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슈퍼 인재가 왜 죽음을 택했을까
  • 이석·반도헌 기자 (ls@sisapress.com)
  • 승인 2010.02.02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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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임원 대부분 강박 관념에 시달려…7%는 스트레스 수준 ‘위험 수위’

▲ ⓒ시사저널 임영무

“기업 CEO나 임원들의 정신적 스트레스가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 어떤 계기가 주어진다면 또 다른 임원의 자살로 번질 수 있다.” 정신과 전문의인 정혜신 마인드프리즘 대표의 말이다. 그는 최근 발생한 이원성 삼성전자 부사장의 자살 사건에 안타까움을 표시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유사한 자살 사건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정대표는 “겉에서 보기에 화려한 직업이 기업 임원이나 CEO이다. 하지만 이들은 개인적으로 무조건 발전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고 있다. 이 스트레스가 지나칠 경우 자기 보호 본능을 떨어뜨려 자살에 이르게 된다”라고 지적했다.

지난 1월26일 오전, 서울 삼성동 자신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은 이원성 부사장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현재 경찰뿐 아니라 당사자인 유족들은 사건에 대해 언급하기를 극도로 꺼리고 있다. 이부사장의 유서는 공개되지 않았다. 그가 몸담았던 삼성전자 역시 사회적 파장을 우려해 대응을 자제하는 분위기이다. 회사 관계자는 “고인은 사업을 총괄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일반 사원처럼 특정 프로젝트나 업무가 과도하게 주어지지는 않았다”라고 짧게 답했다. 이부사장의 자살이 회사 일과는 무관하다는 우회적인 해명이다. 하지만 이부사장이 유서에서 회사 생활의 어려움을 호소했던 점, 평소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유족의 말 등을 감안할 때 업무 스트레스에 의한 자살 쪽에 무게가 쏠리고 있다. 사건을 수사 중인 강남경찰서측도 언론을 통해 “이씨가 우울증을 가지고 있었고, 잦은 부서 이동과 업무 부담에 힘들어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이부사장은 최근 1년여 동안 세 번이나 부서를 옮겼다. 이미 알려진 대로 그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석사,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연구통이다. 삼성전자에는 1992년에 합류했다. 이후 그는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 등과 함께 D램 반도체 개발을 주도하면서 고속 승진을 이어갔다. 입사 7년만인 지난 1998년 반도체 총괄이사(비등기 임원)에 선임되었다. 2006년에는 삼성 내에서 최고 엔지니어에게 수여되는 ‘삼성 펠로우’에 선정되었고, 이듬해에 부사장(메모리 연구소장)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지난해 1월 메모리연구소가 없어지면서 시스템LSI사업부 LSI개발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년 만인 올 1월 또다시 파운드리사업팀장에 부임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업계 관계자는 “파운드리사업팀은 다른 회사가 설계한 반도체를 위탁받아 생산하는 부서이다. 기존 메모리사업부나 LSI개발실에 비해 그룹 내 비중이 떨어지는 한직으로 인식되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이와 관련해 삼성전자측은 파운드리 사업팀 이동이 한직으로 밀려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회사 관계자는 “파운드리사업은 회사에서 새롭게 밀고 있는 분야이다. 특히 고인은 잠재적인 CEO군으로 분류되었던 만큼 연구 이외에 생산 쪽의 경험도 필요했다”라고 잦은 인사의 불가피성을 설명했다. 이부사장의 비서실 직원 역시 1월27일 <시사저널>과의 전화 통화에서 “이전에는 한 단계 낮은 임원이 팀장을 맡았지만, 최근에는 부사장급에서 조직을 이끄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회사나 사회적 존재감이 삶의 전부”

주목되는 점은 이부사장처럼 촉망받는 인물이 왜 하필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을까 하는 것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이부사장은 지난해 8월 1천2백주를 추가로 취득해 삼성전자 주식 9천4백37주(0.01%)를 보유하고 있다. 자살 직전인 지난 1월8일 1천주를 처분했지만, 부동산 외에 현금으로 환전할 수 있는 주식만 최소 70억원에 달한다. 이같은 상황에서 회사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을 경우 사표를 내면 그만이다. 삼성전자 내부에서조차 “이해할 수 없다”라고 토로할 정도이다. 때문에 이부사장의 결심 이면에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난무하고 있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기업 임원들이 이같은 상식적인 판단마저 할 수 없을 정도로 현재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극심하다고 지적한다. 정혜신 마인드프리즘 대표는 “기업 임원들을 대상으로 면담한 결과 어린아이에게서 나타나는 심리가 엿보였다. 회사 일에 너무 몰두하다 보니 회사나 사회적 존재감이 삶의 전부가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엇나가게 되면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게 되는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초등학생들이 학교에서 유리창을 깨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자살 유혹에 빠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임원들도 그 정신세계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마인드프리즘은 지난 4년간 CEO 및 임원 4백여 명을 대상으로 일대일 상담을 벌인 내용을 최근 공개했다. 결과는 충격적이다. 임원 다섯 명 가운데 네 명은 맹목적인 강박 관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7%는 이미 스트레스 수준이 위험 수위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회사에서 인정받거나 고속 승진한 임원들의 경우 한 번 엇나가기 시작하면 박탈감이 커지게 된다.

지난해 10월 말, 한 외국계 증권사의 한국 주식 리서치 부문 대표가 서울 중구에 있는 한 은행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역시 37세의 나이에 상무에 오를 정도로 고속 승진을 해왔다. 하지만 외국계 증권사의 철저한 성과주의 속에서 숨이 막혔던 것이다. 유족들은 경찰 조사에서 “과중한 업무로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불안감과 압박을 받으면서 죽고 싶다는 말을 해왔다”라고 진술했다.

이부사장 또한 이처럼 잦은 인사 이동과 주류에서 밀려났다는 박탈감이 결국 자살을 택하게 한 것 아니냐는 시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신과 전문가들은 이같은 현상을 ‘자기 개선 콤플렉스’ 혹은 ‘자기 개선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김진세 고려제일신경정신과 원장은 기업 임원들의 복리 증진뿐 아니라 심리적 여유를 챙길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현재 삼성전자를 포함한 국내 대기업은 임원들의 복리나 급여 체계에 대해서는 공을 들이고 있다. 하지만 직원들의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김원장은 “선진국에서는 직무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직책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직원들의 심리적 압박감을 덜어주는 일을 주로 한다. 국내 기업들도 이제는 심리적 문제에 대해서도 신경을 쓸 때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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