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사회에 ‘여풍’ 매섭다
  • 안성모 (asm@sisapress.com)
  • 승인 2010.01.19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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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직까지 ‘금녀의 벽’ 허물고 업무 영역 확대…전체 여성 공무원 비율도 30% 육박

▲ 과천 정부청사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이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청사를 나서고 있다. ⓒ시사저널 박은숙

중앙 부처에 부는 여풍(女風)이 매섭다. 권위주의적인 조직 문화가 지배하던 공무원 사회에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무장한 여장부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특히 국장(3급) 이상 고위직에 오른 여성 공무원들은 물품 조달, 과학수사, 청사 관리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새로운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이들은 과거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업무까지 도맡으면서 ‘금녀의 벽’을 허무는 데 앞장서고 있다.

여성 공무원들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이다. 지난 2005년 중앙 행정 기관의 일반직 공무원은 모두 8만5천9백여 명. 이들 중 1만7천7백여 명이 여성으로, 비율로 보면 20.7% 수준에 머물렀다. 반면, 이듬해인 2006년에는 여성 공무원 수가 2만명을 넘어섰고, 비율도 22.3%로 올라섰다. 이후 2007년에는 2만3천2백여 명(24.2%)을 기록했고, 2008년에는 2만5천8백여 명(25.9%)에 이르렀다. 현재 정부가 집계 중인 2009년의 경우 그 상승 폭이 더욱 가파를 것으로 예상된다.

5급 이상 간부급 여성 공무원도 늘어나고 있다. 2005년 1천59명에서 매년 2백여 명씩 증가해 2008년에는 1천7백43명으로 집계되었다. 물론 전체 간부급 공무원 중에서 여성의 비율은 아직도 10%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상당수 여성 공무원이 하위직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하지만 6.5%에 불과하던 2005년과 비교하면 여성 공무원의 상승 추세가 뚜렷하다.

고위직에 올라 나랏일을 책임지는 여성 공무원의 활약상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고위 공무원단에 이름을 올린 일반직 여성 공무원 수는 2006년 9명에서 2007년 10명, 2008년 13명으로 매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2009년에도 각 부처에서 ‘국내 최초’ 타이틀로 주목된 여성 고위 공무원이 여러 명이다. 아직 그 수가 남성 고위 공무원에 비해 턱없이 적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들은 공무원 사회에 ‘여성 시대’를 열어젖히고 있다.

그렇다면 공무원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파워 여성 공무원들은 누구일까.

김혜영 소장은 7개 부처 5천7백여 명의 공무원이 근무 중인 정부 과천청사를 관리하는 총괄 책임자이다. 행정안전부(행안부)는 지난 2009년 11월 당시 윤리과장을 맡고 있던 그녀를 정부 과천청사를 관리하는 수장으로 임명했다. 정부 청사는 그동안 민간 건물에 비해 경직되고 권위적이라는 인식을 받아왔다. 집단 민원이 많은 데다가, 각종 공사에 시설 관리나 청사를 방호하는 업무의 특성으로 인해 관리소장직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실제 역대 소장은 모두 남성 고위 공무원이었다.

‘국내 최초 여성’ 타이틀 줄이어

처음으로 그 벽을 허문 사람이 김소장이다. 부산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1983년 부산체신청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2005년 우정사업본부에서 국제사업과장으로 근무하던 당시 부처 내에서 여성 공무원으로서는 처음으로 부이사관에 오르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884년 우정총국 개국 이래 1백21년 만에 등장한 우정사업 부문 최고위직 여성 간부였다. 김소장은 “어머니의 마음과 정성으로 과천청사에 근무 중인 공무원들이 업무에 집중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싶다”라고 밝혔다.

