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상 판 바꾸는 ‘G 유전자’의 대혁명
  • 김진령 (jy@sisapress.com)
  • 승인 2010.02.23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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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그동안 잠잠했던 한국의 스피드스케이팅이 힘차게 폭발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왔던 쇼트트랙의 선전도 이어지고, 금메달 획득 가능성이 누구보다 큰 김연아 선수의 금빛 점프도 기다리고 있다. 세계를 놀라게 하는 빙상 대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한국 빙상 스포츠의 대도약을 선두에서 이끄는 주역은 이른바 ‘G세대’로 불리는 20대 초반의 선수들이다. 자유분방한 사고로 무장한 그들은 자신감이 충만하며 경기를 즐길 줄 아는 젊은이들이다. 밴쿠버에서 화려하게 꽃핀 그들의 경기력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 배경을 들여다보았다.

서프라이즈(surprise)! 빙상이 온 국민에게 흥분과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들이 그동안 체격적으로 불리하다고 여겨져왔던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깜짝 놀랄 만한 기록을 세우며 잇달아 금메달을 따냈다. 전통적인 강세 종목인 쇼트트랙과 피겨 등에서도 세계 정상급이다.

우리나라는 1992년 알베르빌 대회 때 쇼트트랙에서 처음으로 금메달 2개를 딴 이래 지난 2006년 토리노 대회 때까지 따낸 금메달 17개 모두가 쇼트트랙 한 종목에서만 거둔 성과라 동계 스포츠 강국이라는 표현이 겸연쩍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적어도 두 종목 이상에서 금메달을 따고 종합 순위 10위 이내에 드는 진정한 동계 스포츠 강국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 밴쿠버 대회 초반을 휩쓴 스피드스케이팅은 대회 중반을 장식하고 있는 쇼트트랙과 대회 말미를 장식하는 피겨와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체력적으로 서양인이나 흑인을 따라갈 수 없다는 동양인 콤플렉스는 이들 젊은 피들에 의해 사실무근의 편견에 불과했음이 증명되었다. 밴쿠버의 얼음판을 누빈 스무 살 안팎의 대한민국 젊은 피는 배고픔을 참고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인생 다 걸기에 나선, 그래서 우승 뒤에는 자기 설움에 북받쳐 대성통곡하던 과거의 금메달리스트와 달랐다. 이들은 승리를 확인한 뒤에는 환호하고 춤을 추며 즐거워했다.

 

이승훈(1988년생), 이정수(1989년생), 모태범(1989년생), 이상화(1990년생), 김연아(1990년생), 성시백(1987년생) 등은 스피드스케이팅, 쇼트트랙, 피겨 등에서 글로벌 시대에 한국인이 체격이나 실력에서 전혀 꿀릴 것이 없다는 점을 이번 대회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들을 흔히 ‘G(Global)세대’라고 부른다.

전용배 동명대 스포츠경영학과 교수는 김연아 또래 G세대의 특징으로 “이미 글로벌화되어 있어 밖에 나가도 주눅들지 않고 자신감이 있는 세대이다”라고 정의했다. 그는 이들의 성공 포인트로 ‘자신감+국가주의적 동기 부여+체력 향상’을 꼽았다. 과거에는 국제 대회에 출전한 한국 선수들에게 실력보다 성적이 안 나온 경우도 있었지만, G세대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스스로 흥이 올라 하는 경우가 많아 기대 이상의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주목되는 부분은 국가주의적인 동기 부여이다. 한 스포츠 단체 관계자는 “선수들이 사육에 가까운 하루 12시간이 넘는 훈련을 견디게 하는 힘은 결국 국가가 제시하는 명예와 돈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우리 대표팀 44명 중 모태범 선수나 이승훈 선수 등은 싸이클 선수보다 더 허벅지가 두껍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근육이 발달되어 있다. 지독하게 훈련을 한 결과이다.

