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TV 드라마, 한국에서 동시 방영 개시
  • 하재근 | 문화평론가 ()
  • 승인 2010.02.23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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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뜨거워지는 ‘미드’의 치밀한 유혹

 

▲ (왼쪽)는 미국 드라마 중 대표적인 범죄물로서, 시즌 10까지 제작되어 방영되고 있다. ⓒOCN

<아이리스>가 받은 찬사는 이런 것이었다. ‘마치 미드(미국 드라마) 같다.’ ‘미드 같다’라는 말이 한국 드라마가 들을 수 있는 최대의 찬사가 된 것이다. 극의 밀도가 높거나, 전문성이 깊거나, 규모가 크면 으레 미드 같다는 찬사가 쏟아진다. 혹은 미드와 비교되면서 표절 논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뉴하트>나 <종합병원2> 등이 방영되었을 때 미드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는 비판이 있었고, 포스터 이미지 표절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워낙 일반적인 이미지여서 비슷해도 별로 문제될 것이 없었는데도 그랬다. 미드 콤플렉스가 얼마나 민감한지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미드는 어느새 한국 드라마의 비교 대상, 한국 드라마가 당연히 따라야 할 전범이라는 위상을 확립해가고 있다.  

‘미드 폐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드 열풍이 뜨거워진다.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그렇다고 한다. 진정으로 지구를 점령한 것은 할리우드 영화가 아니라 미드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과거에는 미국에서 종영된 미드가 수입되었었지만, 요즘에는 미국에서 방영 중인 미드까지 동시 방영될 정도로 미드와 우리의 거리는 가까워지고 있다. 미국 문화의 ‘조용한 공습’이다. 미드에는 어떤 특징이 있기에 이런 파괴력을 보이는 것일까?

미드의 매력은 기본적으로 할리우드 영화의 매력과 같은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만의 독특한 경쟁력은 두 가지 점에서 말할 수 있다. 바로 규모와 내용이다. <아바타>를 떠올리면 되겠다. 먼저 규모의 경우, <아바타>는 한국 영화 산업계 전체가 2년간 쓸 돈을 영화 한 편에 쏟아부었다. 기가 질릴 정도의 규모와 신기술로 사람들을 압도한다. 이렇게 엄청난 물량 공세에 맞설 영화 산업을 가진 나라는 없다. 내용의 경우, <아바타>는 실험적이거나 전위적인 내용을 다루지 않는다. 철저하게 대중적이고 익숙한 영웅, 멜로, 액션을 조합한 이야기를 내용으로 채용했다. 관객은 엄청난 물량으로 인한 경이로움을 대중적인 내용으로 인한 편안함 속에서 즐길 수 있었다.

미드의 매력도 이런 식의 물량과 내용에 기댄다. 미드는 편당 제작비가 수백만 달러에 달한다. <로스트> 파일럿 편의 경우 제작비가 무려 1천만 달러에 달했다. 한국으로 치면 영화 한 편 제작비로 미국은 드라마 한 편을 만드는 것이다. <CSI 라스베가스> 시리즈의 윌리엄 피터슨은 편당 출연료가 50만 달러라고 한다. 이렇게 엄청난 물량 공세에 한국 드라마가 맞서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 미국 드라마 (위)는 한국 드라마 의 원작 대접을 받은 액션물이다. ⓒ수퍼액션

내용에서도 미드는 <아바타>처럼 대중적인 전략을 취한다. 세계 시장을 노리는 미드로서는 보편적인 내용을 담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실험적이거나 특별히 예술적인 내용들보다는 익숙한 상업적 코드에 기댄다고 할 수 있겠다. 전 지구인을 대상으로 한 ‘메이드 인 USA’ 상업 드라마인 것이다. 상업 드라마는 상업 드라마인데 세계 최대의 물량과 세계 최고의 제작진이 투입되어 세련되고 밀도가 높은 ‘방영 전에 만들어진’ 드라마들이다. 이렇게 잘 만든 작품들을 공급해주기 때문에 각 나라의 젊고 감각적인 시청자들이 자국의 어설픈 작품을 뒤로 하고 ‘미드 폐인’ 대열에 동참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미드는 영어로 만들어진다. 영어는 한국인의 ‘로망’ 아닌가. 사람들은 영어 공부 때문에도 미드를 본다. 이런 배경에서 이른바 ‘석호필(미드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 스코필드의 한국식 애칭)’ 열풍이 태어났다.  

미드는 물량을 과시하기 좋은 범죄 액션물이 주종을 이룬다. <CSI>가 대표적인 범죄물이라면, 한국에서 <아이리스>의 원작 대접을 받은 <24>는 대표적인 액션물이라고 하겠다. 범죄 미스터리 액션극을 매우 박진감 있게 그려주는 것이 미드의 특징이다. 밀도감에 의한 몰입도가 워낙 강력해서 한 번 보면 헤어날 수가 없다.

다양하고 전문적인 소재 채택해 개성 강한 시청자들 사로잡아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정체성이 공존하고 있는 미국에서 만들어진 만큼, 미드는 다양하고 전문적인 내용들도 다룬다. 반면에 한국 드라마들은 사랑, 결혼, 가정, 성공이라는 획일적인 가치만을 다룬다. 따라서 개성과 자의식이 강한 집단이 미드에 탐닉하는 경향이 있다.

<섹스 앤 더 시티>는 가정의 압박에서 벗어난 내용으로 전세계 싱글 여성의 생활 교과서라고 불렸을 정도이다. 당연히 한국의 미혼 여성들도 이 드라마를 동경했는데, 이 작품에는 게이 같은 성적 소수자가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반면에 한국 드라마는 일반인과 정체성이 다른 소수자를 극히 편향된 시각으로 다룬다. 최근 <보석비빔밥>에도 동성애를 혐오하는 듯한 설정이 뜬금없이 등장했다.

미드에는 한국 드라마와 같은 멜로의 과잉이 없다. <24>나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멜로 코드는 극히 제한적으로 나올 뿐이다. 한국 정치인들에게 민주 정치의 전범을 제시한 <웨스트 윙>에도 멜로 코드는 없다. 한국이 대통령을 소재로 드라마를 만들어도 결국 사랑 타령으로 끝나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래서 전문직 드라마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미드와 비교하고, 결국 멜로가 전면에 나서는 것을 보며 한탄하는 일이 반복되는 것이다. 미드가 웰메이드 드라마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에 젊고, 학력 수준이 높고, 감각적인 사람들은 대중과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서도 미드에 탐닉하게 되었다.

미드보다는 못하지만 ‘일드(일본 드라마) 폐인’ 현상도 만만치 않다. 일드는 미드처럼 물량 공세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드와 같이 다양하고 전문적인 내용을 그리며 좀 더 섬세하다는 특징이 있다. 일드는 한국처럼 사랑, 출세, 선악 구도만을 반복하지 않는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그리는 것이 일드의 특징이며, 이 때문에 일드 역시 한국 드라마보다 세련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단순한 선악 구도에 출생의 비밀과 불륜이 겹치는 막장적 설정 등을 들어 한국 드라마를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 드라마에는 우리만의 미덕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미드나 일드처럼 좀 더 전문적이고, 다양하고, 밀도가 높은 작품들이 많이 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바로 그런 바람이 미드 열풍의 근본적인 원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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