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사적지’를 사수하라
  • 고선주 | 광남일보 기자 ()
  • 승인 2010.05.11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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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전남도청 등 대표적 상징 공간들까지 철거 위기…민주화운동의 교육 장소로 보존 노력 지속해야

 5·18 광주 민주화운동 30주년을 맞은 올해, 5월도 이제 30대의 성년에 접어들었다. 5월에 관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세대이든, 그렇지 않은 5월 이후 세대이든 광주 민주화운동의 고귀한 역사 자취들은 영원한 보존과 계승이라는 숙제에 직면하고 있다.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그 자취와 흔적들은 반드시 유·무형적 원형 보존을 원칙으로 하되, 설령 변형이 가해지더라도 조금 덜 변화되도록 하는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 최근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던 전남도청 별관은 아시아문화전당 건립과 맞물려 철거냐, 보존이냐로 몸살을 앓은 바 있다. 

▲ 광주시 금남로에 위치한 옛 전남도청. ⓒ시사저널 임준선

5·18 광주 민주화운동 사적지는 옛 전남도청을 비롯해 5·18 민주광장, 금남로, 구 상무관, 광주MBC 옛터, 광주YWCA 옛터, 광주YMCA, 5·18 민주화운동의 발원지인 전남대 정문, 광주역 광장, 최초 발포지인 광주고등학교 앞 등이 대표적이다. 또, 양동시장을 비롯해 주남마을 인근 양민학살지, 광주교도소, 망월동 5·18 옛 묘지 등도 5·18 민주화운동의 상징 공간이자 건축물로 꼽힌다.

이 가운데 5·18의 대표적 상징 공간이자 건축물은 옛 전남도청이다. 이곳은 5월27일 새벽 계엄군의 무력 진압에 맞서 싸운 시민군의 최후 결사 항전지로 많은 시민군이 산화한 대표적인 5월 사적 공간이다. 흔히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정리할 때 민주주의 정착, 통일 정신, 시민공동체 정신으로 그 가치들을 정립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세 가지의 출발지이자 핵심적 키워드 역할을 한 곳이라는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공간이다.

시민들이 실제적으로 군집해 대동 정신을 구현하는 데 결정적 산파 역할을 한 5·18 민주광장(옛 전남도청 앞 분수대)을 빠뜨리고 논의를 전개하기는 어렵다. 5·18 당시 분수대를 중심으로 연단을 구성했고 각종 집회를 열었으며, 항쟁 의지를 불태웠던 공간이다. 항쟁에 참여했던 시민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이 분수대 광장으로 모여 저항을 했으며, 대규모 ‘민족·민주화 대성회’를 열고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며 군사 통치 종식과 민주화를 촉구했던 곳이다.

‘광주’ 하면 금남로가 떠오를 만큼 금남로는 전국적으로도 상당한 인지도를 갖고 있다. 도심의 지명이지만 이처럼 수많은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곳도 드물다. 5·18 당시 격렬하게 저항했던 항쟁의 거리로 5월18일 광주가톨릭센터 앞에서 최초의 학생 연좌시위가 있었으며, 5월19일부터 수많은 시민이 끊임없이 모여들어 투쟁 의지를 불태웠던 곳이다. 5월20일 저녁에는 택시를 중심으로 100대 이상의 각종 차량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대가 이 거리를 메웠고, 21일 계엄군이 집단으로 발포하기 직전까지 30여 만명의 시민이 매일 운집해 군사 독재 저지와 민주화를 촉구했던 공간이다.

원형 사라지거나 변형 가해진 곳들 점점 늘어나

이와 함께 광주YWCA 옛터도 5·18 당시 광주YWCA 건물이 있던 자리로 이곳에서는 항쟁 기간인 5월24일부터 건물 내 신용협동조합 관계자들과 들불야학 청년들이 <민주시민회보>를 제작해 광주항쟁 소식을 전국에 알리는 동시에, 시민들의 희생을 막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대책회의를 수시로 가진 공간이다. 그래서 5월17일 새벽 계엄군이 옛 전남도청을 공략할 때 주요 공격 목표가 되었고 많은 시민군이 희생되었던 곳이다. 원래 금남로1가 전일빌딩 뒤에 위치했으나 현재는 유동으로 이전했다.

당시 외형은 찾기 어렵지만 그 면면한 역사적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할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군사 정권에 저항하는 반독재와 반유신 운동의 거점이었던 광주YMCA는 5·18 당시 항쟁 지도부가 자주 옥내 집회를 열었던 곳으로, 5월26일 계엄군의 무력 진압을 막기 위해 자위적 수단으로 시민군에게 총기 훈련을 실시했던 곳이다. 항쟁 이후에도 광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수많은 집회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근·현대 민주화운동의 역사 한가운데 존재했던, 민주화를 위한 학생운동의 요람이었던 전남대 정문도 주목해야 할 공간이다. 1980년 5월17일 자정, 불법적인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따라 전남대에 진주한 계엄군이 도서관 등에서 밤을 새워 면학에 몰두하던 학생들을 무조건 구타하고 불법 구금함으로써 항쟁의 불씨를 지피는 도화선이 된 공간이다.

이어 5월18일 오전 10시께 전남대 교문 앞에 모여든 학생들이 학교 출입을 막는 계엄군에게 항의하면서 최초의 충돌이 일어났으며, 학생들은 광주역과 금남로로 진출해 항의 시위를 벌였다. 계엄군은 항쟁 기간 중 시내에서 끌고 온 시민들을 종합운동장과 이학부 건물에 수용하고 집단 구타를 가해 사망자를 발생시켰으며, 그 주검을 학교 안에 암매장해 이후 발굴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당시 전남대 정문에는 용봉천이 흐르고 그 위에 다리가 놓여 있었으나, 현재는 복개되었다. 학생과 시민들을 불법 감금했던 이학부 건물은 철거되었다. 교문 또한 새롭게 모양이 바뀌었다.

이외에도 중요한 5·18 사적지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5·18 당시 광주 시민과 계엄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광주역 광장이나, 계엄군이 비무장한 시민들을 향해 최초로 발포를 했던 광주고등학교 등 피로 얼룩진 역사의 현장이 아닌 곳이 없을 정도로 광주 시내는 30주년을 맞아 5·18의 흔적들을 소리 없이 증언해주고 있다.

하지만 근·현대 건축물이나 구조물이 대다수인 5·18 사적지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원형이 사라져가거나 변형이 가해진 것들이 늘어나고 있다. 또, 5·18 이후 세대들이 대거 증가함에 따라 정신사적으로도 그 의미가 약화되어간다는 느낌이다.

찬연한 문화 유적에 가해진 원형 보존이라는 기준을 꼭 적용하기 어렵다고 하면, 변형의 속도를 지연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5·18 민주화운동 관련 사적지의 원형을 사진 속에서나 만날 수 있다면 당시 영령들이나 시민들에게 또 하나 큰 짐이 되고 말 것이다. 정신은 정신대로 그 가치들을 유지해가면서 관련 사적지들의 원형이 보존될 수 있도록 정부와 지자체, 시민사회가 힘을 합쳐야 할 때이다.

52 ⓒ 시사저널 임준선
광주시 금남로에 위치한 옛 전남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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