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대 오른 ‘준비된 명장’들
  • 위원석 | 스포츠서울 체육1부 기자 ()
  • 승인 2010.05.3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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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 B조 4개팀 이끄는 허정무·마라도나·레하겔·라예르베크의 리더십과 축구 철학 비교

▲ 5월24일 한국과 일본의 월드컵 대표팀 평가전에서 첫 골을 터뜨린 한국 선수들이 골 세리머니를 마친 뒤 그라운드로 돌아가고 있다. ⓒ연합뉴스

1986년 6월2일 멕시코월드컵 한국-아르헨티나전이 끝난 뒤 외신은 한 장의 사진을 타전했다. 당시 ‘축구 신동’으로 전세계에 이름을 떨쳤던 마라도나가 붉은 유니폼을 입은 한국 선수에게 마치 ‘옆차기를 당하는 듯한’ 사진이었다. ‘한국 축구는 태권도 축구’라는 비아냥이 흘러나왔다. 이 선수는 24년 뒤 태극전사들을 이끌고 남아공월드컵에서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에 도전하기 위해 장도에 올랐다. 바로 허정무 감도ㄱ이었다. 그는 6월17일 요하네스버그에서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와 사령탑으로서 ‘운명의 리턴 매치’를 펼치게 된다.

▲ 허정무 전남 감독이 한국 축구 대표팀 사령탑으로 선임된 후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모습. ⓒ시사저널 임준선
■ 한국의 허정무-‘근성 축구’의 화신

허정무 감독은 흔히 ‘근성 축구의 화신’이라고 불린다. 마라도나를 향해서 ‘옆차기를 날리는 듯한’ 사진은 그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기 좋아하는 감독은 한 명도 없는 법이지만 허감독의 승부욕은 특히 유별나다. 축구뿐만 아니라 골프, 테니스, 바둑 등 ‘잡기’에서도 지는 것을 참지 못한다. ㅅㅣㅁ지어 박태하 코치와 팔굽혀펴기 내기를 하면서도 반드시 이겨야만 직성이 풀린다.

‘근성 축구’라는 표현이 물론 칭찬만은 아니다. 그의 스타일이나 축구 철학이 너무 ‘구식’이라고 비난하는 팬들도 일부 있다.

시간을 12년 전으로 돌려보자. 허감독은 1998년 8월 국내 축구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른 후보들과 토론회를 거쳐 국가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었다. 당시 토론회에 제출했던 문건에는 ‘허정무 축구’의 원형이 담겨 있다.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추ㄱ구는 사고와 조화의 게임이다. 이를 통해 자율 축구·창조 축구를 만들어야 한다 △세계 축구의 흐름을 빨리 받아들이되 반드시 한국적 토양에 맞게 소화해야 한다 △세대 교체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체력과 기술, 전술 훈련 등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며 훈련 방식의 과학화·체계화가 필요하다’ 등이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과 아시안컵의 실패로 물러났던 허감독은 2007년 말 절치부심 다시 ‘대권’을 잡았다. ‘허정무호 2기’도 대체적으로 위에 열거한 축구 철학이 세련되게 업그레이드되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허정무호 1기’는 외면적인 성과보다는 수많은 유망주를 발굴해내면서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초석을 닦았다. 시드니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무명이었던 박지성·이영표·송종국·설기현·이천수 등을 발굴했다. 이번에는 이청용·기성용·이승렬·구자철 등의 젊은 피들이 허감독을 통해서 국가대표팀에 처음 발탁되었다. 그의 ‘선구안’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정신력을 강조하는 ‘근성 축구’의 신봉자답게 팀 운영은 ‘경쟁’에 방점이 찍혀 있다. 남아공월드컵을 앞두고도 30명의 예비 엔트리를 먼저 발표해 26명으로 줄인 뒤 최종적으로 23명의 최종 엔트리를 확정했다. 본선이 열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팀내 경쟁을 통해 개인 능력의 최대치를 뽑아내겠다는 것이다. 반면, 경쟁 체제가 막판까지 유지되면서 부상의 위험도 상존한다. 5월16일 에콰도르와 평가전에서 허벅지 부상을 당한 이동국의 경우가 좋은 사례이다.

