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한 비극으로 끝난 ‘담대한 화해와 용서’의 발걸음
  • 조홍래 | 편집위원 ()
  • 승인 2010.04.20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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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추락 사고로 숨진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의 발자취 / 슬픈 역사를 온 몸으로 살아온 ‘폴란드의 혼’

 

▲ 비행기 추락 사고 현장을 찾은 도널드 투스크 폴란드 총리(왼쪽)를 푸틴 러시아 총리가 위로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는 증오의 시대에 태어나 화해를 추구한 사람이었다. 4월 초순의 주말,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 모인 추도객들은 40년 전의 과거를 떠올린다. 4월10일 러시아에서 추락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은 폴란드 역사의 명암을 가장 극명하게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와 같이 사망한 95명의 정부 요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폴란드의 슬픈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진정한 폴란드인이다.

그는 2005년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통령궁에 오기 전 그가 살던 곳은 폴란드 정치의 주류들이 살았을 법한 화려한 동네가 아니었다. 아내 마리아와 함께 수십 년을 동고동락한 집은 허름한 빈민가였다. 그의 가치관, 삶의 태도, 심지어 일상의 습관까지도 2차 대전 이전 폴란드인의 그것이었다. 옛 소련과 나치의 점령기에도 말살되지 않았던 강력한 문화와 전통 그리고 이것이 상징하는 폴란드의 혼을 그는 고수했다.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완고하고 수줍어하고 그러면서도 원칙에서는 단호한 60세의 이 지도자는 현대 유럽 정치에서 요구되는 융통성이나 이중성을 끝내 거부한 토종 정치인이었다. 

각료들이 미국의 미사일 방어 기지 건설을 반대했을 때 그는 만류했다. 폴란드의 유럽연합(EU) 가입에 반대한 리투아니아를 증오하지도 않았다. 함께 탄압의 역사를 견뎌낸 발틱해 연안 국가들을 형제처럼 여겼다.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손잡고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2008년 8월, 러시아가 그루지야를 침공했을 때도 그는 맨 먼저 달려가 난민들을 도왔다. 총탄이 쏟아지는 전장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전용기 조종사의 만류도 뿌리쳤다. 비극의 날, 짙은 안개 속에서 착륙을 지시한 것이 어쩌면 사고의 원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가 탑승한 비행기는 소련제 TU-154였다. 기체는 낡았으나 최근 수리를 마쳐 기능에는 이상이 없었다. 러시아 관제사들도 제 몫을 했다. 안개가 너무 짙으니 다른 공항에 착륙하라는 지시를 보냈으나 조종사는 무시했다. 결국 네 번째 착륙을 시도하다가 나뭇가지에 걸려 추락했다.

그는 폴란드에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안긴 독일과 러시아에 대한 증오를 망각하지는 않았으나 원한을 현실 외교에 투영하지는 않았다. 그의 담대한 외교는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비판도 따랐다. 그 중심에는 카친 학살 사건이 있다. 1940년 봄 카친 숲에서는 2만2천명의 폴란드인 전쟁 포로들이 소련의 비밀경찰(NKVD)에 의해 잔혹하게 처형되었다. 희생자들은 1939년 히틀러와 스탈린이 맺은 폴란드 분할 조약에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폴란드의 엘리트 집단이었다. 소련은 이 반인륜적 범죄를 줄곧 거짓말로 은폐하다가 마하일 고르바초프 시대에 와서 마지못해 시인했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그 후 바르샤바에 있는 카친 추도비를 방문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렇게 역사는 치유되는 듯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푸틴이 러시아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시계는 거꾸로 돌아갔다. 2007년 9월, 러시아의 한 관영 신문은 러시아인이 학살을 자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희생자 유족들은 이 사건을 유럽인권재판소에 제소했다. 그러나 희생자들의 명예는 복원되지 않았고, 관련 서류들은 문서보관소에 봉인된 채 아직 정의의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를 감안한다면 4월7일 바르샤바에서 거행된 카친 추도식에 푸틴이 참석한 것은 일대 사건이다. 두 나라가 마침내 증오의 강을 건넜다는 화해의 심벌로 평가되었다. 푸틴은 추도사에서 카친 학살은 스탈린 정권의 소행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는 그러나 러시아인 포로들도 폴란드 감옥에서 같은 운명을 맞았다고 토를 달았다. 이를 본 폴란드인들은 푸틴의 참회에 반신반의하면서도 러시아에 대해서 화해의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려던 순수한 마음이 또 다른 비극을 가져오리라고 예견한 사람은 없었다. 카친스키는 정부 요인과 육·해·공군 사령관 등 96명을 대동하고 러시아에서 열리는 카친 학살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스몰렌스크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했다가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추가했다.

▲ 4월10일 러시아 스몰렌스크 공항 인근의 비행기 추락 사고로 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 등 폴란드 정부 고위 인사 다수가 숨졌다. ⓒAP연합

폴란드·러시아 관계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

폴란드는 충격에 휩싸였다. 70년 전의 학살도 모자라 이번 추락 사건도 러시아의 음모에 의한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과거와 현재에 걸쳐 러시아가 폴란드에 끼치는 해악이 진정 너무하다는 분노가 터졌다. 그러나 조사 결과 조종사의 실수에 의한 단순 사고라는 잠정 결론이 나오면서 폴란드의 분위기는 진정되는 듯하다.

대통령과 요인들을 일순에 상실한 폴란드가 동요하지 않고 비교적 차분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다. 사건 직후 러시아의 푸틴이 보인 적극적 자세도 돋보인다. 두 나라가 이 비극을 화해와 용서의 계기로 삼는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1984년 프랑스와 미테랑과 헬무트 콜의 화해 악수가 오늘의 유럽 통합을 꽃피운 계기가 된 것처럼, 또한 1970년 빌리 브란트가 바르샤바 빈민가를 방문함으로써 폴란드-독일 관계를 재건한 것처럼 폴란드의 전도에는 어두운 역사보다는 밝은 역사가 더 많이 기다리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제 폴란드에 필요한 것은 프랑스나 러시아식 혁명이 아니라 미국식 혁명이어야 한다고 논평했다. 이는 무엇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창조하기 위한 현실적 개혁을 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낙원이 아니라 국가를 건설하는 좋은 헌법을 만드는 혁명, 또는 반 유토피아식 혁명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향후 바르샤바와 모스크바 관계가 어느 방향으로 갈지 단언하기는 어렵다. 양국 지도자들이 이 비극을 엄숙한 단합의 기회로 삼지 않는다면 96명의 영혼은 구천을 유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투스크 총리가 푸틴에게 “우리는 거짓을 화해로 바꿀 수 있다”라고 한 말을 곱씹어보면 희망은 보인다. 폴란드 경제는 성장세에 있고 이웃들과는 대체로 평화를 유지한다. 2011년에는 EU 순회 의장직을 맡고 2012년에는 우크라이나와 함께 유럽 축구대회를 개최한다. 전쟁의 폐허와 공산 통치의 압제도 극복한 폴란드가 이번 비극도 잘 극복하리라는 것이 모두의 기대이자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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