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보가 우리에게 던진 것
  • 소종섭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10.04.13 15:0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또래의 독자들은 기억하겠지만 1980년대는 대자보의 시대였습니다. 대학 교정 곳곳에 대자보가 넘쳐났습니다. 담벼락, 창문, 계단…. 틈이 있는 곳, 학우들의 눈에 띌 만한 곳에는 늘 대자보가 있었습니다. 군사 정권과 그 아류로 이어진 권력의 강압 통치 흐름 속에 대자보는 작은 저항의 몸짓이었습니다. 언로가 제한된 가운데 그것은 당시 신문·잡지이자 TV였고, 인터넷이었습니다. 동료 학생들의 의식을 깨우는 죽비였고, 정권을 향해 던지는 칼과 같았습니다.

당연히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혹시 누군가 내가 대자보를 붙이는 것을 관찰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내가 이 대자보를 썼다는 것을 누가 밀고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떨쳐야 했지요. 그전보다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눈앞의 일을 알 수 없는 것이 그 시대였습니다. 때로 대자보는 논쟁의 중심에 서기도 했습니다. 견해를 달리하는 세력들이 서로 공박하고 토론하는 토론장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서로 감정이 격해져 상대의 대자보를 찢어버리고 자신들의 대자보만 남겨놓는 일들도 벌어졌지요. 이런 측면에 주목하면 대자보는 학내 권력 투쟁의 단면을 보여주는 현장이었습니다.

한동안 잊었던 대자보를 최근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고려대를 비롯해 서울대, 이화여대 등 여러 대학에 붙은 대자보가 화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학이 상품을 만들어내는 곳으로 전락했다’라는 그들의 문제 제기는 절규에 가깝습니다. 극한 경쟁에 내몰리면서도 막상 졸업하면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오늘의 대학생들이 토해내는 대학과 사회에 대한 항변입니다. 모든 것을 효율과 생산성으로만 재단하려고 하는 기성세대들에 대한 도전의 몸짓이기도 합니다. 이런 흐름은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서구식 가치관이 다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화제가 된 글이, 인터넷에 올린 글이 아니라 종이에 매직으로 써서 붙인 대자보였다는 점이 상징적입니다.

최근 고려대에서는 한 학생이 자신이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내용의 대자보를 붙여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준 고려대 교수는 ‘학생들의 개방성과 공유’라는 관점에서 현상을 설명했습니다. ‘자퇴 대자보’ 사건은 물론, 자신의 약점을 솔직하게 공개하고 잘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뜻을 동료들에게 전하는 용기를 낸 이번 사건을 보며 학생들의 달라진 문화를 실감한다는 것이지요.

<시사저널>은 이번 호에 ‘자퇴’로 상징되는, 대학을 떠나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중·고생들을 포함해 앞으로 이들처럼 ‘다른 선택’을 하는 학생들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사회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넓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