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위해서라면 어디든 간다” 전문대로 ‘U턴’하는 고학력 학생들
  • 안성모 (asm@sisapress.com)
  • 승인 2010.01.26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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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학위 취득자도 다수 합류…보건계열 등 안정된 직장 보장된 특수 학과에 주로 몰려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한승완씨(34)는 대학에서 체육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박사학위까지 땄다. 그는 지금 운동 처방과 관련 있는 연구소의 소장이기도 하다. 이런 그가 최근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2010학년도 전문대 입시에서 대구보건대학 물리치료학과에 원서를 낸 것이다. 체육학 박사인 한씨는 왜 전문대에 다시 원서를 낸 것일까. 그는 “물리치료의 세부 분야를 배우고 익혀서 운동요법을 좀 더 과학적으로 접근해보고 싶다”라고 이유를 말했다.

대구보건대에는 한씨 외에 박사 한 명이 더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석사 출신도 13명이나 된다. 학사 출신은 무려 3백85명에 이른다. 전문대 졸업생(전문 학사) 6백20명까지 포함하면 학력 유턴을한 지원자는 이 학교에서만 1천명이 넘는다.

최근 몇 년 사이 전문대학 문을 두드리는 고학력자의 숫자가 부쩍 늘어났다. 학교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4년제 대학 졸업자가 전문대에 입학하는 사례는 이제 흔한 일이 되었다. 석사는 물론 박사 학위를 가진 지원자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오히려 학위를 숨기고 고등학교 성적만으로 입학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한다.

전문대 졸업자 정규직 취업률, 4년제 대학보다 높아

나이가 26세 이상인 학생 수를 살펴보면 이런 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다. 전문대의 경우 26세 이상의 학생이 2000년 7.3% 였으나, 지난해에는 13.3%로 거의 두 배나 급증했다. 반면, 4년제 대학의 경우 10년 동안 6%대에 머무르고 있다. 전문대 진학 연령이 높아졌고, 여기에는 고학력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대구보건대 2학년에 올라가는 이승돈씨(27)도 학력 유턴을 한 사례이다. 이씨는 영남대 조경학과를 졸업한 후, 한 국립대에 취업해 사무직 일을 했다. 비정규직이었다. 그는 정규직 직원이 되기 어렵다고 보고 지난해 이 학교 방사선과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주변에서 만류하는 분위기였다. ‘3년을 더 공부한다고 취업이 되겠느냐. 괜히 시간만 낭비하지 마라’라는 것이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그는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고 있다. 오히려 조금 더 일찍 결정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씨는 “처음에는 일할 수 있는 곳이 병원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IT업체 등 여러 방면으로 진출할 수가 있더라. 선택의 폭이 더 넓어졌다”라고 말했다.

고학력자들이 전문대로 돌아가 ‘장(長)학생’의 길을 걷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좀 더 나은 직업을 선택하기 위한 경우가 가장 많다. 좁은 취업문을 통과하고 더 안정적인 일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정부가 발표한 지난해 4년제 대학 졸업자의 정규직 취업률은 39.6%에 불과하다. 2008년 48%에서 한 해 사이 8.4% 포인트나 떨어졌다. 반면, 전문대 졸업자의 정규직 취업률은 57.7%에 이른다. 4년제 대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업난이 덜한 셈이다. 특히 전문대 1백54개 중 64개 학교가 취업률이 90%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경남정보대·신흥대·영진전문대 등 일부 학교의 경우 취업률이 95%를 넘어선다.

