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기가 군중 향해 총을 쏘아댔다”
  • 안성모 (asm@sisapress.com)
  • 승인 2010.05.11 19:4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세대 설립자 언더우드 목사의 손자며느리가 전하는 ‘5·18 민주화운동’ / “어린 아이들까지 죽이는 공포의 날들이었다”

▲ 지난 5월4일 광주시 운정동 5·18민주묘지에서 참배객들이 묵념을 올리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고(故) 김남주 시인은 ‘5월 광주’를 일러 이렇게 말했다. ‘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 서정적으로 오지도 않았고, 오월은 풀잎처럼 그렇게 서정적으로 눕지도 않았다.’ 1980년 5월 군사 정권의 총구가 시민을 향해 불을 내뿜는 순간, 더 이상 5월은 신록을 뽐내는 ‘계절의 여왕’이 아니었다. 군홧발에 짓눌린 민주주의는 분노한 사자의 울부짖음으로 일어섰다. 시민들은 ‘고립된 섬’ 광주에서 끝까지 신군부의 폭압에 항거했다. 그렇게 열흘간의 ‘화려한 휴가’는 계속되었다.

5·18 민주화운동이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군부 독재는 막을 내린 지 오래고, 그토록 열망하던 민주화도 이루었다. 그런 만큼 ‘광주 항쟁’에 대한 기억도 서서히 옅어지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5월 광주’는 여전히 한국 현대사의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시대는 변했지만,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그날의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는 5월17일 옛 전남도청 앞 광장과 금남로 일원에서 펼쳐질 올해 전야제의 주제는 ‘기억하라, 맞서라’이다.

<시사저널>은 1980년 5월 당시 광주에서 활동했던 미국 선교사들의 눈을 통해 참혹했던 5·18 현장을 되살려보았다. 장로교선교회 존 T. 언더우드(Underwood, John Thomas) 선교사의 부인 진 웰치(Jean Welch·한국명 원진희) 여사는 열흘간 보고 들은 내용을 회상록 <광주 항쟁에 대한 기억(The Kwangju Uprising Remembered)>에 기록했다. 진 웰치 여사는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한 언더우드(Underwood, Horace Horton) 목사의 손자며느리이다.

진 웰치 여사는 회상록 서문에서 “1980년 한국판 ‘천안문’ 사건이 일어났다. 수도인 서울이 아닌 남쪽으로 3백여 km 떨어진 지방 도시 광주에서다. 어떤 TV 카메라도 광주시민의 용감한 저항을 담아내지 못했다. 시민들은 줄지어 오는 탱크들에 맞섰고, 끝까지 저항해 그들을 되돌려 보냈다”라고 밝혔다.

5월18일 일요일 진 웰치 여사는 남편과 함께 예배를 보러 화순에 있는 교회를 다녀오는 동안 별 다른 것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서로 다른 교회에 다녀온 침례교도들은 상황이 달랐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호텔 근처에서 최루가스 냄새를 맡고, 전남대 근처에서 길을 막고 있는 대규모 시위 행렬과 맞닥뜨렸다. 택시로 이동하다가 군부대가 설치한 방어벽 때문에 호텔에서 떨어진 곳에서 내리기도 했다. 이들 중 아놀드 피터선(Arnold Peterson) 일행은 시내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동아일보

“군인이 조용히 귀가하는 청년의 목에 총검을 들이대”

“택시에서 내렸을 때 20대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한 블록쯤 걸었을 때 파출소 앞에 서 있던 공수부대원들이 그를 둘러쌌고, 순식간에 구타가 시작되었다. 갈비뼈, 등, 어깨 할 것 없이 때리고 제압했다. 데모에 가담했는지를 묻는 질문에 청년은 ‘그저 집에 가던 길이다’라고 대답했지만 듣지 않았다. 사타구니를 발로 차고 총검으로 위협했다. 총검은 청년의 목구멍 바로 앞에서 멈췄다.”

