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숨은 살인자’를 잡아라
  • 노진섭 (no@sisapress.com)
  • 승인 2010.04.06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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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트라우마’ 예방과 치료 / 예민하거나 감정 변화 심한 사람·친구 관계 적은 사람 등 ‘취약’

 

▲ 고 최진영씨의 유골이 3월31일 경기도 양평군 갑산공원 고 최진실씨 묘역에 나란히 안치됐다. 고 최진영씨 모친이 오열하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지난 3월29일 오후 2시쯤 배우 최진영씨(40)가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그의 사망 원인을 극심한 우울증과 스트레스로 추정했다. 그는 지난 2008년 10월, 누나 최진실씨가 자살하면서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그 여파가 장기간 지속되었음에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다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강한 정신적 충격은 정신과적 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 흔히 트라우마라고 부르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그것이다. 이를 방치하면 최씨처럼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달을 수 있다. 국내 인구의 10% 정도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트라우마는 생명을 위협받는 경험을 했거나 목격한 후 공포나 절망을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지난 3월26일 밤 해군 초계함 침몰 사고의 생존자들은 생명에 위협을 받았다. 또, 자식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실종자 부모들은 극한의 절망감을 느꼈다. 이런 대형 참사뿐만 아니라 천재지변, 화재, 전쟁, 신체적 폭행, 강간, 교통사고, 아동 학대도 트라우마를 유발한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평생 동안 강한 정신적 충격을 경험한다. 비근한 예가 배우자·부모·형제·자식 등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했을 때이다. 가족과 사별하면 정신적 충격을 받고 슬픔에 빠진다. 이를 애도 반응이라고 하는데,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1~2년까지 이어진다.

애도 반응이 과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죽은 사람이 보이거나 환상이 나타나는 병적 반응이 생기면 적절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식사를 하지 못하거나 잠을 자지 못하는 상태는 일반적인 애도 반응이지만, 그 기간이 길어지면 전문의를 찾아야 한다. 반대로 가족의 죽음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거나 슬픈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극도의 슬픔을 자제하면서 애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대부분은 그 상황을 잘 넘기지만 일부는 뒤늦게 감정을 폭발시키기도 한다. 이유라 서울시북부노인병원 정신과장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애도 반응이 과할 정도로 심하거나 약한 사람이 트라우마를 경험할 가능성이 일반인보다 크다”라고 말했다.

같은 상황이라도 개인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신적 충격의 강도가 다르다. 정신적 충격을 견디는 힘도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신경이 예민하거나 감정 변화가 심한 사람이 트라우마에 취약하다. 특히 기혼자, 종교를 믿는 자, 사회적 적응이 좋은 사람에 비해 미혼자, 경제적 약자, 친구 관계가 미흡한 사람, 쉽게 좌절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은 정신적 충격을 강하게 받는다고 한다. 이런 사람은 평소에는 정상적으로 보이지만 특정한 상황에 부닥치면 되돌릴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예방할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홍식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과 교수는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길로 가는 사람에게서 전조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우울하던 사람이 갑자기 명랑해지는 등 감정 기복이 심하거나, 죽음과 관련된 영화·책·이야기를 즐기거나, 현실을 초월한 듯한 말을 하거나, 평소 아끼던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등의 행동을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극한 상황으로 치닫기 전에 전문적 치료받게 해야

주변에 이런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극한 상황으로 치닫기 전에 미리 전문적인 치료를 받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얼마나 심각할 때 병원을 찾아야 할까. 공식화된 기준은 없지만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라면 병원을 찾아야 한다. 이홍식 교수는 “트라우마로 인한 우울증이 나타나면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심한 우울증 환자는 치료를 받지만 약한 우울증은 치료를 잘 받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방향으로 가는 경우는 심한 우울증이 아니라 약한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다. 심한 우울증 환자는 자살을 실천할 만큼 심신이 쇠약해진 상태이지만 약한 우울증 환자는 어느 순간 좌절감을 느끼면서 충동적으로 자살하기도 한다”라며 트라우마 치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병원 치료는 큰 맥락에서는 우울증 치료와 유사하다. 인지 치료, 행동 치료, 최면 치료, 집단 치료, 약물 치료, 신경 차단 치료 등이 있다. 그러나 이같은 치료는 보조적인 치료라고 한다. 전문의들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거나 환자의 의지가 없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홍진표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교수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항불안제를 사용하기도 한다. 일부 항불안제는 항우울제와 달리 중독성이 있다. 일시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해소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치료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남용하면 약물에 의존하는 역효과를 부르기도 한다”라고 강조했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은 병원을 잘 찾지 않는다. 정신질환으로 생각하지 않는 탓이다. 평소보다 강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뿐이라고 여기고 술에 의존하기도 한다. 홍진표 교수는 “술을 마시고 어떤 생각을 잊으려는 사람이 있다. 최진영씨도 최근까지 술을 자주 마셨다고 한다. 술이나 약물에 의존하는 것은 중독증 등 다른 질환을 일으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트라우마를 연장하는 역효과를 보인다. 또, 알코올로 인해 자제력을 잃고 자살과 같은 충동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과거에 집착하는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환자의 의지가 중요하다.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면 복식 호흡과 같은 이완 요법으로 곤두선 신경을 누그러뜨리는 것도 트라우마 예방법이다”라고 말했다. 

 ‘트라우마법’ , 발의는 되었으나 회부는…

2001년 뉴욕 무역센터 테러 사건, 2004년 태풍 카트리나, 2008년 이라크 전쟁 등으로 수많은 사람이 생명에 위협을 느꼈다. 사망자 가족은 지금까지 트라우마를 호소하고 있다. 인구 8~9%가 트라우마를 앓고 있는 미국은 국립 PTSD센터를 중심으로 트라우마에 대한 관리 체계를 갖추고 있다. 정신과 전문의, 사회봉사자 등이 소속되어 있으며 지역 병원과 건강보건센터 등과 연계해서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미국 연방재난관리청(FEMA)도 대규모 재난 피해를 당한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정신건강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스태포드법(stafford act)에 근거를 두고 있다. 대형 재난이 발생했을 때 연방 정부가 신속하게 지원할 수 있도록 제정된 법이다.

한국도 이른바 트라우마법을 추진하고 있다.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 정동영 의원은 용산 참사 등 공권력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해를 입었을 때도 보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면서 지난해 12월 트라우마법을 발의했다. 정의원은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은 심할 경우 자살까지 가는 2차 피해를 입는다. 국가배상법 등이 있지만 위자료 형태의 보상 규정만 있을 뿐 정신적 피해 치유에 대한 지원 방안은 없어 이 법안을 발의했다”라고 말했다.

이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공권력 피해자의 정신적 피해 회복에 대한 최초의 법률적 근거가 마련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 법률안은 회부조차 되지 못한 상황이다. 정의원은 “보건복지위원회 소관으로 의견을 올렸지만 아직 회부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사이에 피해자의 정신적 상처는 깊어가고 있다. 이 법이 통과된 상태라면 이번 해군 초계함 침몰 사고 피해자나 실종자 가족 등이 입은 정신적 충격과 피해에 대해 국가가 정신적 상담, 의료 서비스, 구조, 전담센터 등의 지원을 할 수 있었을 것이어서 더욱 안타깝다. 4월 중 상임위원회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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