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 닫은 일본, 악재 ‘첩첩산중’
  • 도쿄·임수택 | 편집위원 ()
  • 승인 2010.02.09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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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플레이션으로 저가 출혈 경쟁 난무하고 백화점 폐점 잇따라…원가 절감하다 제품 질 추락 ‘악순환’

▲ 올해 안에 폐쇄될 예정인 일본 도쿄의 세이부 백화점 유락쵸점 앞에 도쿄 시민들이 오가고 있다. ⓒAP연합

일본 치바 시에 있는 슈퍼마켓 트라이얼 앞에는 단 1엔이라도 더 싸게 사려는 사람들이 개점 전부터 장사진을 이룬다. 근처 슈퍼마켓도 예외가 아니다. 커다란 슈퍼마켓의 천정에는 이곳 저곳에 ‘반액(半額) 판매’를 알리는 현수막이 길게 내려져 있다. 트라이얼 직원들은 근처 경쟁사인 슈퍼마켓 앞에서 경쟁사의 오늘의 시세를 몰래 살펴본 뒤 본점에 보고한다. 다음 날 근처 슈퍼마켓보다 단 1엔이라도 싸게 팔기 위해서다.

일본 슈퍼마켓들은 지금 치열하게 출혈 경쟁을 하고 있다. 가격 인하 싸움은 둘 중 하나가 문을 닫을 때까지 계속되고 있다. 일본 경기가 디플레이션의 함정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현장이다.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10년간 겪었던 디플레이션 현상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비가 꽁꽁 얼어붙었다. 소비자들이 싼 물건만 찾다 보니 백화점에는 손님이 줄어 들기 시작했다. 지난 1월26일 도쿄의 최대 번화가 긴자에 인접해 있는 세이부 백화점 유락쵸점은 올해 안에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지난해 오오사카점, 삿포로에 이어 도쿄의 유락쵸점마저 문을 닫게 된 것이다.

도요타 자동차에 이어 혼다 자동차도 대규모 리콜 발표

도쿄의 유락쵸점은 패션의류 판매를 통해 한때 젊은이들로부터 인기를 독차지했다. 1992년도에는 2백70억 엔의 매출을 올리며 명품 백화점으로서 명성을 이어왔다. 유락쵸점이 폐쇄된다는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교토 시 번화가에 있는 시죠카와라마치한큐 백화점도 올가을에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지방 백화점들의 경기는 말할 것도 없다. 1991년도 9조7천1백30억 엔에 달하던 백화점 매출이 해마다 감소하기 시작해 지난해에는 6조5천8백42억 엔까지 떨어졌다. 백화점의 기록적인 판매 부진 사태에 좀처럼 제동이 걸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소비 침체는 궁극적으로 제품의 질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10여 년간 디플레이션을 겪으면서 기업들은 고비용 구조를 타개하기 위한 일환으로 생산 거점을 중국, 베트남 등 해외로 옮겼다. 부품 조달도 해외에서 이루어졌다. 오랜 세월 원가 절감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질적인 부문에서 부작용이 발생했다. 대표적인 예가 최근 불거진 도요타 자동차의 리콜 현상이다. 도요타 자동차는 액셀 부품의 결함 문제로 미국 및 유럽 등에 판매한 차 8종, 4백40만대 정도를 리콜하면서 그동안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졌다. 혼다 자동차도 창문 스위치 결함으로 전세계에 판매된 피트, 재즈, 시티 65만대를 리콜한다고 발표했다. 경제동우회 사쿠라이 대표 간사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부품을 공통화한 것이 문제였다. 일본 기업 전체가 품질 관리의 중요성을 재인식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도요타와 혼다 자동차의 기술은 일본의 모노츠쿠리의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노츠쿠리란 직역을 하면 ‘물건을 만든다’는 말이지만 본래는 단순히 물건을 만드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모노츠쿠리 정신은 장인 정신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 정신으로 일본은 패전 이후 단기간에 혼다, 도요타, 소니, 도시바, 샤프, 히타치, 미쓰비시 등 세계적인 기업을 키워냈다. 또, 부품·소재 산업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일류를 지향해왔다. 이렇게 본다면 도요타 자동차의 리콜 사건은 일본 제조업의 근간인 모노츠쿠리 정신의 리콜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비단 기업과 민간 차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도 소비 침체의 원인이다. 일본의 GDP(국내총생산)는 4백80조 엔이고 재정 적자는 GDP의 1.9배이다. 세수가 37조 엔인데, 국채 발행액은 44조 엔이다. 국가 부채가 일본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저출산·고령화라는 인구 구조에서 비롯된 원인도 심각하다. 고령화는 현재 22.8% 정도이지만 계속 상승해 2025년에는 30%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러한 인구 구조는 소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 1월28일 미국 워싱턴의 일본 대사관 앞에서 미국인들이 도요타 자동차를 비난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 연합

일본인들의 개인 재산은 1천70조 엔 정도에 이른다. 이 중 상당 부분의 돈은 노년층들이 가지고 있다. 고도 성장기에 피땀 흘려 벌어서 저축한 돈이다. 이 뭉칫돈이 좀처럼 소비되지 않고 있다. 돈을 가지고 있는 노년층들은 최소한의 소비만 하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동네 가게나 편의점 등에서 필요한 것들만 구입하거나 슈퍼마켓 바겐세일을 이용해 소비하고 있다. 도쿄의 미나토 구에서 부동산중개업소를 경영하는 이시야마 사장은 “80세 된 노인이 미래가 불안해서 돈을 쓸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그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다. 근본적이고 획기적인 소비 진작 대책이 없으면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경제 살리기 사령탑을 맡고 있는 칸 나오토 재무상은 디플레이션을 극복하는 것과 자녀 수당을 지급하는 것을 경제 대책의 최우선 과제로 정했다. 재원을 조달하는 것에 대한 비난 여론에도 매월 1인당 2만6천 엔(33만8천원)의 자녀 수당을 예정대로 지급할 계획이다. 단기적인 경기 자극과 저출산·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급한 대책은 비관적인 생각을 희망적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경제 환경이 일본만 어려운 것도 아닌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에서 자발적인 동력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고 있다. 공적자금 투입으로 연명하기 시작한 일본항공 문제, 소비 침체에 따른 대도시 백화점의 잇단 폐쇄, 도요타와 혼다 자동차의 리콜 사태, 탄력을 잃어가는 인구 구조, 젊은이들의 도전 정신 결여,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 등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최근 자체적으로 변화의 동력을 찾지 못하는 일본 사회에 인위적인 변화가 시도되고 있다. 공영방송 NHK가 사카모토 료마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는 것이 한 예이다. 서점에 가면 사카모토 료마 관련 책들이 가장 많이 눈에 띈다. 사카모토 료마는 막부 시대의 막을 내리게 하고 메이지 유신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수많은 인물 중 일본인들이 가장 추앙하는 인물이 바로 사카모토 료마이다.

공영방송이 변화를 싫어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젊은이들에게 도전 정신을 불어넣고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고취하기 위해 19세기의 인물을 다시 깨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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