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출간’을 어찌 하오리까
  • 안성모 (asm@sisapress.com)
  • 승인 2010.03.16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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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풀어 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법정 스님이 입적하기 전날 남긴 유언이 미묘한 파장을 불러오고 있다. 그동안 법정 스님은 법문집과 명상집, 산문집, 여행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50여 종에 이르는 책을 저술했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수십만 독자의 관심을 끈 베스트셀러이다. 대표 산문집인 <무소유>는 1976년 첫 출간된 이후 올해 초 3판 82쇄가 나오기까지 3백만 부 가까이 팔려나갔다. 글쓰기를 전업으로 하는 ‘스타 작가’ 중에서도 이 정도의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는 저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스님의 입적 소식이 전해지자 교보문고 등 대형 서점들은 일제히 특별 코너를 마련했고, 이곳을 찾는 독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주문량이 폭주해 출판사가 책 공급을 제대로 못하고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법정 스님이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달라’라고 당부함에 따라, 앞으로 무소유 철학을 설파한 스님의 책을 만나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법정 스님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시민운동단체 ‘맑고 향기롭게’ 관계자는 “아직까지 깊은 논의를 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서 절판을 하도록 조치를 취하려고 한다”라고 밝혔다. 평소 법정 스님은 책 인세로 나온 돈을 불우한 이웃을 돕는 등 다양한 사회사업에 써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님은 인세가 들어오는 통장에 돈이 쌓이지 않도록 수시로 살폈다고 한다. 책 출간이 중단되면 이러한 사회사업을 진행하는 데 상당 부분 어려움이 뒤따를 것으로 여겨진다.

출판계도 어수선하다. 아직까지는 스님을 추모하며 말을 아끼고 있지만, 책 출간을 놓고 팽팽한 신경전이 펼쳐질 분위기이다. 출판계 한 인사는 “평소 책을 통해서 많은 사람과 인연을 쌓았다며 책에 대한 고마움을 지니고 계셨던 분인데, 그런 유언을 남겼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스님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법정 스님은 최근에 나온 신간에 대해 조언도 하고, 번역서 개정판 두 권을 더 낼 준비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다른 출판사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더 이상 법정 스님의 책을 찍지 않고 있다. 추가로 재판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절판된 책도 있다. 출판권도 다른 출판사로 옮겨간 상황이다”라고 밝혔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할 때, 법정 스님의 저서 출간을 둘러싼 논란은 향후 수면 위로 떠오를 가능성이 커 보인다. ‘맑고 향기롭게’ 관계자는 “유지는 명확하다. 절판이 되면 오히려 스님의 말씀이나 글이 자유롭게 전해질 수 있다고 본다. 유지를 받드는 분들이 상의해서, 어떻게 하면 스님의 정신을 계승할 수 있을지 논의할 것으로 본다”라고 밝혔다. 반면에 출판계 한 인사는 “출간 여부는 계약 관계로 이루어지는 만큼 당장에 절판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한평생을 ‘무소유’로 살다간 법정 스님의 유산을 두고 ‘소유권’ 다툼이 펼쳐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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