우리나라는 국가가 주도하는 엘리트 스포츠 정책을 펴는 대표적인 국가이다. 지난 10년간 생활 스포츠 정책을 펴다가 정권이 바뀌면서 다시 엘리트 스포츠를 강화하는 쪽으로 돌아서고 있다.

지난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박태환 선수가 수영에서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시청하며 환호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사진이 보도되었을 때 전용배 교수는 “이 사진 한 장으로 생활 체육을 강조하던 흐름이 바뀌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촛불 시위 여파로 어려움을 겪던 현 정부에게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단의 선전은 호재였다. 실제로 이후 스포츠과학연구원의 연구 분야가 생활 체육을 지원하는 것 위주에서 엘리트 스포츠 위주로 바뀐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1970~80년대의 엘리트 스포츠 시대로 되돌아가기에 우리는 이미 너무 멀리 와 있다. 선수들 자체가 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과학연구원에서 9년째 재직하고 있는 성봉주 책임연구원(스포츠생리학)은 “선수들이 예전에 비해 개인적인 성향이 강해지고 즐겨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다. 자신감도 넘친다. 팀워크 정신은 약해졌지만, 스스로 챙기고 준비하는 정신이 강해졌다. 힘든 상황도 즐겁게 받아들인다. 예전에는 2, 3등 자리에 올라가면 고개를 숙였는데 요즘은 2등, 3등을 해도 기뻐하고 세레머니를 한다”라며 G세대 선수들의 특징을 설명했다.

 

▲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에서 눈부신 성적을 거둔 모태범과 이상화, 이승훈(왼쪽부터). ⓒ연합뉴스
 

“올해는 국가주의 스포츠의 틀이 바뀌는 해 될 것”

스포츠계에서는 우수한 경기력을 보이기 위해 경기 종목에 따라 다르지만 체격을 포함한 체력, 기술, 정신력의 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들 삼박자가 최적화되었을 때 비로소 최고의 경기력을 선보인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정신력에 국가의 위상을 드높인 명예라는 식의 거대 담론이 자리 잡았지만 요즘은 그 자리에 ‘나의 즐거움과 행복을 위하여’라는 개인주의적 성향을 바탕으로 한 자신감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과거와 달라진 분위기는 방송 중계에서도 확인된다. 정권이나 방송사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지만, 이번 올림픽은 처음으로 ‘도배 방송’이 없는 대회로 기록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 세계적인 이벤트가 열릴 경우 공중파 채널이 모두 동원되어 하루 종일 같은 화면을 3~4개 채널에서 틀고 또 틀고 하는 일이 당연시되었었다. 이를 본 우리나라 사람은 ‘올림픽(월드컵)이 전세계인의 일상을 뒤흔드는 큰 이벤트’라고 생각(착각)하게 된다. 이런 방송 행태에 대해 수많은 미디어 학자들이 비판해도 정부나 방송사는 꿈쩍도 하지 않는 관행을 고수했다.

하지만 이번 동계올림픽 중계부터 정부나 방송사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돈이 해냈다. SBS가 100억원의 돈을 내고 중계권을 독식하면서 공중파 3사가 똑같은 방송으로 집단 최면 상태에 빠지던 ‘흥분의 도가니’가 깨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전용배 교수는 “SBS의 단독 중계가 국가주의 스포츠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올림픽에 과도한 방송 시간을 배정한 것은 한국과 중국뿐이었다. 일본은 월드컵 때 축구장보다 야구장이 더 붐볐다”라고 설명했다. 경기를 지켜보는 즐거움보다는 금메달에 더 목을 매는 시대가 저물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국가주의 스포츠 시대와 밴쿠버 대회가 아주 이별을 한 것은 아니다. 지금은 선진국형 스포츠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라는 진단이 더 정확하다.

