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려가신 아버지 67년 만에…”
  • 조현주 기자 (cho@sisapress.com)
  • 승인 2010.05.25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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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희 한인유골봉환유족 대표 인터뷰 / “무연고 유골 너무 많은 것이 안타깝다”

지난 5월18일 일본 도쿄 메구로 구의 사찰 유텐지(우천사)에서는 일제 강점기 일본군의 군속으로 강제 동원되었다가 숨진 한인 유골 2백19위의 봉환 추도식이 열렸다. 강제 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위원장 정선태)와 일본 정부의 협의를 통해 일본 도쿄의 사찰에 보관되어 있는 한국인 유해가 제자리를 찾게 된 것이다. 70년 만이다.

이날 행사는 일본 외상과 주일 한국대사, 유족 등 5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 1943년 10월15일 일본에서 사세보 해군시설부 소속 해군 군속으로 징용된 이쾌점씨(원 안). ⓒ시사저널 이종현

67년 만에 아버지(이쾌점씨·1908년 7월2일생)의 유골을 찾은 이종희 한인유골봉환유족 대표(74)가 추도사(오른쪽 상자)를 맡았다. 이대표가 추도사를 읽어 내려가자 행사장은 눈물바다로 변했다.

70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내면서 유족들의 가슴에는 씻을 수 없는 한(限)이 서린 것이다. 이런 유족들의 모습에 오카다 일본 외상도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 봉환된 2백19위의 유골 중 24위만이 유족이 확인되었다. 나머지 무연고 유골은 5월19일 천안 ‘망향의 동산’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5월20일 서울 정릉에서 이종희 대표를 만났다.

ⓒ시사저널 이종현

아버지의 유골을 찾아 고향으로 모셔왔다. 심경이 어떤가?

한 줌 재가 되어서 돌아오신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많이 울었다. 아버지를 그리며 버텨온 지난 세월을 떠올리니 가슴이 멍해졌다. 내가 아버지와 헤어졌을 때가 여덟 살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일본 해군으로 징병을 당하셨다. 이후 어머니와 함께 면회를 간 적이 있다. 면회를 갔을 때 찍은 사진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몰랐다. 사실 아버지의 유골을 모시고 온 지금도 아픔은 여전하다. 행상으로 고생하신 어머니, 대학도 못 나오고 고생해야 했던 나의 불우한 과거를 떠올리면 여전히 마음이 저며온다. 유골을 찾아오면서 그 모든 기억이 다시 떠올라 아직은 착잡한 심정이다.



이번 봉환 추도식에서 유족 대표로 추도사를 맡았는데….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로부터 의뢰를 받았다. 일본에서의 추도식에는 아홉 명의 유족이 참석했는데 대개가 동생, 조카, 누이 등이다. 나만 유독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기 때문에 의미를 두었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왜 일본군에 징집되었는지 알았나?

워낙 어릴 때라 아버지가 왜 해군이 되었는지 자세히는 모른다. 아마 우리 가족이 일본에 머무르고 있어서 징집 가능성이 컸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태어난 해가 1936년이다. 이듬해 우리 가족은 일본의 고베보다 조금 아래에 위치한 아카시라는 곳으로 이사했다. 일제 강점기 한국에서의 생활이 워낙 힘들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부모님은 성냥 공장을 하시는 외가 친척들을 도우며 생계를 이었다.

어린 시절 일본에서의 생활은 어땠는가?

어머니는 연근을 팔아 나와 내 동생을 키우셨다. 그리고 아버지가 군에 들어간 이후부터는 생활이 더욱 힘들어졌다. 1930년대 말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살고 있던 아카시는 폭격으로 인한 피해가 심했다. 하는 수 없이 어머니께서는 나와 어린 동생을 데리고 이리저리 피난을 다니셨다. 우리 가족이 피난간 곳은 히로시마 부근에 위치한 미군 포로 수용소였다. 어머니께서는 ‘미군 포로수용소가 있는 곳은 폭격이 없다’라는 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피난을 가신 것 같다. 그리고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 포로수용소 부근에서의 생활이 이어졌다.

 

 

광복 이후에도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실제로는 어떠했나?

광복 소식을 접하고는 일본에서의 첫 거처였던 아카시로 이동했다. 같은 해인 1945년 11월 우리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와 경남 의령의 외갓집에 머물렀다. 8년 만에 다시 한국 땅을 밟기까지 고비도 많았다. 일본에 있는 한국인들 가운데 부유한 사람들은 대개 일본인으로 귀화한 상태였다. 가난한 한국인들은 살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갔다. 워낙 힘들었던 형편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무허가 배에 올라타셨다. 50명 정도가 탈 수 있는 작은 배를 타고 몰래 부산항에 들어왔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배의 시동이 꺼져 겁을 많이 먹었다. 가난한 한국인들은 무허가 배를 타고 몰래 한국으로 오다가 사고도 많이 당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의 행방을 수소문했을 텐데….

우리 가족은 경남 의령에 있는 외갓집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어머니께서는 온갖 행상으로 두 아들을 먹여 살렸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난 뒤 서울 종로구로 거처를 옮겼다. 그때가 1957년쯤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온몸이 부서지도록’ 일을 하셨다. 나 역시 어린 동생을 돌보기 위해 제대로 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군에 입대한 후로 피난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아버지의 소식을 접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가족 모두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그리워할 틈도 없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사망한 사실을 언제 알게 되었나?

막연히 일본에서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돌아가신 이유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된 것은 최근 들어서의 일이다. 지난 2005년 ‘일제 강점하 강제 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이 시작되면서 사망 경위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위원회로부터 아버지가 1945년 8월4일 필리핀의 비도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한 사실을 듣게 되었다. 위원회 쪽 기록에 의하면 아버지의 유골은 일본 후생성에 보관되어 있다가 1971년 6월 도쿄의 사찰 유텐지에 넘겨졌다. 이번에 돌아온 유골 중에서 아버지처럼 유족이 확인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유족을 찾지 못한 무연고 유골에 대해서는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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