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 중인 회장님의 기막힌 변신술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10.03.23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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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은 ‘80년 진로 신화’를 무너뜨린 장본인이다.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인해 탄탄하던 회사는 지난 2003년 4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장 전 회장 역시 수천억 원 규모의 분식 회계 혐의로 구속되었다. 장 전 회장은 지난 2005년 2월 가족들과 함께 캄보디아로 떠났다. 이후 그는 캄보디아·태국·중국을 떠돌며 도피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주머니만큼은 가볍지 않았다. 차명 회사를 이용해 해외 곳곳에서 왕성하게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캄보디아 훈센 총리의 딸 훈마나의 보호까지 받았다. 장 전 회장의 화려한 해외 도피 생활 전모를 단독 추적했다.


해외 도피 중인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이 지난 8년간 캄보디아에서 이중 국적으로 생활한 사실이 <시사저널> 취재 결과 밝혀졌다. 장 전 회장은 지난 2002년 취득한 캄보디아 이름 ‘찬삼락’(Chan Samrach)으로 캄보디아 한인은행 ABA은행(아시아선진은행)을 운영했다. 이같은 사실은 <시사저널>이 입수한 장 전 회장의 캄보디아 여권과 ABA은행 의사록, 측근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되었다. 진로그룹이 지난 2003년 4월 법정관리에 들어간 점을 감안할 때 그 전부터 치밀하게 해외 도피를 준비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장 전 회장은 현재 세금 2백억원 안팎을 미납한 상태이다. 각종 금융 기관의 체납액과 벌금까지 합하면 수백억 원이 넘는 빚이 있다. 그럼에도 장 전 회장은 캄보디아 국적으로 아무 제약 없이 현지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캄보디아 프놈펜에서는 5층 건물 전체가 유흥주점인 술집까지 운영했다.

진로그룹은 지난 1997년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부도가 났다. 이후 채권단에 의해 화의 인가 결정을 받았지만, 결국 2003년 4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장 전 회장 역시 5천4백96억원을 사기 대출받고, 비자금 75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었다. 수차례 재판 끝에 장 전 회장은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5년형을 받고 풀려났다. 하지만 2005년 2월, 가족들과 함께 캄보디아로 출국했다. 익명을 요구한 장 전 회장의 한 측근은 “또 다른 비자금 문제가 불거지면서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이를 피하기 위해 캄보디아로 떠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 이후 장 전 회장은 기소 중지 상태로 해외를 떠돌았다.

이 과정에서 캄보디아의 권력 실세인 훈센 총리의 장녀 ‘훈마나(Hun Mana)’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상자 기사 참조). 장 전 회장의 캄보디아 여권 비상 연락망(In case of emergencies contact)에도 훈마나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지난 2005년에는 훈마나로부터 ABA은행 지분 51%도 넘겨받았다. 훈마나와 장 전 회장은 어떤 관계일까. <시사저널>은 주한 캄보디아 대사관에 공문을 보내 훈마나측의 입장을 전해 들으려 했다. 장 전 회장과의 관계가 무엇인지, ABA은행 지분을 소지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고, 장씨에게 은행 지분을 매각한 배경은 무엇인지 등이 질문 요지였다. 캄보디아 대사관측에서는 3월19일 현재 뚜렷한 답변을 하지 않고 추후에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ABA은행 설립에 관여한 장 전 회장의 측근들 역시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진로그룹 임원 출신이다.  

ABA은행은 지난 1996년 진로그룹에 의해 설립된 은행이다. 자본금은 1백30억원이다. 당시 진로그룹 직원들이 이 은행에 파견 근무를 나가기도 했다. 현지에서는 이 은행이 ‘진로은행’으로 통했다. 이 은행을 설립했던 이종수 사회연대은행 대표도 비슷한 증언을 한다. 그는 지난 3월18일 기자와 통화에서 “진로그룹이 은행 설립에 자금을 댄 것이 사실이다. 나도 당시 장진호 전 회장의 부탁으로 1년 여간 근무한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이 은행이 진로그룹 소유였다면 지난 2003년 법정관리에 들어갔을 때 채권단 관리 대상에 포함되어야 했다. 진로 채권단은 ABA은행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진로그룹이 직접 투자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지난 2005년 지분을 이전받기까지 장진호 전 회장 명의도 아니었다. 장 전 회장은 지난 2003년 국내 금융권이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당시 재판부에 재산 목록을 제출했다. 이 재산 목록에는 ㈜진로 및 계열사 주식, 한국창투 등 금융권 주식과 서울 종로, 경기 가평, 충남 등지의 땅이 전부였다. 장 전 회장은 ‘재산 목록을 허위로 작성했을 경우 처벌받기로 맹세한다’라는 내용이 포함된 서류에 서명하기도 했다. 이를 감안할 때 ABA은행은 그동안 차명으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시사저널>이 확보한 ABA은행의 2005년 11월29일 이사회 의사록에 따르면, 훈마나는 2005년 11월1일자로 대표이사직을 사임한다. 훈마나가 보유한 지분 50%를 장 전 회장의 이중 국적 이름인 찬삼락에게 이전했다. 이와 함께 기존 주주(50%)인 김 아무개씨도 찬삼락에게 1%의 지분을 넘겼다. 일련의 조치로 장 전 회장은 ABA은행의 최대 주주로 등장하게 된다. 의혹의 단초가 되는 훈마나 지분 취득 배경에 관심이 쏠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은행뿐 아니라 경견장·단란주점 사업에까지 손 뻗쳐