전교수는 “김연아와 박태환으로 대표되는 피겨와 수영에 대한 열광은 아직도 남아 있는 식민사관의 흔적이다”라고 말했다. 종목에 대한 열광이라기보다는 서양인의 전유물로 여겼던 이 종목에서 우승한 김연아와 박태환에 대한 열광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짊어졌던 서양 콤플렉스가 컸는데 김연아와 박태환이 ‘우리도 너희들(서양)만큼 한다’라는 것을 보여준 것에 대해 열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연아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김연아는 세계 수준에서 보면 바닥권에 있던 국내의 피겨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 어느 날 느닷없이 세계 무대로 뛰어올라 챔피언이 되었다. 김연아는 피겨에 아무런 관심도 없던 사람까지 텔레비전 수상기 앞으로 끌어들여 발레와 클래식 음악, 피겨가 한데 어울린 ‘예술’을 경험시켰다. 

김연아가 여자 피겨스케이팅에서 세계 최고의 실력자라는 데에 의문의 여지는 없다. 뉴욕타임스 등 유력 해외 언론도 대회 전부터 김연아에 초점을 맞춰 기획 기사를 내보낼 정도이다. 테크닉 면에서 경쟁 선수에 비해 한 수 위라는 평가를 넘어서 예술적인 표현에서도 김연아가 최고 수준에 올랐다는 평이 나오고 있다.

국립발레단의 최태지 단장은 김연아의 빙판 위 연기가 ‘예술’이라고 말했다. 특히나 이번 시즌에 프리스케이팅 프로그램으로 선보인 조지 거쉬인의 <피아노 협주곡 바장조>는 첫선을 보인 순간부터 다른 경쟁자와 차원을 달리하는 선택으로 인정받고 있다. 클래식 음악평론가인 이성일씨는 “거쉬인의 곡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멜로디가 아님에도 김연아가 감각적으로 잘 살렸다. 이 곡을 이렇게까지 해석해 표현하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확실히 다른 선수들에 비해 김연아가 곡을 잘 고른다”라고 평했다. 김연아는 호아킨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이나 하차투리안의 <가면 무도회>,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등 피겨에서 즐겨 쓰는, 멜로디가 강하고 음색 대비가 선명한 곡 대신 대중적이지 않은 조지 거쉬인의 피아노 협주곡을 선택해 선곡도 예술이라는 평을 얻었다. 

하지만 이런 찬사가 많아질수록 김연아가 안게 되는 부담도 커지고 있다. 전용배 교수는 “김연아가 우승하면 가장 완벽한 그림이다. 하지만 피겨에는 변수가 많다. 미쉘 콴은 세계선수권을 다섯 번이나 제패했지만 올림픽에서 우승하지는 못했다. 올림픽에서는 의외의 인물이 우승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부담감이 크다”라며 과도한 기대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김연아가 테크닉에서 견줄 선수가 없고, 마인드 컨트롤도 잘하는 선수이지만 프리스케이팅 분야는 예술적인 측면을 다루기에 연기나 무용에서 절대적으로 수치화된 1, 2등을 구별해낸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결국, 김연아의 가장 큰 적은 쏟아지는 부담감과 스스로에 대한 마인드 컨트롤인 것이다.

모태범 선수는 5백m에서 우승한 뒤 “내 생일에 좋은 선물이 되었고, 국민들에게도 금메달이라는 선물을 드리게 되어 기쁘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국민에게 기쁨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G세대의 선두 주자인 김연아는 밴쿠버 대회의 결과에 관계없이 이미 국민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다. 김연아가 얼마나 가볍게 날아오를지 즐겁게 지켜보자.

 

▲ 최태지 국립발레단장

피겨스케이팅은 발레에서 많은 요소를 빌려왔다. 예를 들어, 다리를 뒤로 90˚ 올리는 동작을 아라베스크라고 하는데 이는 발레에서 그대로 들여온 것이다. 최태지 국립발레단 단장으로부터 김연아의 빙판 위 연기(춤)가 왜 우아하게 느껴지는지 들어보았다.