허감독은 1기 때보다 2기 때 휠씬 부드러운 남자로 변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이다. 그 스스로도 원숙해졌고, 선수와 소통도 잘하고 있다. 2008년 북한과 상하이에서 벌였던 최종 예선 1차전에서 무기력하게 1-1로 비긴 허감독은 퇴진 압력에 몰렸지만, 김남일 등 타성에 젖은 노장을 방출하고 박지성을 주장으로 내세우는 새로운 변화를 선택하면서 분위기를 쇄신해 무패로 예선을 통과했다. 김남일·안정환 등은 1년 넘게 대표팀에서 밀려났다가 달라진 모습으로 복귀했다. 허감독의 승부사적 기질과 판단력이 팀 내부의 화학적 결합을 이끌어낸 좋은 사례이다.

▲ (맨 왼쪽부터) 그리스의 오토 레하겔 감독.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 감독. 나이지리아의 라예르베크 감독. ⓒ(맨 왼쪽부터)EPA, EPA, 연합뉴스

■ 한국의 첫 상대 그리스의 오토 레하겔-

수비 축구가 아닌 실질 축구

그리스의 오토 레하겔 감독은 세계에서 가장 노회한 지도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남아공월드컵 본선 진출국 32개팀 가운데 최고령 감독(72세)이다. 그는 ‘수비 축구’의 대명사로 유명세를 탔다. 2004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04)에서 변방 격인 그리스를 이끌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우승을 차지하면서 이런 세평을 얻었다. 그는 두터운 수비벽을 세운 뒤 벼락 같은 역습이나 정교한 세트피스 플레이로 프랑스·체코·포르투갈 등 공격 축구의 대명사를 차례로 격파하며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당시 수비 위주의 플레이로 현대 축구의 흐름을 거꾸로 되돌리려 한다는 비난이 일자 그는 “현대 축구가 무엇인지 알고나 있는가. 바로 이기는 축구이다”라는 말로 대응했다. 개인적인 능력이 떨어지는 그리스가 이기기 위해서는 ‘선 수비·후 역습’이 불가피했다는 주장이다. 사실 ㄱㅡ의 지도 철학은 ‘수비 축구’라기보다는 오히려 ‘실질 축구’라고 평가하는 것이 온당하다. 레하겔은 “팀이 가용할 수 있는 선수들의 능력치에 맞는 전술을 구하는 것이 감독의 임무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실제로 그가 독일 분데스리가 브레멘을 지휘하던 시절에는 오히려 공격 축구로 명성을 떨쳤다. 팀이 갖고 있는 실질적인 능력에 가장 적합한 전술을 구사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단순히 그리스를 ‘수비 축구’로만 규정하면 월드커ㅂ 본선에서 우를 범할 수도 있다. 레하겔은 아르헨티나전에서는 ‘유로 2000’ 같은 수비 축구를 구사할 수 있지만, 객관적인 전력에서 한 수 아래로 여겨지는 한국을 상대로는 오히려 공세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 그게 바로 레하겔의 ‘실질 축구’이다.

그는 조국 독일의 분데스리가에서 잔뼈가 굵었다. 선수와 지도자로서 1천 경기 이상 출전한 기록은 오직 레하겔만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오토 대제’ ‘레하클레스(레하겔+헤라클레스)’ 같은 별명보다는 ‘킨드 더 분데스리가(분데스리가의 아이)’라는 별칭을 가장 자랑스러워한다.

분데스리가 우승 3회(1988년, 1993년, 1998년) FA컵 우승 3회(1980년, 1991년, 1994년) 유럽 컵 위너스컵 우승(1992년) 등 분데스리가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던 그는, 2001년부터 10년째 그리스 대표팀을 맡고 있다. 그가 지휘하는 그리스는 확실한 팀 컬러를 유지하게 되었다. 체격이 좋은 중앙 수비수가 버티는 안정된 수비, 빠른 윙어를 활용한 측면 공략, 헤딩 능력이 뛰어난 최전방 스트라이커의 존재 등 세 가지가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튼실한 수비를 바탕으로 측면 역습에 이어 스트라이커가 헤딩으로 골을 넣는 것이 그리스의 전형적인 플레이 패턴이다. 한국의 센터백 라인이 월드컵 본선 경험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리스의 ‘높이’와 파워를 앞세운 중앙 공략을 어떻게 막아내느냐가 승부의 관건이다. 레하겔은 선수들에게 동기 부여를 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물간 듯한 노장들도 그의 지휘 아래 헌신적이고 가치 있는 선수로 살아나기도 한다. 반면, 팀 운영 방식은 매우 독단적이다. 누구의 외부 간섭도 허용하지 않으며 전권을 행사한다. 이런 상반된 특징 때문에 그의 스타일은 ‘상냥한 독재’로 불리기도 한다. 또 ‘오토크라시(Ottocracy)’라는 합성어도 생겼다. 독재라는 뜻의 ‘오토크라시(Autocracy)’에 그의 이름 오토를 빗댄 것이다.