장 전 회장이 캄보디아에서 운영한 사업은 이뿐만이 아니다. 부동산 개발회사에서부터 경견장, 스몰카지노, 단란주점까지 운영했거나, 설립을 준비했다. 찬삼락은 지난 2005년 부동산 개발업체 KC&M을 설립했다. 이 회사는 찬삼락이 1인 주주로 되어 있다. 찬삼락은 지난 2006년 7월, 이웅렬 코오롱그룹 회장을 캄보디아로 초청했다. 연면적 10만㎡ 규모의 주상복합 아파트를 건립하는 ‘1500 프로젝트’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당시 장 전 회장의 자필 메모장을 보면 1500 프로젝트에 대한 그의 관심이나 기대는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허가 및 부지 매입 계획, 조직 구성, 자금 마련 계획까지도 꼼꼼하게 메모가 되어 있었다. 사업 계획서에도 장 전 회장만 알아볼 수 있도록 사업에 대한 구상들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 ①찬삼락과 측근인 김 아무개씨가 각각 지분 51%와 49%를 보유한다는 내용. ②훈마나가 ABA은행 CEO직 사임을 이사회에서 의결한다는 조항. ③ABA은행의 부실 채권을 조세 회피 지역에 있는 ㅊ사에 넘긴다는 내용.

장 전 회장은 금융 브로커로 알려진 김재록씨와도 사업을 추진했다. 김재록씨는 지난 2006년 정·재계를 뒤흔들었던 ‘김재록 게이트’의 주인공이다. 지금까지 김씨가 연루되었거나, 의혹이 제기된 사건만 해도 현대차 양재동 사옥 증축 인·허가 비리, 외환은행 헐값 매각, 대한생명 매각 등 여럿이다. 김씨는 방대한 정·재계 인맥을 통해 각종 인·허가 비리에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김씨의 인맥 고리는 장진호 전 회장도 피해가지 못했다. 장 전 회장의 측근에 따르면, 장 전 회장은 지난 2005년 김씨와 함께 소주회사를 설립하는 ‘55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설립 콘셉트는 순수 국내 자본으로 만든 가칭 ‘정통 우리 소주 회사’였다. 이같은 점을 감안할 때 장 전 회장은 진로의 법정 관리 이후에도 여전히 소주회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재록씨가 대표로 있던 ‘인베스투스 파트너스’의 사업 제안서에는 사업 계획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제안서는 ‘국내 주류업계가 모두 외국계 기업에 잠식당했다. 지방 소주업체들의 견제로 인해 그동안 진로가 누려왔던 독점적 지위가 상당 부분 약해질 가능성이 크다’라고 전망했다. 자금 조달 계획도 있었다. 예상 자금은 총 1천5백억원이다. 우선 2~3인의 투자자가 자본금 5백50억원으로 PEF(사모투자전문회사)를 구성해 회사를 설립한다. 이후 회사채를 발행하고 리스를 통해 추가로 자금을 마련해 2009년 초 거래소에 상장한다는 계획이다. 장 전 회장의 측근은 “당시 장 전 회장은 소주회사 인수도 고려했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소주회사를 보유하고 싶어 했다”라고 귀띔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대신 측근들을 이용해 차명으로 회사를 설립하는 데는 상당 부분 성공했다. 이 중에는 정보기술(IT)회사뿐 아니라, TV 프로덕션, 인력 송출회사, 유흥주점도 포함되어 있다. 일부 업체는 국내 대형 금융회사와 연계해 사업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소유권 다툼도 적지 않았다. 차명 회사이다 보니 측근들이 장 전 회장에게 소유권을 요구한 것이다. 지난 2006년 1월 캄보디아 프놈펜에 개장한 ‘더 블루’라는 술집이 한 예이다. 이 술집은 5층 건물 전체가 유흥주점으로 되어 있다. 자본금은 100만 달러이다. 한 측근은 “내부적으로 우리가 이런 것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라고 귀띔했다. 술집은 장 전 회장의 측근이었던 강 아무개씨 명의로 운영했다. 국내 유명 인사들이 캄보디아를 방문할 때에 이 술집에서 접대했다.

