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는 ‘동혁이형’이 국민을 선동한다고?
  • 정덕현 | 대중문화평론가 ()
  • 승인 2010.03.16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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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개혁시민연대, <개그콘서트>의 ‘현실 풍자’ 내용에 문제 제기해 논란

 

▲ ‘동혁이형’ ‘남보원’ 등 세태를 풍자한 인기 코너로 가 부흥기를 맞고 있다. 왼쪽은 ‘동혁이형’.


우리나라 국기가 붙어 있는 깔깔이에 교련복 바지를 입고 조금 부스스한 머리칼에 안경을 낀 청년 하나가 무대에 선다. 가슴팍에는 마치 웨이터들이 붙이고 있는 것 같은 명찰에 ‘동혁이형’이라고 적혀 있다.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이 청년, 스스로를 ‘아름다운 개그 청년’이라 부르는 ‘동혁이형’이 거침없이 세상에 대한 항변을 쏟아낸다. “대학 등록금이 무슨 우리 아빠 혈압이야? 한 학기 올라갈 때마다 우리 아빠 주름살이 팍팍 늘어. 우리 아빠 얼굴이 무슨 번데기야?” 지자체의 호화 청사에 대해서도 쓴소리가 이어진다. “거기가 무슨 베르사이유 궁전이야?” 민자 유치로 계획된 지자체의 고층 시청사에 대해서는 “수익을 낼 것이라는데 시청이 무슨 복덕방이야?”라고 따끔한 일침이 날아간다. 공짜폰이라고 가입자를 유혹하는 휴대전화업체들에 대해서는 “이게 공짜폰이야? 월세폰이지” 하고 꼬집는다. 그렇게 거침없는 동혁이형의 말이 쏟아질 때면 가슴 한 구석을 억누르던 그 무엇인가가 와르르 깨어지는 속 시원함이 느껴진다. 웃음은 저절로 터져나온다.

‘동혁이형’의 이 ‘샤우팅 개그’는 수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어냈다. 그의 개그가 끝난 후에는 어김없이 실시간 검색어에 그의 이름이 올라가고, 그가 풍자한 내용들은 뉴스들은 물론이고 블로그를 통해 삽시간에 퍼져나간다. ‘동혁이형’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진짜 형’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마음속에는 ‘형답지 못한 사회’에 대한 불만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모두가 이 개그에 웃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방송개혁시민연대(이하 방개혁)’는 “방송을 통해 전달되는 ‘동혁이형’ 화법은 사회적 이슈에 대한 비유나 은유를 통한 해학, 풍자와는 거리가 있으며, 대중이 공감할 사회 문제를 직설적 화법으로 풀어가는 포퓰리즘을 기반으로 한 선동적 개그로 ‘개그를 그야말로 개그로만 볼 수 없게’ 하는 우려를 낳게 한다”라고 밝혔다. 심지어 이 단체는 이 개그를 보고 있으면 “국민이 천민(賤民) 혹은 폭민(暴民)화된다”라고까지 주장한다. 어쩌다 이런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었을까. 이런 주장은 방개혁이 개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 방개혁은 ‘동혁이형’의 주장들에 대해 “제도와 원칙을 무시한 대중적·선동적 언어가 난무한다”라며 현실 문제를 지극히 단순화시키기 때문에 “국민은 항상 피해자이고 정부와 기업은 가해자가 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잣대는 개그가 추구하는 목적을 과도하게 해석한 데서 비롯된 과잉 방어로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방개혁이 주장하는 과도한 해석, 즉 항간에는 소설에 가깝다는 그 과장들에 대해 많은 사람이 ‘개그는 개그일 뿐이다’라고 반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방개혁은 ‘개그는 개그일 뿐이며, 나아가 개그일 뿐이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데, 여기에 대한 반박도 ‘개그는 개그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딘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개그는 개그일 뿐일까.

