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바꼭질하는 독립신문사 ‘출생지’
  • 이순우 |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
  • 승인 2010.05.25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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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창간호에는 ‘정동’이라고만 기록…각종 자료 종합해보면 서울시립미술관 근처일 듯

4월7일은 ‘신문의 날’이다. 이날은 지난 1957년에 한국신문편집인협회가 ‘독립신문’의 창간일을 기리고자 제정한 데서 비롯되었다. 민간 신문의 효시인 동시에 최초의 한글 전용 일간지였던 독립신문은 갑신정변 때의 망명객인 서재필(徐載弼, 1864~1951)에 의해 1896년에 창간되었다. 처음에는 네 개 면 가운데 세 개 면은 국문으로, 제4면은 영문판을 격일간으로 발행하는 편제였다. 그러다가 나중에 영문판이 따로 분리되는 한편 1898년 7월1일부터는 국문판을 일간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거쳤다. 한 번에 2천부를 발행하는 규모였으나, 국내외 사정과 신문물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독립신문의 영향력과 파급 효과는 결코 작지 않았다.

▲ 서울 정동 배재정동빌딩 뒤편에 독립신문사 표석이 세워져 있다. ⓒ이순우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은 청일전쟁이 종결된 직후에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이라는 미국인의 신분으로 서울로 되돌아왔다. 1896년 1월13일자로 중추원 고문관의 직위를 취득했으며, 이후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집권 세력과 알력을 겪다 1898년 5월14일 미국으로 떠나고 말았다. 서재필이 느닷없이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된 직후인 1898년 5월12일부터 독립신문은 윤치호(尹致昊, 1865~1945)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후 선교사 아펜젤러와 영국인 엠벌리 등의 손을 거쳤다가 1899년 12월4일자를 끝으로 대한제국 정부에 관련 시설 일체가 인수되면서 폐간되었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독립신문사가 자리했던 곳은 서울 중구 정동(貞洞)이었다. 하지만 그 정확한 위치가 어디였는지는 그 누구도 잘 알지 못한다. 독립신문 창간호 제1면 상단에 수록된 광고에 “신문을 달로 정하든지 일년간으로 정하여 사보고픈 이는 정동 독립신문사로 와서 돈을 미리 내고 성명과 집이 어디라고 적어놓고 가면 하루 걸러 신문을 보내줄 터이니…”라는 표시만 나와 있다. 하다 못해 어디어디 옆이라거나, 어디어디 부근이라거나 하는 따위의 ‘사소한’ 안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더 이상의 구체적인 설명을 찾을 길이 없다.

지난 1985년 10월에는 서울특별시 문화재과 표석위원회에서 ‘정동 34-5번지’ 구역 내에 있던 배재학당 대강당 앞쪽 계단에 ‘독립신문사터(獨立新聞社址)’ 표석이 설치된 바 있고, 지금도 배재정동빌딩 뒤편에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자리가 선정된 이유는 초창기 독립신문의 인쇄소가 배재학당 안에 있던 삼문출판사(三文出版社, 미이미활판소)였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 표석은 위치 고증에 오류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설명 문안이 적절하게 수정되거나 표석 자체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것이 합당하다.

독립신문사의 위치와 관련해 일찍이 주한 미국대사관의 문정관과 정무참사관을 지낸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은 1959년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회지’ 제35권에 기고한 ‘정동 지역과 미국대사관저의 역사’라는 글을 통해 “미국대사관 게스트하우스의 출입구 건너편에 법원으로 들어가는 정문 옆에는 필립 제이손 박사가 그의 유명한 신문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라고 지목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기록을 근거로 오인환 전 연세대 교수는 정동제일교회 바로 건너편에 있는 ‘신아빌딩(서소문동 39-1번지)’이 독립신문사 자리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추정을 덧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헨더슨이 제시한 주장에는 이렇다 할 근거 자료가 전혀 제시되지 않았고, 시기적으로도 그 시절과는 이미 60년 가까운 시차가 있는 내용이어서 액면 그대로 믿어도 좋을지 주저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 독립신문사 위치를 추정하게 해주는 옛 사진. ⓒ이순우