■ 한국의 두번째 상대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

전설의 선수, 그러나 미완의 감독

지금까지 존재했던 가장 위대한 선수는 펠레인가, 마라도나인가. 축구팬에게는 마치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숙제 같은 질문이다. 국제축구연맹(FIFA)도 ‘20세기의 선수’를 선정하면서 오랜  논쟁 끝에 펠레와 마라도나에게 공동의 영예를 안겼다. 선수로서는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그이지만, 감독으로서는 여전히 의문 부호를 달고 있다. 우선 그의 지도자 경험이 일천하다.

지난해 10월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맡기 전까지는 1994년과 1995년 자국 프로팀 두 곳을 잠깐 지휘했을 뿐이다. 따라서 지도자로서 그의 축구 철학을 정의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다만, 부임 이후 팀 핵심 리켈메와 분란을 일으켜 제 발로 대표팀을 떠나게 만든 점, 마라도나의 경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아르헨티나축구협회가 기술 고문으로 위촉했던 명장 카를로스 발라르도의 조언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점, 월드컵 예선에서 무려 80명이 넘는 선수들을 대표팀으로 불러 테스트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매우 독선적인 스타일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해외 전문가들이 우승 후보 아르헨티나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마라도나”라고 지적했을 정도이다. 극적으로 남미 예선을 통과한 직후 공식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에게 ‘매우 심한 욕설’을 퍼부어 FIFA로부터 징계를 받을 정도로 멘탈리티가 불안정한 점도 지도자로서 단점이다. 그 스스로 ‘제2의 마라도나’라고 인정했던 현존 최고의 플레이어 리오넬 메시를 과연 어떤 용병술로 활용하느냐에 지도자로서의 성패가 달려 있다.

■ 한국의 세 번째 상대 나이지리아의 라르스 라예르베크- 시간의 벽을 넘을 수 있을까

스웨덴 출신의 라르스 라예르베크는 사상 최초로 아프리카 대륙에서 열리는 이번 월드컵에서 복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슈퍼 이글스’ 나이지리아에 긴급 투입된 ‘소방수’이다. 자국 출신인 아모두 감독이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의 부진으로 경질된 뒤 지난 2월에야 나이지리아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선수들의 얼굴을 보고 첫 훈련을 지휘한 것도 월드컵 개막 불과 20여 일 전이었다.

아무리 명장이라고 해도 이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팀의 특성을 완전히 파악하고, 선수단을 장악하기는 쉽지 않은 노릇이다. 라예르베크가 스웨덴 밖에서 지휘봉을 잡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1977년부터 12년간 스웨덴 내 3개 클럽팀을 맡은 뒤 국가대표 2군 감독, 국가대표팀 수석 코치를 거쳐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 동안 대표팀 사령탑으로 장기 집권했다. 특이하게도 2002년 월드컵 때는 토미 소더버그 감독과 좀처럼 보기 힘든 ‘공동 감독 체제’를 유지했고 ‘유로 2004’가 끝나고 홀로 서기에 나선 뒤 2006년 월드컵, ‘유로 2008’ 등 두 개 메이저 대회에 진출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ㅈㅣ만, 남아공월드컵 예선에서 탈락한 이후 10년 집권을 마무리했다.

라예르베크가 스웨덴을 이끌었던 2002년과 2006년 월드컵 때의 FIFA 기술보고서를 보면 ‘팀 스피리트의 강조, 위협적인 세트피스, 잘 정비된 수비 라인’ 등이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그의 축구 색깔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10년 동안 지휘했던 스웨덴과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조련하는 나이지리아가 같을 수는 없다. 라예르베크가 짧은 시간 내에 얼마나 ‘슈퍼 이글스’에  자신의 색깔을 입힐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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