하지만 장 전 회장이 지난 2006년 말 캄보디아 재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대표로 있던 강씨가 갑자기 이 술집의 소유권을 주장한 것이다. 장 전 회장은 또 다른 측근인 송 아무개씨 명의로 소유권을 이전하고 현지에서 법정 다툼을 벌였다. 당시 소송에 관여한 한 관계자는 “이 일로 장 전 회장이 화가 많이 났던 것 같다. 반란을 일으킨 강씨 소유 재산을 모조리 다른 사람 명의로 돌려놓도록 지시했다”라고 귀띔했다.

국내에서 운영 중인 코리막스 역시 장 전 회장과 소유권 분쟁을 벌이는 경우이다. 이 회사는 이탈리아 명품 여성복 브랜드 ‘막스마라’의 한국과 홍콩 판권을 소유하고 있다. 국내 유명 백화점 대부분에 매장이 입점해 있을 정도로 알짜배기 회사이다. 하지만 지난 2007년 장진호 전 회장이 회사 대표인 정낙찬씨를 상대로 소유권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전체 주식 중 47.5%(19만주)에 대해서는 장 전 회장의 소유를 인정했다. 현재 항소심이 서울고법에서 진행되고 있다.

▲ 장진호 전 회장의 캄보디아 여권(왼쪽)과 중국 비자(오른쪽).

“세계 곳곳에 차명 계좌 보유”…현재는 중국 체류 중

장 전 회장이 지난 2003년 공개한 제산 명세서에는 코리막스 지분이 빠져 있다. 당시 장 전 회장은 진로 주식 및 계열사 주식과 부동산만 신고했다. 코리막스 지분은 자산 목록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장 전 회장의 측근들은 “소송을 통해 환수한 주식 47.5%는 채권자인 수협중앙회가 몰수했다. 이번 사건으로 장 전 회장의 차명 재산이 수면 위로 부상할 계기가 되었다”라고 설명했다. 이밖에도 TV 프로덕션인 니코조이플스타 역시 장 전 회장의 차명 회사로 알려지고 있다. 이 회사는 홍콩에 위치한 장 전 회장의 측근 고 아무개씨가 자금을 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동안 중국 방송사와 다큐멘터리 시리즈인 <동방의 빛>을 제작해 납품하기로 계약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하지만 지난 2006년을 전후로 대표이사가 이 아무개씨에서 신 아무개씨 명의로 바뀌었다. 장진호 전 회장은 해외 도피 중에도 이처럼 차명 회사를 통해 활발한 경영 활동을 벌여왔다. 한 측근에 따르면 현재 알려진 것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말한다. 장 전 회장은 그동안 각종 회사 설립 과정에서 한 곳의 계좌만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러 계좌를 돌려가면서 사용했기 때문에 현재 차명으로 운영되는 해외 계좌도 방대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관계자는 “조세 회피 지역인 버진아일랜드뿐 아니라 스위스, 미국 메릴린치에서도 현재 장 전 회장의 자금 흐름이 여러 차례 감지되었다. 방법이 은밀한 탓에 검찰이나 국세청 차원에서 수사에 나서지 않는다면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장 전 회장은 현재 중국에 머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최근 중국에서 게임 사업에도 손을 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캄보디아 생활이 쉽지 않을 것으로 측근들은 전하고 있다. 장 전 회장은 지난 2008년 카자흐스탄 바이저 캐피탈(Visor Capital) 그룹에 이 은행을 매각했다. 

장 전 회장은 당시 매각 사실을 부인하면서도 제3국에서 매각을 타진해왔다. 매각 자금 역시 메릴린치 계좌와 김 아무개씨 계좌로 곧바로 송금되었다. 이 일로 인해 캄보디아 정부와 장진호 전 회장 사이에 적지 않은 자금이 오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 은행 관계자는 “전형적인 ‘먹튀’이다. 은행을 매각했다면 세금 정산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바로 3국으로 송금했다. 이 일로 인해 현지 관리들이 많은 배신감을 느꼈다. 장 전 회장이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라고 설명했다.


<시사저널>은 해당 기사와 관련해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의 해명을 받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다. 장진호 전 회장의 개인 휴대전화로 전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전원이 꺼져 있었다. 장 전 회장의 측근들에게도 연락을 했으나 상당수가 장 전 회장과 결별한 상태라서 장 전 회장의 공식 입장을 들을 수는 없었다. 장 전 회장의 법률 대리인으로 알려진 고 아무개 변호사에게도 여러 차례 휴대전화 통화를 시도했다. 문자메시지와 함께 소속 법무법인의 사무실에도 메시지를 남겼지만 3월19일 현재까지 연락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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