현재 행안부 내에는 김소장 이외에도 여성 고위 공무원이 한 명 더 있다. 2008년 7월부터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책임지고 있는 정희선 소장이다. 숙명여대 약학과를 졸업한 약학 박사인 정소장은 연구소에서 약독물과와 마약분석과 과장을 역임한 베테랑 요원이다. 1978년 약무사로 첫발을 내디딘 후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과학 수사에 매진해왔다. 특히 마약 전문가로서 명성이 높다. 국내 최초로 소변과 모발에서 마약 성분을 검출하는 기법을 확립한 그녀는, 최첨단 감식 및 분석 시스템의 원천 기술을 개발해 과학수사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통일부 산하로 탈북자들의 정착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하나원’의 윤미량 원장도 ‘기록의 여장부’이다. 행정고시 30회 출신인 윤원장은 1987년 통일부 사상 첫 여성 사무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남북회담사무국과 남북회담본부 과장을 거친 그녀는 지난 2009년 5월 하나원 원장에 임명되었다. 통일부 여성 공무원으로는 처음으로 고위 공무원단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그동안 탈북자들을 관리하고 지원하는 업무에, 여성은 적합하지 않다는 고정 관념이 있었다. 하나원 원장은 고 김일성 전 북한 주석이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닮은 사람이 맡아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실제 윤원장 이전까지 하나원은 통일부의 남성 간부들이 맡아왔다. 하지만 국내로 들어오는 탈북자 중 여성 비율이 점차 높아지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윤원장은 통일부에 들어온 이후 북한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전문성을 키워왔다. 중앙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그녀는 1991년 <북한의 여성 정책>이라는 책을 냈고, 1997년 영국 런던 정경대학에서 ‘동·서독과 남북한의 여성 지위 비교’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윤원장은 “죽을 각오로 탈북한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이곳에서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2009년 7월 임명된 장경순 인천조달청장은 조달청 개청 60년 이래 첫 번째 여성 고위 공무원이다.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장청장은, 기술고시 22회에 합격해 사무관으로 조달청 업무를 시작했다. 이후 23년간 원자재 비축과 국제 협력 등 조달 업무 주요 영역을 두루 거친 조달 정책 전문가이다. 조달 사업을 조기에 집행하고, 중소기업 지원 정책을 입안·집행하는 과정에서 추진력을 인정받았다는 평가이다.

개방형 공모 통해 고위직 오른 경우도 늘어

노동부의 여성 선두 주자는 정현옥 산업안전노동국장이다. 성균관대 영문과를 졸업한 정국장은 행정고시 28회 출신이다. 산재심사위원회 위원장, 홍보관리관,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운영국장 등 요직을 거친 후 2008년 9월 국장으로 승진해 고위 공무원이 되었다. 1년 앞선 2007년 9월에는 경인지방노동청장에 임명되어 화제가 되었다. 여성이 지방노동청장에 임명된 것은 노동부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첫 여성 노동청장에다가 첫 여성 고위 공무원까지, 정국장은 노동부 역사를 새로 써가고 있다.

행정고시 28회 출신인 여성부 이복실 권익증진국장도 대표적인 여성 고위 공무원이다. 서울시립대 도시행정학과를 졸업한 이국장은 여성부의 전신인 여성특별위원회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파견 나갔고, 사회문화여성 행정관을 지냈다. 같은 해 8월에는 국장급인 기획관리심의관으로 승진했다. 2005년 여성가족부가 출범하자 가족 정책 TF팀장을 맡아 정책의 방향을 설정하고 조직을 꾸리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보건복지가족부(복지부) 장옥주 아동청소년가족정책실장은 현직에 있는 여성 고위 공무원 중 ‘맏언니’ 격이다. 행정고시 25회 출신인 장실장은 전재희 복지부장관에 이어 여성으로는 행시 두 번째 합격자이다. 이화여대 법학과를 졸업한 그녀는, 30년 가까이 공직 생활을 하면서 정부 조직 내에서 여성의 영역을 새롭게 개척해왔다. 2001년 일찌감치 3급으로 승진했고, 2008년에는 1급 자리에 오른 첫 번째 여성 공무원이 되었다.

이 밖에 국립환경인력개발원 이필재 원장, 경찰청 이금형 교통관리관, 기상청 조주영 수치모델관리관 등도 관가에서 맹활약하는 여성 공무원들이다. 이원장은 환경 정책에 정통해 환경부 환경경제과와 환경정책국 정책총괄과, 폐기물정책과 과장 등을 두루 역임했고, 2008년 3월부터 국립환경인력개발원을 책임지고 있다. 이금형 관리관은 1977년 순경 공채로 입사해 고위 공무원단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조주영 수치모델관리관은 예보 전문가로 기상청 최초로 여성 공보담당과 여성 예보관으로도 활약했다. 

식품의약안전청에는 여성 고위 공무원이 다섯 명이나 된다. 김승희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 원장, 전은숙 식품안전국장, 오혜영 식품기준부장, 이선희 의약품심사부장, 한순영 독성평가연구부장 등이다.

최근에는 개방형 공모를 통해 고위 공무원이 되는 여성도 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 김은미 심판관리관은 사법고시 33회에 합격해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지냈다. 성균관대 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2009년 4월부터 심판관리관으로 일하고 있다. 국세청 이지수 납세자보호관과 임수경 전산정보관리관도 개방형 고위 공무원이다. 지난해 9월에 임명된 임관리관은 고려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세청 최초의 여성 국장이다.      