 김연아의 빙판 위 연기를 보면서 ‘이제 피겨도 예술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라베스크 동작을 발레리나처럼 우아하게 소화해내는 것을 보고 단원들에게 연아를 본받으라고 했다. 테크닉을 내세우면 표현력이 약해지는데, 연아는 테크닉과 표현력이 잘 결합되어 아름답고 우아하게 느껴진다. 마치 음악 속에 자기 몸을 던지고 있는 것 같다.

발레콩쿠르에서도 테크닉, 몸매, 음악성, 표현력(연기력)을 심사하는데 이 4가지를 김연아 선수는 잘 구현하고 있다. 발레는 눈빛부터 손가락 표현 하나까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 나오는 예술이다. 팔다리가 길어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우아함이 달라진다. 김연아는 자신의 몸을 어떻게 표현해야 우아해 보이는지에 대해 손가락을 펴는 동작까지 다 연구하고 있는 듯하다.

김연아가 캐나다의 유명한 발레리나 이블린 하트에게 발레 수업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발레계에 있는 사람으로서 김연아가 발레의 기조와 테크닉을 잘 받아들인 것 같아 기쁘고 자랑스럽다.

김연아의 연기는 발레로 치면 <차이코프스키>나 <신데렐라> 같은 스토리텔링이 있는 드라마틱한 발레이다. 우아하고 고급스러우면서도 감정 이입이 가능한, 그런 춤을 보여주고 있다. 김연아는 드라마틱한 스토리 안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발레리나이다..

 

 인종과 스포츠의 상관관계 (성봉주 / 국민체육진흥공단 체육과학연구원)

모태범 선수와 이상화 선수가 스피드스케이팅 5백m 결승에서 나란히 남녀 동반 우승을 하면서 인종별 경기력 차가 있는지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국인과 같은 황인종은 흑인과 백인의 특성 비교에 밀려 그동안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한국 선수들이 스포츠 일부 종목(하계 격투기 중심, 동계 쇼트트랙 중심)에서만 우수한 경기력을 인정받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수영, 역도, 배드민턴, 필드하키, 핸드볼, 피겨스케이팅 등 다양한 종목에서 가능성이 확대되어가고 있다.

스포츠에서 인종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흑인과 백인, 또는 동양인의 유전적 차이가 경기력에 얼마나 영향을 줄까? 지역과 경제적인 능력은 영향을 미친다고도 볼 수 있다. 따뜻한 곳에 주로 사는 흑인은 하계 종목에서, 추운 지방에 사는 백인은 동계 종목에서 좋은 결실을 보이고 있으나 선수 개인적으로 보면 인종별 특성 차이는 아니다. 한국 선수들이 단거리 스피드스케이팅에서 우수한 능력을 보인 것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스포츠에서도 인종 편견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예전보다는 많이 완화되어가고 있다. 미국은 흑인이 전체 인구의 12%를 차지하는 가운데 일부 스포츠 종목인 농구, 미식축구, 야구 등에서는 아직도 특정 포지션에 인종에 따른 차별적 자리 배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번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1천m에서 흑인인 미국의 샤니 데이비스가 금메달을 땄고, 황인종인 우리 선수가 스피드스케이팅 5백m에서 우승하는 것만 보아도 인종적 차이가 경기력을 좌우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종적으로 생활이나 문화 환경이 달라 유전적인 차이가 존재하지만 스포츠 종목에서 인종 자체로서 특성을 결정짓기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세계가 점차 다문화 사회로 가고 있어 원천적 특성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따라서 그 종목에 소질을 지닌 좋은 재목을 잘 선발해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훈련·관리하면 어느 종목에서나 최고의 선수로 키울 수 있다. 특히 스포츠과학의 발달은 인종적 차이를 더욱 줄여주고 있다. 이제 스포츠 경기력은 스포츠과학의 경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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