아놀드 일행은 이런 장면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고 한다. 한 택시 기사는 “저 군인들이 우리 학생들을 죽이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승객들이 이날 낮 공수부대에 의해 부상을 입고 죽임을 당한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이다. 다음 날인 19일 월요일에도 폭력은 계속되었다. 진 웰치 여사는 “어떤 이는 두 아이를 데리고 걸어가다가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맞았다”라고 기록했다. 아놀드와 동료는 호텔 창문 너머 광경을 전해주었다. “수백 명의 학생이 곤봉으로 맞고, 발로 차이고, 소총으로 맞았다. 군인들이 학생들의 바지를 벗기고 벨트로 손을 묶은 채로 구타했다. 학생들은 트럭으로 실려갔다. 진압 경찰들은 군인들이 이러는 동안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군인들이 집집마다 뒤지며 어린 청년들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아놀드의 요리사는 고등학생 아들과 친구를 데려와 하룻밤 묵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날 밤 12명이 그의 집에서 잠을 잤다. 당시 각 선교사의 집은 몸을 숨기기 위해 찾아온 시민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진 웰치 여사는 “월요일은 광주 시민들에게 공포의 날이었다”라고 전했다.

5월20일은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 처음으로 발포를 한 날이다. 그날 이른 아침 병원에서 예배가 열렸다고 한다.

“한 의사가 광주와 광주 시민들을 위해 기도를 했다. 그는 하나님에게 시민들과 어린 학생들을 보호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하나님, 우리의 군인이 우리의 형제자매와 어린 아이들을 죽이는 이런 일은 도대체 무엇입니까’라며 눈물을 흘렸다. 몇 분간 정적이 흘렀다. 예배당은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다음 날인 21일은 전남도청 앞에서 군의 집단 발포가 있었던 잔혹한 날이다. 이날 아침 아놀드는 시끄러운 총 소리와 경적 소리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러 내려갔다고 한다. 그곳에는 학생과 시민들을 태운 시내버스, 트럭, 지프차들이 앞뒤로 지나고 있었다. 이들은 현수막을 들고 지난밤 시위의 결과에 소리쳐 기뻐하고 있었다. 군부대가 소규모 병력만을 남긴 채 철수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그들을 쫓아냈다!”라고 소리쳤다. 아놀드는 “마치 축제에 와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평화는 잠시였다.

“오후 2시쯤 헬기가 도시 위를 날며 전단지를 뿌렸다. 거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심각한 결과를 각오해야 한다는 경고가 적혀 있었다. 젊은 노동자들이 화순에 있는 군 무기고를 쳐부수고 들어간 것도 이때쯤이었다. 시민군은 이제 무장 세력이 되었다. 대규모 집회가 오후 3시에 계획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헬기가 원을 그리며 도심 위를 날았고, 군중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광주기독교병원은 이날 오후부터 사상자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부상자들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오후 3시를 조금 넘겼을 때였다고 한다. 진 웰치 여사는 병원에서 혈액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에 거리로 내려왔다.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는데, 머리 위로 두 대의 헬기가 원을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세 번째 헬기가 나타나더니 저공 비행을 시작했다.

“문이 열린 헬기 안에 군인이 앉아 아래쪽으로 총구를 향하고 있는 것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거리는 순식간에 텅 비었다. 모두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벽이나 가게에 가까이 붙어 피할 곳을 찾으려 했다. 헬기는 두세 바퀴를 더 돈 후 이동했다. 헬기가 이동한 것을 확인한 이후에야 다시 길을 나섰다.”

“광주를 떠나라는 연락 받았을 때 도시를 폭발시킬 것을 예감”

며칠간 도시는 고요함에 뒤덮였다. 차도 다니지 않고 상점은 문을 닫았다. 경찰도 사라졌다. 고요함과 정적뿐이었다. 5월26일 월요일 아침 아놀드는 광주를 떠나라는 연락을 받았다. 진 웰치 여사는 “아무도 우리가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라고 회상했다. 왜 그런 연락이 왔는지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군이 도시를 폭발시킬 것을 고려하고 있어서 안전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다음 날인 5월27일 새벽 계엄군은 전남도청을 지키던 시민군을 상대로 마지막 공격을 강행했다. 밤새 깨어 있던 진 웰치 여사는 길 아래에서 탱크가 지나가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열흘간의 광주 항쟁은 이렇게 끝이 났다.

이틀 후인 5월29일 진 웰치 여사는 호남신학대에 다니던 문동용씨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문씨는 마지막 항전에서 목숨을 잃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관은 내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통곡 소리가 주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죽음의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산비탈은 온통 새 무덤으로 뒤덮여 있었다. 꼭대기에 있는 무덤들은 아침에 장례식이 치러진 것들이었다. 문씨의 가족과 친구들은 흙을 한 움큼씩 쥐어 뿌렸다. 그의 약혼녀가 조용히 옆에 서 있었다. 주변에서 목탁 소리와 기도문을 읊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