행시·외시 ‘수석’ 여성들, 지금 어디서 무엇하나

올해 행정고시와 외무고시의 여성 합격자 수는 나이 제한이 폐지되면서 지난해보다 감소했다. 나이 든 남성 응시자들이 대거 몰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풍은 여전히 강하다. 최근 5년간 행정고시 수석 합격자는 전체 수석을 발표하지 않은 2007년을 빼면 모두 여성이 차지했다. 외무고시 역시 올해와 2006년을 제외하고는 수석 자리를 여성이 지켰다. 합격률 또한 낮아졌다고는 해도 행정고시는 46.7%, 외무고시는 48.8%로 남성 합격자 비율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수석 합격을 차지한 여성 재원들은 다양한 부서에서 공직 생활을 하고 있다. 2006년 행정고시 수석을 차지한 황지혜씨는 교육과학기술부 사무관으로 현재 영어교육강화 팀에서 활약하고 있다. 2008년 행정고시 수석인 김혜주씨는 문화체육관광부 국어민족문화과에 발령받은 신입 사무관이다. 김혜주 사무관은 연수원도 수석으로 졸업해 여성 공무원의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김사무관은 “경제 규모에 걸맞은 문화 인프라 구축이 앞으로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이다. 여기에 힘을 보태고 싶다”라고 말했다. 2007년 외무고시를 수석으로 졸업한 안혜신씨는 외교통상부에서 이등 서기관으로 일하고 있다.  

이례적인 부서를 선택한 경우도 있다. 2005년 행정고시 수석을 차지한 조승아씨는 행정고시에 합격하자마자 대통령 비서실에 임용된 첫 사례가 되었다. 2005년 외무고시를 수석 합격한 장혜정씨는 해양수산부 사이버독도청 법무팀에 자원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일본 사람들 말고도 독도를 한국 땅으로 보지 않는 외국인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결심한 일이었다. 현재 사이버독도청은 해산되었고, 장씨는 외교통상부 직원으로 러시아에 연수를 떠났다.

 


“따뜻하고 정교한 행정 펼치는 데 강점 있다”

 
장옥주 복지부 아동청소년가족정책실장 인터뷰


장옥주 보건복지가족부 아동청소년가족정책실장은 여성 고위 공무원 시대를 연 주역이다. 전재희 복지부 장관에 이어 여성으로서 두 번째로 행정고시에 합격한 장실장은, 1급 최고위직 공무원에 오른 첫 번째 여성이다. 지난 28년 동안 공직 생활을 하면서 디뎌온 발걸음 하나하나가 그대로 역사가 되고 있다.

1982년 장실장이 공직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만 해도 여성 간부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편견의 벽이 존재했다. 민원인들부터 선입견이 적지 않았다. ‘책임 있는 사람을 불러달라’라고 요구하거나, ‘차 한잔 달라’라고 하는 민원인도 있었다. 업무 지시를 내리는 상사들은 ‘여성에게 맡겨서 잘할 수 있을까’라고 걱정했다. 일부러 ‘여성에게 맞는 업무’를 맡기기도 했다. 당시 복지부 내 부녀복지과 업무가 대표적이었다. 이런 상황은 장실장에게도 부담이 되었다. 그녀는 “여성에게 처음으로 맡기는 일인 경우 내가 잘해야만 나중에 후배 여성들에게도 맡기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여성에게 맞는 업무’보다 다른 일을 하려고 노력했다. 업무 영역을 넓히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라고 밝혔다.

시대가 바뀐 만큼 여성 공무원에 대한 평가도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아직도 ‘여성은 소극적이다’라는 식의 막연한 생각이 존재한다. 장실장은 “실제 함께 일을 해보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런 경험이 없으면 잘 모르는 경우가 있다. 여성들이 더 노력해서 이런 선입견을 불식시켜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복지부에서 처음으로 보육 사업을 기획한 당사자이지만 정작 장실장 자신은 아이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매일 새벽에 출근해서 야근을 마친 후 막차로 퇴근했다. 장실장은 “아이에게는 항상 미안한 마음이었다. 보육 시설이 그때보다는 많이 늘어났지만 일과 양육을 함께할 수 있는 제도적인 지원은 여전히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여성 공무원의 강점으로는 ‘섬세하고 수평적인 사고’를 꼽았다. 장실장은 “일반적으로 상대에 대한 배려가 깊다. 공무원 입장에서 본다면 국민에 대한 이해가 깊다고 볼 수 있다. 국민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서 따뜻한 행정, 정교한 행정을 펼치는 데에 강점이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후배 여성 공무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부분도 있다. 무슨 일이든 자신감을 갖고, 또 긍정적으로 바라보라는 것이다. 장실장은 “할 수 없는 이유를 찾기보다 할 수 있는 이유를 먼저 찾아서 힘을 쏟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장실장은 “원칙을 지키고 믿음을 주었는데도 일이 잘못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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