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스포츠 성장과 함께한 재일동포들
  • 신명철 | 인스포츠 편집위원 ()
  • 승인 2010.02.02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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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 야구 선수들 중심으로 ‘모국 진출’ 이어져…올림픽에 나가 유일한 메달리스트 되어주기도

▲ 지난 1월5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일본 전국고교럭비대회 준결승전에서 조선학교를 후원하는 재일동포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응원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이날 벌어진 오사카조선고급학교와 도인가쿠엔고교의 경기. ⓒ연합뉴스

재일동포. 일본에 살고 있는 우리 핏줄을 일컫는, 흔히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등을 통해 듣거나 보게 되면 왠지 가슴이 저리다. 직접 경험은 하지 못했지만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우리 민족이 겪은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말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1983년 프로야구 개인상 시상대에 선 장명부와 김무종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그해 10월21일 잠실구장에서 벌어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해태 타이거즈는 MBC 청룡을 8 대 1로 꺾고 시리즈 전적 4승1무로 V10의 첫발을 내디뎠다. 

장명부는 시즌 30승으로 다승 1위와 함께 투수 부문 베스트 10으로 뽑혀 포수 부문 베스트 10으로 선발된 김무종과 나란히 시상대에 섰다. 당시 기준으로 볼 때 현역 선수로는 적지 않은 나이인 33살과 29살이었던 두 선수는 시상대 위에서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조센진’, 한국에서는 ‘반(半)쪽발이’로 불리며 경계인으로 살아야 하는 재일동포 두 선수는 그 자리에서 복잡다단한 감정이 복받쳤을 것이다.  

그때부터 24년 여 전인 1959년 8월, 까까머리 고교생이 제4회 재일동포학생선수단의 일원으로 서울 땅을 밟았다. 그리고 그 학생은 오직 야구 하나만을 생각하며 이듬해 귀국해 교통부, 기업은행 등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은퇴한 뒤에는 충암고와 신일고 감독을 맡아 지도자로 이름을 날렸다. 1982년에는 OB 베어스 코치로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했다. 그리고 2007년 6월28일 문학구장에서 롯데 자이언츠를 10 대 2로 물리치고 국내 프로야구 두 번째로 9백승 사령탑이 되었다. 2007년과 2008년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고, 지난해에는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차지했다. 영구 귀국한 뒤 50년 동안 야구 외길 인생을 걸어온 그는 SK 와이번스 김성근 감독이다.

국내 야구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재일동포 선수들의 국내 진출에는 대략 두 차례의 큰 흐름이 있다. 첫 번째는 1960년대 초로, 이때 선수로는 김성근 외에 신용균·배수찬·박정일·김영덕 등이 있다. 특히 신용균은 한국이 1963년 서울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을 누르고 대회 첫 우승을 차지하는 데 단단히 한몫했다. 한국은 더블리그로 벌어진 이 대회에서 일본을 5 대 2, 3 대 0으로 눌렀다. 신용균은 두 경기에서 모두 승리 투수가 되었다. 두 번째는 1980년대 초 프로야구가 출범할 때이다. 장명부·김무종 외에 주동식·김일융·홍문종·최일언 등이 얇은 국내 선수층을 메우며 프로야구가 조기에 정착하는 데에 기여했다. 

국내 스포츠 발전에 재일동포 선수들이 힘을 보탠 종목은 야구만이 아니다. 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선수 전원이 재일동포로 꾸려진 남자 필드하키 대표팀이 동메달을 땄다. 1986년 서울올림픽 여자 필드하키 은메달, 2000년 시드니올림픽 남자 필드하키 은메달의 기틀이 이때 마련되었다. 유도가 처음으로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는 재일동포 김의태가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는 재일동포 오승립이 은메달을 차지했다. 오승립은 이 대회에서 한국의 유일한 메달리스트였다. ‘노 메달’에 그친 1960년 로마올림픽 성적에서 알 수 있듯이 메달 하나가 소중한 시절이었다.  

신세대 재일동포 선수들도 선배들에 못지않은 기량을 뽐내고 있다는 소식이 최근 전해졌다. 오사카조선고급학교는 지난 1월5일 히가시오사카 시 긴데쓰하나조노럭비장에서 벌어진 2009년 전국고등학교럭비풋볼대회 준결승에서 도인가쿠엔고에게 7 대 33으로 져 결승 진출에 실패했으나 일본 전국의 내로라하는 학교들과 겨루어 당당히 3위를 차지했다. 이번 대회로  89회째인 이 대회에서 한국계 학교가 입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의 럭비 인기는 한국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다. 이 대회 방식은 국내 스포츠팬들에게 널리 알려진 고시엔 대회(전국고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와 비슷하다. 전국의 도도부(都道府) 현에서 8백여 개 학교가 예선을 치러 51개 팀이 본선에 올라 기량을 겨룬다. 오사카조선고급학교는 3장의 본선 출전권이 배정된 오사카 부(府) 예선에서 전 대회 우승교인 조쇼케이코가쿠엔고를 25 대 19로 물리치고 본선 티켓을 거머쥐었다. 이제까지 4차례 본선에 올랐고 가장 좋은 성적이 1987년 제67회 대회 16강인 오사카조선고급학교는, 본선 1회전을 부전승으로 통과한 뒤 32강이 겨룬 2회전에서 최근 6연속, 통산 34차례 본선에 오른 니가타공고를 기록적인 스코어인 50 대 0으로 꺾고 지역 예선의 돌풍을 이어갔다. 16강전에서는 우승 5차례와 준우승 2차례 그리고 최근 19년 연속, 통산 35회 본선 출전에 빛나는 도쿄 도(都) 대표 고쿠가쿠인다이가쿠 구가야마고를 15 대 7로 제쳤고, 준준결승에서는 최근 15년 연속, 통산 17차례 본선에 나선 류케이가시고를 12 대 5로 눌렀다. 전교생이 1천명이 안 되는 오사카조선고급학교의 럭비부 선수들은 재일동포 사회에 감동을 안겼고 한민족의 뛰어난 운동 실력을 과시했다. 

그런데 이 학교 이름이 왠지 귀에 익다고 느끼는 스포츠팬이 있을지 모르겠다. 4년 전 이맘때인 2006년 1월3일 지바 현 이치하라링카이 경기장에서 열린 제84회 전일본고교축구선수권대회 16강전에서 나가사키 현 대표인 구니미고를 1 대 0으로 꺾고 준준결승에 오른 팀이 바로 오사카조선고급학교이다. 구니미고는 제82회 대회 우승을 포함해 이 대회 본선에 20차례 진출해 여섯 차례나 정상에 오르고 세 차례 준우승을 차지한 일본 고교 축구의 강호이다. 박지성이 일본 프로축구 J리그에서 활약할 때 소속 클럽인 교토 퍼플상가를 우승으로 이끈 2002년 제82회 일왕배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 2회전에서 대학 강호인 고쿠시칸대를 2 대 1로 물리치고 고교 팀으로 32강이 겨루는 3회전에 올라 화제를 모은 학교이다.

K리그 수원 삼성에서 뛰다 지난 1월15일 J리그 오미야 아르디자로 이적한 안영학 등 재일동포 출신 축구 선수들처럼 머지않아 오사카조선고급학교 졸업 선수가 국내 럭비 리그에서 뛸지도 모른다. 럭비는 지난해 9월 코펜하겐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골프와 함께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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