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한국의 현실’을 직시하다
  • 라제기 |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
  • 승인 2010.05.18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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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문제·실업·88만원 세대 등 소재로 한 영화 줄이어…칸 영화제 진출작도 “사회 비판적” 평가

 

 

최근 충무로의 한국 영화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젊은 관객들은 사회의 어둠과 추레함을 들추는 영화를 ‘구리다’며 회피해왔다. 어느덧 충무로의 리얼리즘은 흥행과 상극을 이루는 단어가 된 것이다.그러나 최근 충무로가 우리 사회의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시대 어두운 곳을 비쳐온 독립영화의 역할에 비할 수 없겠지만 상업성과 사회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가고 있다. 올해 주목해야 할 한국 영화의 새로운 징후이다.

 카메라, 사회 밑바닥을 훑다

신호탄은 <육혈포 강도단>(3월18일 개봉)이 쏘아 올렸다. 일생의 꿈인 하와이 여행을 위해 저축을 해 온 할머니 3인방이 창졸지간에 돈을 잃고 은행 강도단으로 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화는 코믹 박자로 전진하지만 정서는 서글픈 멜로디이다. 빈곤에 시달리는 노년의 문제를 유머로 다룬 이 영화는 흥행에서도 쏠쏠한 재미를 보았다. 1백22만3천명(영화진흥위원회 집계)이 관람해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코믹 스릴러를 표방한 <반가운 살인자>(4월8일 개봉)는 중년 실업자 문제를 조명한다. 코믹 영화이지만 스크린 이면에 눈물이 배어 있다. 사업에 실패해 딸에게까지 무시당하는 중년 백수 김영석(유오성)은 경품을 효과적으로 따내기 위해 비열한 방법으로 신문 구독을 바꾸거나, 딸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연쇄 살인범을 만나려 한다. 그가 연쇄 살인범을 만나려 하는 이유는 검거가 아니라 보상금을 타내기 위한 위험천만한 계획 때문이다. 몸을 던져서라도 가족을 부양하려는 실업 가장의 분투를, 영화는 그렇게 투사한다.

이 눅진한 영화들의 행진에 <내 깡패 같은 애인>(5월20일 개봉)은 굵은 방점을 찍는다. 높은 완성도로 오락성과 현실 비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한다. 지방대 출신의 취업 준비생 세진(정유미)과 변두리 깡패 동철(박중훈)의 칙칙한 핑크빛 인연을 그린 이 영화는 우리 사회 반지하 인생을 조명한다. 지방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직장을 못 잡는 88만원 세대 세진과, 전단이나 붙이고 다닐 정도로 조락한 삼류 조폭 동철은 이 시대 낙오자들의 아이콘이다. 이 영화 역시 빛이 들지 않는 눅눅한 현실을 웃음으로 풀어내며 대중과의 접점을 찾는다. 웃기지만 쓸쓸하다.

 

‘돈에 돌아버린’ 세상에 일침을 가하다

<시>와 <하녀>는 칸 영화제 진출작이라는 공통점 외에도 닮은 꼴을 지녔다. 지극히 다른 소재와 정서로 대한민국 사회에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두 영화는 돈에 돌아버린 한국의 천민자본주의를 은유적으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각각 비판한다.

<시>는 몹쓸 짓을 저지른 외손자에 대한 66세 할머니 미자(윤정희)의 속죄 의식을 좇는다.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 하는 어른들의 비뚤어진 세계관은 아이들의 잘못된 인격 형성과 직결된다. 그들은 한 여학생을 죽음으로 내몰고도 밥 투정을 하고, 천연덕스럽게 오락실을 전전한다. 영화 속 김희라가 연기한 노인은 천민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다. 몸이 불편한 수전노인 그는, 자신의 유일한 무기인 돈으로 미자를 무너뜨리려 한다. 영화가 묻는 시의 존재 의미는 도덕의 가치에 대한 질문과도 같다.

<하녀>는 돈을 기반으로 형성된 한국 사회의 천박함을 직설화법으로 조롱한다. 돈을 가진 자는 권력을 지니고, 그 돈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도덕도 헌신짝처럼 버린다. 가진 자들이 “순수한 것인지, 착한 것인지, 맹한 것인지 알 수 없다”라고 평하는 인물 이은이(전도연)는 그들에게 농락당한다. 없는 자를 하녀로 전락시키는 이 사회에 도덕적 출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영화는 말하려 한다. 냉기 가득한 영화이지만, 현실은 그보다 더 차가울지 모른다. 

 

스타일리스트 리들리 스콧과 연기파 배우 러셀 크로우의 다섯 번째 만남으로 화제를 모은 <로빈후드>는 남성미 넘치는 서사 액션극이다. 기존 이미지에서 탈피해 고뇌하고 회의하지만 더없이 저돌적인, 이제껏 본 적이 없는 로빈후드를 그린다. 변화는 이야기에서도 보인다. 영화는 13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이미 잘 알려진 셔우드 숲 속 의적의 활약 대신 전쟁 영웅이었던 로빈 롱스트라이드(로빈후드)가 어떻게 가난한 자의 영웅이 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말하자면 ‘로빈후드: 더 비기닝(The Beginning)’. 체제에 기여하던 영웅이 현실의 불합리를 깨닫고 스스로 반영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설정 자체는 신선하다 할 수 없고 프리퀄(前史)치곤 긴 상영 시간을 자랑하지만, 화면 곳곳을 메운 스펙터클을 따라가노라면 1백40분이 지루할 틈은 별로 없다.

감독은 로빈후드를 싸움 속으로 몰아넣은 뒤 그 안에서 성장을 도모하는 것으로 자신의 장기를 십분 발휘했다. 새로운 로빈후드는 호시탐탐 영국을 노리는 프랑스군과 싸우고 폭정을 일삼는 새 왕의 군대와 싸운다. 격렬한 전투 속에 트레이드마크인 활부터 도끼, 칼, 창까지 어지간한 무기는 죄다 동원된다. 거대한 공성전으로 시작해 중세판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 불러도 좋을 해안 전투로 이어지는 전투 장면의 놀라운 규모와 묘사는 장쾌한 시각적 즐거움을 전한다. 사이사이 끼어드는 유머도 재미있으며 엔딩크레딧의 애니메이션도 흥미롭다.

‘나의 로빈은 이렇지 않아’라는 관객의 거부감을 얼마나 넘어설지는 미지수이지만, 거친 매력을 그대로 발산한 러셀 크로우의 로빈후드는 충분히 인상적이다. 활 쏘고 칼 휘두르는 적극적 여인으로 재해석된 로빈후드의 연인 마리온 캐릭터는 자칫 뻣뻣할 수 있는 남성적 드라마에 부드러운 여유를 주었고, 케이트 블란쳇의 우아한 연기는 강렬함만큼이나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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