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반전’ 가능할까
  • 고유환 |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
  • 승인 2010.05.04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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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남북 관계, 위기 이후에 대화로 국면 전환…천안함 진상 규명에 따라 요동칠 듯

▲ 지난 4월24일 인양되어 모습을 드러낸 천안함의 함수 부분. ⓒ연합뉴스

천안함 침몰 사건에 북한이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언급되는 가운데, 간첩 사건이 발생했고, 금강산 관광지구 내의 남측 정부 부동산이 몰수되고, 민간 자산들에 대한 동결 조치가 있었다. 남측 대통령에 대해 ‘역도’라는 표현이 다시 등장하는 등 남북 관계는 다시 냉전 시대를 방불케 하고 있다.

전례에 따르면, 남북 관계는 위기 이후에 국면 전환을 위한 대화가 있었다. 1983년 아웅산 테러 폭발 사건 이후인 1984년에 남북 경제회담, 남북 적십자회담 예비회담, 남북 국회 예비회담, 체육 회담, 교향방문단 및 예술단 교환 방문 등 이른바 ‘제2 대화 시대’라 부를 만큼 각종 대화와 교류가 이루어졌다. 1998년 8월 북한의 장거리 로켓(광명성 1호, 대포동 1호) 발사 이후에 북·미 대화가 진전되고 1999년 가을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를 위한 페리 프로세스가 만들어진 전례도 있다. 1999년 6월에 있었던 1차 서해교전 이후인 2000년 6월에는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

북한은 전통적인 협상 전술의 하나로 ‘충격 요법을 통한 국면 전환’을 꾀해왔다. 역대 남한 정부들도 장기적인 남북 경색을 부담스러워하면서 위기 이후 대화를 통한 평화 정착에 힘써왔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최근 류우익 주중 대사의 워싱턴 체류(4월18~21일) 중에 무언가 국면 전환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들이 일부 언론에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류대사측은 이번 워싱턴 방문을 “세계지리학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개인적인 방문이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류대사가 워싱턴에 머무르는 동안 박인국 주유엔 대사, 한덕수 주미 대사, 임태희 노동부장관 등을 만난 것으로 알려지면서 ‘천안함 후속 대책 협의설’과 ‘정상회담 추진설’이 나오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천안함 사고에 북한이 개입한 것으로 확인될 경우, 후속 대책을 위해서는 동맹 관계에 있는 미국의 협조가 절실하다는 점, 외교적 제재를 위해서는 유엔 안보리의 의사 결정이 있어야 한다는 점 등을 감안할 때 류대사가 주미 대사, 주유엔 대사를 잇따라 만난 것은 천안함 사고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매일경제 4월28일자)라는 분석 기사를 내놓기도 했다. 또 다른 쪽에서는 ‘류대사의 방미와 관련해 남북 정상회담 재추진설’(프레시안 4월28일자)도 제기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대북 정보 분석 업무를 맡고 있는 김숙 국정원 1차장과 이계훈 공군참모총장이 같은 시기 워싱턴을 방문함으로써 정상회담 재추진과 관련된 가능성은 더 크게 불거지고 있다.

지난해 북한이 시도했던 남북 정상회담 추진은, 정상회담에서 “6자회담에 복귀한다”라는 선언을 하는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 추론컨대 북측은 6자회담 복귀 선물을 남측에 주고 대규모 식량과 비료 지원을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북한은 정상회담에 대한 미련을 접고, 중국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있다. 나선시 개방 확대와 외자 유치 노력을 본격화하면서 남측 당국에 대한 비판을 다시 시작했다. 북한이 최근 북·중 관계를 중시하면서 6자회담 재개에 적극성을 보이는 것은, 남북 정상회담보다는 6자회담 복귀에 우선순위를 두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원인 규명 장기화하면 한·미 관계에도 악영향 우려

▲ 평양 제1백화점 앞 컴퓨터수치제어(CNC) 선전 포스터. 이 포스터는 김정은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AP연합

남북 정상회담 카드는 지난 2년여 동안의 남북 갈등을 일시에 해소할 수 있는 카드이다. 현재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지만, 남이나 북이나 정상회담 카드를 활용할 기회는 계속 엿볼 것이다. 하지만 천안함 사건에 대한 원인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정상회담을 추진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따라서 당장은 속도를 내기 어려울 전망이다. 천안함 침몰이 북한과 연루되었다는 증거가 나올 경우에 당분간 남북 갈등은 불가피할 것이고, 북한의 중국 의존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반면, 북한이 연루되지 않았다고 판명 날 경우에는 6자회담 재개를 위한 협상이 본격화될 것이다.

천안함 침몰 사건이 발생한 이후 한국 정부는 6자회담 추진을 유보할 것을 미국에 요청했고, 미국은 이를 수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과 미국은 ‘선 천안함 사건 원인 규명, 후 6자회담’ 방침에 대한 중국의 이해도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월 중국은 6자회담을 재개하기 위해 북·미 대화→6자 예비 회담→6자회담 개최로 이어지는 3단계 방안을 미국·일본 등 6자회담 참가국들에게 타진한 것으로 알려진다. 중국이 제안한 바와 같이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려면 먼저 북·미 양자 대화를 통해서 근본 문제 해결의 방향을 잡고, 6자 예비 회담을 거친 다음 본회담으로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지난해 말 미국 대북 정책 특별대표인 보즈워스 특사가 방북한 이후 추가 접촉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김계관 외무성 부상의 3월 미국 방문이 성사되지 못한 가운데 천안함 침몰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6자회담의 장기 공전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4월 초 중국 방문에 나서지 않은 것도 6자회담 재개를 위한 사전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천안함 침몰 사건 이후 미국과 중국은 남북 갈등이 고조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상황 관리에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 나라 입장에서는, 천안함 침몰 사건은 재래식 무기와 관련한 국지적 사건이다. 반면에 북한 핵 문제는 대량살상무기(WMD) 확산 방지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글로벌 이슈이다.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6자회담 추진을 유보했지만, 미국으로서는 북한의 핵능력 향상을 장기간 방치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고민은 천안함 침몰 원인 규명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데 있다. 미국으로서는 천안함 사태로 미루어둔 북·미 추가 접촉을 포함해서 6자회담 재개를 무작정 미루어둘 수 없다. 하지만 물증을 찾지 못해 미궁에 빠질 경우 유엔 안보리 회부 등 대응 방안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천안함 사건이 조기에 해결되지 않으면, 한반도를 둘러싼 상황은 또 다른 방향으로 요동칠 수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천안함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이명박 정부는 ‘천안함 사건이 규명되지 않으면 6자회담과 남북 관계는 없다’는 식으로 강경 입장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천안함 사건이 장기화될 경우 남북 관계는 물론 한·미 관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명박 정부는 이번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대북 정책을 재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대북 정책의 그랜드 디자인을 구체화하고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과거 남북 관계가 악화 일로를 치달을 때마다 어김없이 대화 카드가 나왔듯, 대화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돌발 사태가 한반도 정세를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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