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과부’에 뚫린 푸틴의 보안 체제
  • 조홍래 | 편집위원 ()
  • 승인 2010.04.06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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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지하철 여성 자살 폭탄 테러로 초긴장 국면…메드베데프 대통령도 궁지 몰려 ‘철권 통치’ 흐름 강화될 듯

 

▲ 3월29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잇달아 터진 지하철 테러 현장에서 경찰이 조사하고 있다.. ⓒAP연합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는 대통령직을 2기 역임한 철권 통치자이다. 그가 남자도 아닌 여성 테러단 때문에 골머리를 않고 있다. 지난 3월29일 모스크바 중심가의 두 지하철역에서 강력한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해 39명이 죽고 100여 명이 부상했다. 이번 테러는 체첸과 북카프카스 등 러시아 남부에서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검은 과부’(black widow) 테러단 소속인 두 명의 여성에 의해 자행되었다. 이들은 폭약이 장착된 허리띠를 차고 승객이 밀집한 지하철 객차에서 자폭했다. 검은 옷을 입고 테러를 감행해 ‘검은 과부’ 테러단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이들의 테러는, 분리 독립을 원하는 반군과 테러 조직을 발본 색원했다고 선언한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의 허를 찔렀다. 그는 앞으로 반군과 테러 조직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것으로 보여 가뜩이나 스탈린 시대로 회귀하는 그의 권위주의 통치는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여성 자살 폭탄 테러의 공포는 금세기 초부터 러시아를 괴롭혔다. 진 바지에 검은 상의를 입은 여성 테러리스트들은 모스크바 일원에서 16건의 자살 폭탄 공격을 자행했으며 이 중 두 건은 비행기에서 발생했다. 이들 여성 자폭단(female bomber)이 처음 등장한 것은 체첸 전쟁 때였다. 당시 러시아군의 총격으로 남편을 잃은 한 여성은 폭탄을 안고 러시아군 사령관에게 돌진해 자신도 죽고 사령관도 죽였다. 이것이 검은 과부 테러단의 기원이었다. 이들은 음악회, 군중 집회장 등으로 점차 활동 지역을 넓혔다. 러시아 역사상 최악의 테러 사건이었던 모스크바 극장 폭파 및 학교 인질 사건에도 이들이 가담했다. ‘검은 과부’의 영광을 처음 차지한 사람은 1985년 트럭을 몰고 이스라엘 병영으로 돌진한 16세의 팔레스타인 소녀였다. 1991년에는 인도의 라지브 간디 총리가 스리랑카의 ‘타밀 호랑이’ 테러 그룹과 연계된 여성 테러 그룹 ‘낙원의 새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여성에 의한 자살 폭탄 수법이 체첸 전쟁에 처음 도입된 것은 1994년부터 1996년 사이였다. 그 후 한동안 뜸하던 자살 공격은 2000년에 다시 등장해 27명의 러시아 특수 군인들을 죽였다. 2002년 10월에는 모스크바 극장에 침입해 41명의 인질 가운데 19명에게 폭탄을 장착한 후 군과 대치하던 중 수면 가스를 주입한 소탕 작전으로 검거되었다. 2004년에는 40대와 20대의 이혼녀들이 국내선에서 폭탄을 터뜨렸다.

이들이 자살 테러범이 된 배경은 복잡하지만 공통적인 요인은 러시아 군인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 그리고 삶에 대한 의욕 상실이다. 정부군의 공격으로 남편, 아이, 가족을 잃고 더러는 강간까지 당한 이들은 거의 맹목적으로 자살 폭탄 공격에 인생을 던진다. 2003년 모스크바 카페에 폭탄 가방을 설치한 22세의 체첸 출신 여성은 남편이 암살된 후 복수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심리학자들은 여성의 복수심이 남성보다 더 집요하고 강인하다고 말한다.  

체첸 등에서의 반군 활동 재개 등 테러 위협에 주목

▲ 모스크바 시민들이 3월29일 첫 폭발이 있었던 루비얀카 지하철역 밖에서 폭탄 테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촛불을 켜고 있다 ⓒAP연합

오슬로에 있는 국제평화연구소의 러시아인 교수 파벨 바에프는 지하철 폭파 사건은 일과성 단일 사건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될 일련의 연쇄 폭탄 테러의 전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모스크바 카네기센터의 분석가 안드레이 말라센코는 이 사건이 러시아 심장부에서의 지하드(성전)의 시작을 알리는 징후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푸틴의 강경 조치도 뒤따를 전망이다. 푸틴은 사건 후 테러 분자들을 기어코 섬멸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2004년 일련의 테러가 발생하자 정부 조직을 전면적으로 개편하고 권력을 크렘린으로 집중시켰다. 러시아 당국은 ‘검은 과부’들이 체첸과 그 인근의 카프카스 산악 지대에서 왔다고 지적하면서 테러 규모나 대담성으로 미루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푸틴은 테러 근절을 위해 지방 정부 관리들의 선거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에 의한 임명제로 바꾸는 등 야당 성향의 후보들이 연방의회에 진출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봉쇄하는 한편 정보 기관들의 권한을 강화했다. 그래서 스탈린이 부활했다는 야유까지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푸틴이 전면적인 정치 탄압으로 갈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지나친 탄압이 역작용을 불러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푸틴은 대통령 시절 축적한 자신의 인기가 아직 살아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최근 경제 위기로 정부의 신뢰가 추락하고 주요 도시에서 반정부 시위가 자주 일어나는 것이 심상찮다. 반정부 세력이 아직은 미미하나 갈수록 지지층을 넓히고 있다.

모스크바 지하철은 세계에서 가장 보안 체계가 잘된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런 곳이 테러 조직에 뚫렸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파장을 수반한다. 시민들은 툭하면 테러 공격이 일어났던 1990년대 초를 회상한다. 무슬림 반군의 활동은 최근 수그러들었다. 2009년 4월, 크렘린 당국이 심지어 체첸에서의 반테러 작전이 종료되었다고 공식 발표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2009년 11월, 테러리스트들은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던 호화 열차를 공격해 26명을 죽게 했다. 지난 2월에는 체첸 반군 지도자 도쿠 우마로프가 인구  밀집 지역에 대한 강력한 테러를 위협하기도 했다.

2008년 취임한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반군에 대한 접근을 달리 했다. 그는 테러리스트들은 단호히 소탕하되 그들을 테러 활동으로 몰아넣는 빈곤과 정부의 무능을 척결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카프카스 지역을 방문한 자리에서 푸틴의 비타협적 정책을 은근히 비난하는 연설도 했다. 카프카스 지역의 생활 수준은 열악하고 실업률은 높은가 하면 부패가 만연되어 있다. 이런 환경이 극단주의를 낳는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러나 지하철 테러로 그의 접근법은 명분을 잃었다. 푸틴의 정당인 통일러시아당 관계자들은 테러를 종식할 단호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의회 안보위원회 의장은 테러 발생을 막지 못한 정보 당국을 질타하면서 관계자를 문책하고 법률을 강화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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