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식성 공룡’은 죽지 않는다?
  • 조명진 | 유럽연합집행이사회 안보자문역 ()
  • 승인 2010.04.26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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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증권감독원, ‘골드만삭스 사기 혐의’ 기소 후 내부에서 이견 나와…백악관에서도 “기소와 무관”

 

▲ 로이드 브랭크페인 골드만삭스 CEO. ⓒEPA
‘기업이 파산하는 것'은 이윤을 내지 못하기 때문이고, 은행이 문을 닫는 것은 빌려준 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빌린 돈을 갚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부실 기업은 자유 시장의 원리에 의해 망하는데, 운 좋은 부실 은행들은 감당 못할 손실을 내고도 구제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다. 경영 부실을 초래한 은행이라도, 초대형이고 정치권에 줄을 잘 서고 있는 은행이라면 경영에 실패하더라도 구제받을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이 글은 2008년 11월 필자가 한 매체에 쓴 글인데, 미국의 금융 위기 한파 때 살아남은 골드만삭스를 두고 한 말이었다. 2008년 월스트리트를 휩쓴 금융 위기는 보스턴 대학 로렌스코틀리코프 교수의 표현대로 ‘비밀 게임과 대규모 부패의 결과’였다. 그럼에도 월스트리트에서 살아남은 대형 은행들은 더욱 입지를 공고히 하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바로 그 중심에 골드만삭스가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4월16일 미국 증권감독원(SEC)은 골드만삭스를 사기 혐의로 기소했다. 골드만삭스는 근거 없는 기소라고 혐의를 부인했음에도 골드만삭스 주식은 당일 12.8%나 떨어졌고, 월스트리트와 세계 증시는 이 충격적 뉴스에 동반 하락하는 반응을 보였다. 왜냐하면 오바마 행정부가 본격적으로 월스트리트를 길들일 목적으로 골드만삭스를 기소한 것이고, 이를 시발점으로 다른 거대 은행들에 대해서도 표적 수사를 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감이 팽배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4일 뒤인 4월20일 SEC가 골드만삭스를 기소한 것에 대해서 내부적으로 이견을 보이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자, 골드만삭스를 덮었던 먹구름은 가시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람 임마누엘 백악관 비서실장은 블룸버그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골드만삭스에 대한 SEC의 기소에는 백악관이 관련되어 있지 않다고 언급했다. 골드만삭스에 대한 SEC의 기소가 오바마 행정부 차원에서 벌어진 것이 아님을 시사함으로써 월스트리트에 드리웠던 검은 구름은 사라지게 되었다.

골드만삭스가 사기 혐의로 SEC에 의해서 기소된 배경은 이렇다. 골드만삭스는 2007~08년 ‘주택 가격 하락’을 전제로 만들어진 복잡한 ‘파생상품’을 투자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지 않고 판매했다. 이후 미국의 주택 시장에서는 금융 위기를 초래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일어났고, 골드만삭스와 함께 ‘주택 가격 하락’에 베팅한 CDO(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 부채담보부증권)라고 불리는 파생상품을 만든 헤지펀드 폴슨앤드컴퍼니는 10억 달러를 벌었지만, 골드만삭스를 통해 이 파생상품을 구매한 기관투자자들은 10억 달러의 손실을 본 것이다. 이들 기관투자가들 중에는 8억5천만 달러의 손해를 본 네덜란드의 ABN AMRO 은행과 1억5천만 달러를 손해 본 독일의 IKB 은행이 있는데, 결국 이 두 은행도 자국 정부의 구제 금융으로 파산을 면했다.

전문가들은 SEC가 제기한 혐의는 금융 위기에 앞서 과열되었던 파생상품 시장과 관련해 오바마 정부가 더 많은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신호탄으로 본다. 다른 거대 은행에 대해서도 법적 조치를 취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백악관의 뒷받침이 없는 SEC의 수장인 메리 샤피로 의장의 결정이었던 것이 알려져 월스트리트는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 것이다.

SEC가 이미 메이도프의 폰지 사기를 알고도 묵인해 온 직무유기의 책임에 압력을 받아 오던차에 투명성을 보여주는 자구책으로 골드만삭스를 기소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다른 금융 규제 기관인 연방준비이사회와 재무부의 공조 없이 SEC가 한 발짝 앞선 행보를 보인 것이 월스트리트에 경고의 메시지를 주는 대신 오히려 웃음거리가 될 지도 모르는 형국이다.

▲ 미국 뉴욕에 있는 골드만삭스 빌딩에 성조기가 펄럭이고 있다. ⓒEPA

미국 행정부의 재무 관련 요직은 골드만삭스 출신들이 독식해 와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서고 1년이 지났는데도 금융 위기의 책임자를 찾아내고 법정에 세우는 일에는 미진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월스트리트를 길들일 필요성은 느끼지만, 취임 이후 공언해 온 금융 구조조정에는 진척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번 SEC가 빼든 칼이 골드만삭스를 포함한 미국의 대형 은행들에게는 날카롭게 느껴지지 않은 듯하다.

사실 그동안 미국 행정부의 재무 관련 요직은 골드만삭스 출신들이 독식해왔다. 골드만삭스 출신 인사들을 보면, 골드만삭스 회장을 역임한 루빈 재무장관과 볼튼 백악관 비서실장이 있다. 볼튼 비서실장은 골드만삭스의 CEO였던 행크 폴슨을 재무장관으로 부시 대통령에게 천거한 인물이다. 부시 행정부에서 국무차관을 역임한 로버트 졸릭은 골드만삭스의 대표이사직을 맡았고, 네오콘의 핵심 인물인 월 포비치 후임으로 2007년부터 세계은행 총재를 맡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부시 행정부의 마지막 재무장관인 행크 폴슨이 자신의 출신 은행인 골드만삭스를 위해 한 가장 큰 업적(?)은 리만브러더스의 몰락을 방관하고 동시에 7천억 달러의 구제 금융 중 1백30억 달러를 수혈해 골드만삭스가 이득을 보게 도와준 것이다.  

‘너무 커서 망하지 않는다’라는 미국 금융 기관들의 생존 생리를 파헤친 앤드류 소르킨의 베스트셀러 <Too Big to Fail>의 주장이 사실임을 골드만삭스의 경우를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금융계의 귀재로서 골드만삭스는 마이크로소프트나 스타 벅스보다도 브랜드 가치가 높은 기업이다. 이번 SEC 기소를 통해서 투자은행으로서의 명성에 흠집이 난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오일과 금 사재기처럼 수익성이 있는 사업이라면 마구잡이로 손을 대는 ‘잡식성 공룡’ 골드만삭스는 월스트리트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금융 기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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