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병 '화병' 참는것이 당신을 죽인다
  • 노진섭 (no@sisapress.com)
  • 승인 2010.02.23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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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저널 이종현
국보 1호 숭례문에 화재가 난 지 2년이 흘렀다. 당시 방화범 채 아무개씨는 땅이 재개발되는 과정에서 보상금을 충분히 받지 못해 홧김에 불을 질렀다고 진술했다. 채씨처럼 홧김에 일을 저질러 순식간에 인생이 꼬이는 경우가 심심찮게 발생한다. 의학계에서는 화병(火病)이 사회에 만연해 있기 때문에 우발적인 사건이 끊이지 않는 것으로 본다. 50대 이상 여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화병이 최근에는 연령에 관계없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30~40대 남성이 화병을 앓는 사례가 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화병이 단순한 우울증에 그치지 않고 다른 질환으로 발전해서 생명을 위협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40대 직장인 김 아무개씨는 최근 병원으로부터 진단 결과를 통보받고 깜짝 놀랐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운동·흡연 등으로 그때그때 풀었다고 생각했는데 화병이라고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이유 없이 몸이 아프고, 쉽게 놀라며, 짜증과 불안한 감정을 가지고 살았다. 몇 달 전부터는 불면증까지 겹쳐 사회생활에 지장이 생기자 병원 가정의학과와 내과를 찾았지만 원인을 명쾌하게 찾아내지 못했다. 전문의와 상담한 결과, 직장 상사로부터 받는 스트레스, 아내와의 갈등이 원인으로 밝혀졌고 현재 치료를 받고 있다. 이동현 서울시 북부노인병원 정신과 과장은 “화병은 스트레스가 오랜 시간 누적되면서 나타난 구체적인 증상이다. 그 증상은 조금씩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예고 없이 터져나온다. 최근까지 스트레스를 잘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이라도 갑작스럽게 폭발하듯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스트레스가 다양하게 쌓인 결과…원인 따져 해결책 찾아야

스트레스가 다양하게 쌓인 결과…원인 따져 해결책 찾아야

화병은 사실 늘 우리 곁에 있다. 30~40대 직장인 다섯 명 가운데 네 명이 직장 생활 중에 화병을 앓은 경험이 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취업 포털 커리어가 2008년 직장인 1천6백7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3.4%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 화병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이들 중 32.4%는 화병 때문에 회사를 그만둔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화병의 원인으로는 직장 내 인간관계에 따른 갈등이 51.9%로 가장 많았다. 과다한 업무 스트레스도 36.3%로 나타났다. 화병을 푸는 방법으로는 음주·가무가 29.7%로 가장 많았으며, 시간이 해결해 줄 것으로 생각하고 넘겼다는 응답자도 26.5%나 되었다.

화병은 고용 불안, 사업 실패,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 스트레스가 다양하게 쌓인 결과이다. 승진 실패, 사기, 다툼, 부당한 재판 등으로 속상함, 억울함, 분함, 증오 등이 가슴에 누적되는 것이다. 오래전 경험한 분노를 어느 정도 극복했거나 또는 체념한 감정이 한이라면 화병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되는 현재 진행형 감정이다. 아직 극복되거나 잊히지 않은 불안정한 상태이다. 화병은 우울증과도 다르다.

학자들은 ‘참는 것이 미덕’이라는 분위기가 강한 한국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질환으로 보고 있다. 미국정신의학회는 1995년 화병을 ‘hwabyung’이라는 한국 병명 그대로 표기했다. 분노를 억제해서 생기는 분노 증후군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울증이 정신적 장애에 가깝다면 화병은 신체적·감정적 장애까지 동반한다. 정신적·감정적인 증상으로는 불면증, 기억력 감퇴, 공허함, 집중력 저하, 신경과민, 우울증, 분노, 근심, 걱정, 인내 부족, 불안감 등이 나타난다. 여기에 두통, 답답함, 상열감(열이 가슴이나 머리로 몰리는 증상), 입 마름, 치밀어오름, 가슴 뜀, 목이나 가슴의 응어리 느낌, 한숨, 식욕 부진, 소화 불량, 만성 피로 등 신체적 변화가 동반된다. 과식, 과음, 흡연 과다, 욕설, 폭력 등 과격한 행동이 증가하기도 한다. 