고학력자들의 지원이 보건계열 등 특정 학과로 쏠리는 이유도 안정적인 직업과 연관이 있다. 간호학과의 경우 정규직 취업률이 90% 이상이며, 다른 학과도 높은 취업률을 자랑한다. 최근에는 미국이나 호주 등 해외로 취업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일단 입학을 하면 취업 걱정은 덜 수 있는 셈이다. 그런 만큼 자연스럽게 고학력자들이 몰려들 수밖에 없다. 대구산업정보대학의 경우 올해 보건계열에 대학 이상 졸업자가 2백1명이나 지원했다. 삼육보건대학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10명을 뽑는 간호과에 2백94명, 16명을 뽑는 치위생과에 70명이 지원했다. 이들 중에는 석·박사 출신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미1대학 피부미용테라피과 2학년인 구지은씨(28)는 창원대 보건생화학과를 졸업한 후 숙명여대 대학원에서 향장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화장품 회사에서 연구원으로 4년간 일했던 구씨는 지난해 이 대학에 편입학했다. 그녀는 “1년 동안 배운 것도 많고 실기교사 자격증도 땄다. 앞으로 더 많은 기회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문대로 향하는 고학력자들이 늘어나는 이유 중 하나는 전문자격증을 취득하기에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세무 관련 학과에 ‘만학도’가 많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일반 직장에 다니다가 전문직에 종사하고 싶어 관련 학교를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 사회 경험이 풍부하거나 공부를 오래 했던 지원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최정선 웅지세무대학 교수(33)도 전문 자격증을 따겠다는 목표로 뒤늦게 전문대에 들어갔다. 최교수는 이 학교 세무행정과에 입학하기 전에, 숙명여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학원강사로 4년 정도 일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선택한 길이지만 성과는 곧바로 나왔다. 입학한 지 1년 만에 세무사시험에 합격했고, 졸업과 동시에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세법을 강의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전임으로 임용되었다. 최교수는 “전문 자격증을 갖고 그 분야에서 열심히 노력하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어린 시절 꿈 실현하기 위해 선택하기도

어린 시절의 꿈을 더 늦기 전에 펼쳐보기 위해 전문대에 재입학하기도 한다. 지난해 대경대학에 처음 생긴 자동차딜러과에 입학한 이혜리씨(31)는 숙명여대 무용과에서 발레를 전공했다. 졸업 후 8년정도 요가 강사로 활동하던 그녀는,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자동차 관련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과감하게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여성이 많지 않은 영역이라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라고 밝혔다. 이 학교 뷰티디자인학부 1학년 학생 중에는 수녀도 있다.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헤어디자인을 직접 배우려고 입학했다고 한다.

동아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이미경씨(25)는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이씨는 대학을 졸업한 후 동의과학대학 임상병리과에 다시 입학했다. 고등학교 때는 4년제 대학으로 진학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지만, 어린 시절의 장래 희망은 보건 분야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최근 임상병리사 시험에 합격한 그녀는 “여기서 안주하기보다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기 위해 계속 도전할 생각이다. 그래서 이 분야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고 싶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처럼 고학력자들의 전문대 진학이 늘어나고 있지만, 사회의 인식과 정부의 지원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전문대를 4년제 대학의 하위 기관쯤으로 인식하는 경향은 여전히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전문대에 대한 정부의 정책과 재정 지원은 아직도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김정길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회장은 “전체 대학 진학자의 43%가 전문대에 진학하는데, 예산 지원은 고등교육지원 예산 3조5천억원의 7%인 2천5백억원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지적하면서 “재정지원 규모를 확대하고 지원 프로그램도 다양화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주위 시선 의식할 필요 없다”

 
석사학위를 가진 연구원이 다시 대학생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지난해 구지은씨가 구미1대학 피부미용테라피과에 편입하자 처음에는 다들 이상하게 여겼다. 그녀 역시 편입을 결심하기 전에는 학력 U턴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고 있다. 계획했던 목표에도 바짝 다가섰다. 미용 실무를 익혔고, 교사 자격증도 땄다.

지난해 8월부터 호주 시드니에서 가진 해외인턴십 과정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경험이 되었다. 1개월간 어학연수를 마친 후 3개월 동안 현지 살롱에서 실무를 익혔다. 여러 인종의 피부를 만져보고 다양한 타입의 피부를 접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그녀는 “앞으로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구씨는 올해 2월 졸업 후에도 학교에 남아 후배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화장품학 강의를 맡은 것이다. 교사의 꿈이 이제 눈앞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 그녀는 전문대 입학에 관심이 있는 고학력자들에게 “4년제냐, 전문대냐에 가치를 두지 말았으면 한다. 또, 주변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지 말고 처음에 계획한 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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