒ연합뉴스


딸들의 반란일까. 형제간의 ‘진흙탕 싸움’일까. 금강제화 창업주의 딸들이 회장인 오빠를 상대로 재산 분할 소송을 내자 양비론이 교차하고 있다. ‘남매의 난’에 비유하며 형제간의 재산 싸움을 전면 비판하는 측이 있고, 재산 상속 등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딸들이 자신의 권리 찾기에 나선 이른바 ‘딸들의 반란’으로 보는 측도 있다.

지금까지 재력가의 집안에서 ‘유산’을 둘러싼 분쟁은 종종 있었다. 이 중에는 원만하게 재산을 분배한 경우도 있지만 형사 소송까지 치달으며 서로 ‘원수’가 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돌아가신 부모가 알면 땅을 칠 일이지만, 돈 앞에서 우애는 없었다. ‘피보다 진한 것이 돈’이었다. 지금까지 재벌가의 딸들이 벌인 재산 소송은 어떤 것이 있을까.

지난 2001년 3월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타계하자 혼외 딸들이 나타나 법원에 친자 확인 소송을 낸 적이 있었다. 당시 자매가 법원에 낸 소장을 보면 1974년에 배우이던 어머니와 정명예회장이 만났고, 어머니가 임신하자 남들의 눈을 피해 미국으로 출국시켰다고 한다. 그 후 1979년과 1981년에 두 딸들을 낳았으나 호적에는 올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명예회장이 작고한 뒤인 2001년 4월 자매는 정명예회장의 미망인과 다른 자녀들을 상대로 법원에 ‘상속 재산 협의 분할 계약 변경’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유전자(DNA) 검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 정명예회장의 친딸로 확인되어 정명예회장의 호적에 오를 수 있었다. 유산 배분도 받았다. 자매는 각각 50억원씩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두 자매는 2006년 1월 다시 유산 분배 소송을 내고 추가로 100억원을 요구했다. 결국, 법원의 조정을 거쳐 각각 20억원씩 더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해체된 옛 동아그룹도 이복 형제자매들끼리 재산 분쟁을 겪었다. 동아그룹 창업주인 고 최준문 회장은 생전에 네 명의 부인과의 사이에 일곱 명의 자녀를 둔 것으 로 알려져 있다. 둘째 부인 소생인 혜숙씨는 지난 1995년 이복 오빠인 최원석 당시 동아그룹 회장을 상대로 재산 분할 소송을 제기했다. 생부인 고 최준문 회장이 자신의 몫으로 남겨놓은 빌딩과 땅, 주식, 현금 등을 돌려달라며 3백억원의 재산 반환을 요구한 것이다.

당시 혜숙씨가 법원에 낸 소장이 화제가 되었다. 그녀는 고 최준문 회장과 혜숙씨의 어머니가 1950년대 초반 충남 대천 간척지 공사를 하던 때 처음 만났다고 주장했다. 최 전 회장이 혜숙씨 어머니 집에서 기거했고, 여기서 혜숙씨를 낳았다는 것이다. 당시 최 전 회장은 유부남이었다. 혜숙씨는 여덟 살 때 처음으로 생부인 최 전 회장을 만났고, 그 후 이복형제들과 가끔 왕래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혜숙씨가 패소하면서 재산 분할 소송과 가족 관계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남자 형제와 동등한 권리 요구하는 경우도

파라다이스그룹 일가도 이복형제들끼리 법정 싸움을 벌였다. 카지노의 대부로 불리던 고 전락원 파라다이스그룹 창업주는 생전 전처 사이에 전필립 파라다이스그룹 회장 등 1남1녀를 두었다. 전회장은 재혼 후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 지혜씨를 낳았다. 지혜씨는 전락원 회장이 타계하자 ‘수조 원대의 아버지 재산을 오빠가 독식했다’라며 오빠인 전필립 회장 남매를 상대로 상속 재산 분할 청구 소송을 냈다가 패소했다. 당시 파라다이스그룹은 “전락원 회장의 재산은 법무법인의 공증 아래 작성된 유언장을 통해 적법한 절차를 거쳐 상속되었고, 상속세도 납부했다”라고 밝혔다.