화병에 잘 걸리는 사람이 있다. 책임감이 강하고 양심적이며 감정을 잘 억제하는 내성적인 사람이 그 부류에 속한다. 또, 쉽게 화를 내거나 화를 쌓아두는 사람도 해당한다. 이 부류에 해당하는 사람이라면 평소 명상, 등산, 화초 가꾸기, 음악 감상, 노래 부르기 등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해서 화병을 예방할 필요가 있다. 음주나 흡연은 스트레스 해소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체 리듬을 깨거나 다른 질병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피하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스스로 원인을 발견했다면 그 원인을 없애야 화병을 예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 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라면 대화로 풀어야 한다. 다른 방법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해소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채 분노가 그대로 누적될 수 있다. 또,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처럼 인위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같은 이유로 인해 동일한 스트레스, 억울함, 분노 등이 6개월 이상 지속되거나, 가슴에 열이 나면서 뭔가 뭉친 듯한 느낌이 2주 이상 지속되면 화병을 의심하고 병원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각 대학병원에는 스트레스 클리닉, 화병 클리닉 등 다양한 이름의 화병 치료 기구가 있다. 대부분은 전문의와의 상담만으로도 상당히 호전된다. 환자의 상태에 따라 웃음 치료, 미술 치료, 음악 치료, 운동 치료 등의 재활 프로그램이나 약물 요법으로 치료한다. 한의학에서는 격심한 스트레스를 간기울체(肝氣鬱滯)라고 표현한다. 간은 엉킨 것을 풀어주는 해독 작용을 하는데, 간이 해독할 수 없을 정도로 스트레스 양이 늘어나면 결국 간에 쌓인다는 것이다. 한방에서는 치료를 돕기 위해 먼저 향부자(香附子)를 처방한다. 또,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할 경우는 백자인(栢子仁)을 사용하기도 한다.

김종우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 화병센터 센터장은 “국민의 4%가 화병을 앓고 있다는 역학 연구 결과도 있다. 과거에 화병을 경험한 사람까지 합치면 전체 국민의 20%가 넘는다. 이는 적은 수치가 아니다. 또, 화병에 한 번 걸렸던 사람은 화병에 다시 걸릴 가능성이 더 크다. 심각하면 분노 관리(anger management)와 같은 심리적 치료나 항우울제 등 약물 치료를 받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갱년기, 단순 스트레스 증세라고 자가 진단을 내리고 화병을 방치하면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으므로 유의해야 한다. 조지 크로우소스 아테네 대학 의대 소아과 교수가 지난해 발표한 ‘스트레스와 스트레스 시스템 장애’라는 연구 결과에 따르면, 화병이 심장질환, 뇌혈관질환, 골다공증 등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으로 확대될 수 있다. 우리 몸은 자율신경계를 통해 일상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조절한다. 그러나 그 스트레스 정도가 극심하거나 잦으면 조절 능력의 균형이 깨진다.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잘 알려진 코티졸(cortisol) 등이 분비되면서 혈압 상승, 혈당 증가, 인슐린 저항, 복부 비만, 근육량 감소 등의 증세가 나타난다. 심하면 혈관 내부 세포가 손상되거나 염증 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는 심혈관질환, 뇌혈관질환, 골다공증, 수면무호흡증 같은 심각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화병을 진단하는 방법은 어느 정도 체계가 잡혀 있다. 신체적 증상과 같은 화병의 특이성을 분석해서 진단할 수 있다. 그러나 표준화된 치료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서양에서는 화병을 정신과적 분노 장애로 보고 이에 대한 치료법을 찾고 있다. 화병은 한국 사람에게 특이적으로 나타나는 질환인 만큼 한국의 정서와 문화를 반영한 치료법을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김도관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교수는 “한은 민족 고유의 정서라고 할 수 있다. 한에 기초한 정신의학적 장애가 화병이라면 우리 고유의 치료법을 개발해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 화병이 일으킬 수 있는 신체 반응①뇌·신경계두통, 절망감, 기력 감퇴, 슬픔, 신경과민, 분노, 성급함, 식욕 증가(감퇴), 기억력 장애, 집중력 장애, 수면 장애, 정신 건강 장애(공허, 걱정, 우울) ② 피부여드름 등 다양한 피부 장애③ 근육·관절근육통(특히 목, 어깨, 등, 허리), 골밀도 감소④ 호흡기계호흡 곤란, 과호흡 증후군, 공황 발작⑤ 간글로코스(glucose) 분비로 혈당 증가⑥ 심장심박수 증가, 고혈압, 콜레스테롤 증가, 심장 마비⑦ 위장구역, 위장 통증, 속쓰림, 체중 증가⑧ 췌장당뇨 위험 증가⑨ 소장·대장설사, 변비, 기타 소화 장애⑩ 생식기여 : 생리 불순, 생리통, 성욕 감퇴, 남 : 발기 부전, 정자 생산 능력 감소, 성욕 감퇴⑪ 면역체계 면역력 약화, 회복 능력 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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