비유나 은유로만 다루라는 주장까지 더해져 시끌

‘개그는 그저 개그’라는 말에는 개그에 대한 일종의 무시·천시가 들어 있다. 개그는 그저 개그가 아니고 현실을 담으며, 그래야만 가치 있게 살아남을 수 있다. 개그의 목적은 웃음이지만, 그 웃음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공감이 없다면 공허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그가 현실을 담지 말라고, 또 그것을 늘 우회하는 방식, 예를 들어 비유나 은유로 다루라고 하는 주장은 “웃기지 않는 개그를 하거나, 풍자의 대상에 대해 눈치를 보라”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웃음이 공감을 통해 형성된다는 점에서 사회 현실의 문제가 개그의 소재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개그는 시사 프로그램처럼 문제를 분석해 어떤 합리적인 대안을 내놓지는 않는다. 다만, 풍자라는 방식으로 억눌린 감정을 웃음으로 전화시킬 뿐이다. 따라서 방개혁이 우려하는 것처럼 개그맨이 외치는 사회 현안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안’을 현실적이라고 받아들일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은 한마디로 ‘동혁이형’이라는 비주류로 살아가는 자의 항변일 뿐이다. 이 개그가 웃음을 주는 것은, 현실적이지는 못해도 나름으로 ‘속 시원한 항변’을 하는 이가 바로 정치인이나 경제인이 아니라 개그맨이라는 사실에 있다. 풍자 개그는 이처럼 현실의 문제를 끄집어내 풍자를 통해 웃음을 줌으로써 주의를 환기하는 것이지, 실제 현실 문제에 대안을 던지는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웃음에서 현실 풍자가 갖는 공감이라는 틀은, 개그 같은 웃음의 예술이 사회에 무언가 기능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현실의 어떤 민감한 부분을 개그맨이 가상으로 흉내 내거나 비꼬고, 그것이 공감을 얻어 ‘빵’ 터지게 되는 그 순간, 많은 일이 벌어진다. 사회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사회 구성원들에게 부여하는 억압이 순간 해체되는 해방감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그 풍자를 통해 세상의 부조리를 깨닫게 되기도 한다. 굳이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부’에 해당하는 (위험할 수 있는) <희극>을 영원히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호르헤 수도사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웃음은 그만큼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태생적으로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사회적 부조리가 분노로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웃음으로 전화된다는 점일 것이다. ‘동혁이형’의 풍자 개그에 많은 사람이 갖고 있는 어떤 억압이 풀어지며 웃음을 주었다면, 그것은 어쩌면 개그가 제대로 작동을 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동혁이형’이 보여주는 것처럼 개그는 그저 개그일 뿐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풍자 개그의 웃음이 오히려 사회적인 안전장치로서 대중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지, 선동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만일 그것을 선동이라 여긴다면 웃음을 사회적 순기능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저 호르헤 수도사의 비극을 스스로 연출하는 셈이 될 것이다.

▲ 남성들이 인권을 주장하는 형식으로 세태를 풍자하는 ‘남보원’
개그의 웃음 원천은 내용에 있을까, 형식에 있을까. 어찌 보면 내용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형식과 마주쳐야 웃음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남성인권보장위원회’가 대표적이다. 그 내용은 남성들이 인권을 주장하고 외치는 것이지만 여기에 과장된 형식, 즉 문제를 제기하고 구호를 외친 후, 신파적인 배경 음악 위에서 구구절절 사연을 설명하다가 요술봉을 뾰로롱 하고 나면 상황을 반전시키는 이 형식이 붙여짐으로써 웃음이 만들어진다. 그만큼 설자리가 좁아진 남성들이 갖는 공감대, 그것을 극대화하기 위해 붙여진 시위라는 형식, 시위라는 것 자체도 그저 통상적인 것이 되어버린 정치권에 대한 풍자까지 겹쳐지면 이 코너가 주는 웃음의 스펙트럼은 다양해진다. 방개혁이 역시 ‘남보원’에 대해 문제를 삼는 것도 ‘동혁이형’의 경우와 이유가 같다. ‘개그가 개그일 뿐’이 아니고 그 시위의 형식이 현실을 자꾸 반추시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점, 즉 현실을 반추시키는 것 때문에 ‘남보원’이 재미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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