코오롱그룹도 배다른 형제들과 유산 싸움을 벌였다. 지난 2004년 11월 미국에 거주하던 고 이원만 회장의 혼외 아들인 동구씨가 “속임수에 의해 상속에서 제외되었다”라며 배다른 형제들을 대상으로 캘리포니아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동구씨는 당시 5백만 달러(약 50억원)를 요구했다. 3년 후인 2008년 4월에는 스웨덴에서 어머니 지은주씨와 함께 거주하는 이정현씨가 이 전 회장의 혼외 딸이라고 주장했다. 지씨 모녀는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이 전 회장과 관련된 사진을 게시하고 과거사를 모두 공개했다.

정현씨의 경우 재산 분할 소송을 제기하지는 않았지만, 소송 직전까지 가는 등 갈등을 겪었다. 그 내막을 들여다보자.

어머니 지씨에 따르면 지씨는 22세이던 1969년 당시 65세의 이 전 회장을 만나 이후 6년 동안 혼외 관계를 맺었다. 1974년 헤어진 후에 지씨는 화가와 결혼해 스웨덴으로 이주했다. 1994년 이회장이 지병으로 사망하자 코오롱측에서 정현씨에게 연락이 왔고, 한국에 입국한 정현씨는 코오롱 관계자의 손에 이끌려 무심코 서류에 도장을 찍었는데 그것이 재산 상속 포기 각서였다. 이때 정현씨는 상속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1억원을 받았고, 이후 코오롱측과의 연락도 끊겼다. 그 후 15년이 흐른 뒤에 지씨 모녀가 블로그를 만들어 이 전 회장과 함께 찍은 사진 등을 공개하며 혼외 관계를 폭로한 것이다. 지씨 모녀는 당시 정현씨가 찍었던 재산 포기 각서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코오롱측은 “창업주의 개인적인 사생활이기 때문에 기업 측면에서 답변할 일이 아니다”라며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재벌가에서 일어난 ‘딸들의 반란’은 선친의 유산을 분배하는 과정이 문제가 되었다. 오빠나 남동생들에 비해 자신들의 상속 재산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불만이 소송으로 이어진 것이다. 위의 사례들처럼 혼외 자녀들이 자신들의 상속 권리를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한 경우도 있다.

반면, 남자 형제들과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며 소송을 낸 경우도 있다. 지난 2005년 7월21일에 있었던 법원 판결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세 이상 성인 여성에게도 종중원 자격을 인정해달라”라며 용인 이씨 사맹공파와 청송 심씨 혜령공파의 기혼 여성 8명이 각각 자신의 종회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여성에게도 종중 회원 자격을 주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기존에는 종중 회원 자격은 남성만 가질 수 있었으나 이때부터 모든 성년 여성은 종중원 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해 10월16일 수원지법 민사7부는 성주 이씨 총제공파 용인종친회 여성 종중원 71명이 “여자 종중원에게 남자의 40% 수준으로 종중원 재산을 분배한 종친회 결의는 무효이다”라며 종친회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2005년 여성의 종중원 자격을 인정한 대법원 판례 이후 종중 재산 분배에서도 양성 평등을 인정한 첫 판결이다. ‘딸들의 반란’에 재판부가 다시 한 번 손을 들어준 것이다.

북한에 있는 딸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나눠달라며 남한의 이복형제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23일 북한 주민 윤 아무개씨는 한국전쟁 때 월남한 아버지가 100억원대의 재산을 남기고 1989년 작고하자 남한의 선교단체를 통해 이복형제 4명과 의붓어머니를 상대로 재산 분할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현재 헌법재판소에 가 있는 상태인데, 재판 결과에 따라 유사 소송이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