주요한 역사 공간에 대한 기록·유적 관리 소홀 자성해야

 

  그렇다면 독립신문사의 위치를 추적할 만한 좀 더 구체적인 단서는 없는 것일까? 우선 독립신문 1897년 3월4일자에 수록된 ‘대군주 폐하의 경운궁 환궁’ 관련 기사에 “배재학당 학도들이 독립신문사 건너편에 정제하게 서서 어가 지나실 때에 갓들을 벗고 만세를 부르며…” 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다음으로 제국신문 1900년 3월10일자에도 “정동 독립신문사 아래 집 덕국영사관을 정부에서 오만 오천원과 또 남촌 상동 근처 토지 얼마를 주고 샀다더라”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독일영사관의 영역은 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이 들어선 언덕 일대와 그 아래쪽에 붙어 있는 신아빌딩이 모두 포함되는 자리였다. 특히 독립신문 1897년 4월13일자에 수록된 기사에 따르면 “정동서 서소문으로 넘어가는 길을 넓히고 고칠 터인데 이 길 좌우 쪽 땅은 미국 미미교회와 덕국영사관 땅이라” 하였으므로,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으로 이어지는 서소문길의 건너편이 모두 독일영사관 구역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이것 말고도 독립신문사의 위치 확인과 관련해 가장 의미 있는 증언은 바로 ‘윤치호’의 것이다. 그는 서재필에 이어 독립신문의 편집과 운영을 책임졌던 인물이었으므로, 그의 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해 <윤치호 일기> 1898년 11월4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우연찮게도 이 날은 독립협회의 간부들에게 체포령이 내린 날이기도 했다.

“오후 6시에 궁궐 문지기 하나가 사무소로 와서는 폐하께서 당장 나를 보시겠다고 한다는 말을 전하였다. 밤 9시 무렵에 알현이 있었다. … 폐하는 내가 독립신문 사무소에서도 가끔 자는지 하문하셨다. ‘그렇습니다’라는 내 말에 폐하께서는 온후하게도 이 사무소가 독일의 자산인지 우리 것인지를 물으셨다. 나는 이 사무소가 독일영사관 건물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기는 하지만, 한국 소유의 가옥이라는 대답을 올렸다. 이 점에 있어서 나는 실수를 했는데, 이 사무소는 미국 소유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단한 몇 가지 질문을 하시고 폐하께서는 나를 물리치셨다.”

▲ 서울 정동에 독립신문사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독립신문 창간호. ⓒ이순우

그리고 미국인 헐버트가 발행하던 영문 월간지 <더 코리안 리포지토리>
1897년 2월호에는 서소문 안쪽에 살던 서재필이 공사관거리(Legation Street, 정동길)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출근하기 위해 독일영사관과 감리교 구역 사이의 언덕으로 통하는 좁은 골목을 지름길로 택한다는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상의 자료들을 종합해 가늠해보면, 독립신문사는 독일영사관이 자리했던 ‘서소문동 38번지(39번지 포함)’ 구역에 포함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 건물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얼추 말하면, 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 안쪽에 가까운 어느 지점에 존재했던 것으로 축약된다.

1902년 11월부터 7개월가량 주한 이탈리아 영사를 지낸 카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가 펴낸 <꼬레아 에 꼬레아니> (1904, 1905)라는 책에는 배재학당 쪽에서 경운궁 일대의 전경을 담아낸 사진 자료가 실려 있다. 여기에 보이는 가옥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독립신문사일 가능성이 아주 크지만, 구체적인 건물의 형상까지 가려낼 수 없는 것은 무척이나 아쉬운 대목이다. 이렇듯 100년 안팎의 주요한 역사적 공간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고증을 해낼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그동안 역사 기록이나 유적 관리에 참으로 무심하게 살아왔던 탓이 아닌가 싶어 씁쓰레한 여운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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