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으로도 통하는 팀 만들기’ 구슬땀
  • 노이슈티프트(오스트리아)·김정민 | 한국일보 기자 ()
  • 승인 2010.06.08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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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대표팀의 10박11일 오스트리아 전지훈련 현장 취재 / 환경 적응 성공하고 수비 조직력 바로잡아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에 도전하는 ‘허정무호’가 결전지로 가는 여정의 마지막 기착지에서 기분 좋은 성과를 얻었다. 축구 국가대표팀은 지난 5월26일(이하 한국 시간) 오스트리아 노이슈티프트에 훈련 캠프를 차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 입성을 위한 마지막 숨 고르기를 진행한 후 6월5일 결전의 땅에 발을 들였다.

벨라루시전(0-1)의 패배와 곽태휘(교토)의 부상 낙마, 긴박했던 최종 엔트리 발표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6월4일 인스부르크 티볼리슈타디온에서 치른 스페인과의 최종 평가전(0-1)을 통해 자신감을 높이며 16강 진입의 희망을 부풀렸다. 10박11일간의 숨가빴던 대표팀의 오스트리아 전지훈련을 돌아보았다.

■ 소통의 힘을 확인하다

허감독은 지난 5월10일 파주 축구 국가대표팀 트레이닝센터(NFC)에 월드컵 대표팀을 첫 소집한 후 가진 인터뷰에서 “상대보다는 우리가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가 중요하다. 선수 간에 눈빛만으로도 통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 미팅에서도 이 점을 강조했다”라고 밝혔다. 지난 4월 남아공에서의 ‘유쾌한 도전’을 선언했던 허감독은 ‘명랑한 분위기’ 속에 월드컵을 준비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일본을 기분 좋게 완파하고 알프스 자락 해발 1천2백m 고지에 캠프를 차린 대표팀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그러나 5월30일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82위에 불과한 벨라루시를 상대로 ‘허정무호’는 고전했다. 허감독은 당초 FIFA로부터 매치 승인을 받지 못하더라도 선수를 모두 가동해 ‘옥석 가리기’를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경기 주최측인 오스트리아 축구협회는 경기 질 저하를 우려해 A매치 승인 범위(6명)에서만 선수 교체를 허용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허감독의 경기 운영 구상이 어긋난 것이다. 전·후반 내내 대표팀은 벨라루시를 상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전반 중반 상대 공격수와 공중볼 다툼을 벌이던 곽태휘(교토상가 FC)는 그라운드에 쓰러진 후 들것에 실려나갔다. 후반에 내준 선제골을 만회하지 못하고 패했다. 기자회견장에서 허감독은 어두운 표정으로 “만족할 만한 점이 아무것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캡틴’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은 믹스트존 인터뷰에서 “수비할 때 선수 간에 의사소통의 문제가 있었다”라고 지적했다. 이정수(가시마 앤틀러스)와 함께 그리스와의 조별 리그 1차전 중앙 수비 조합을 이룰 것으로 전망되었던 곽태휘의 중도 하차는 대표팀에 큰 손실이었다.

대표팀은 이례적으로 벨라루시전 다음 날 회복 훈련을 실시하지 않았다. 허감독이 박지성과 면담을 통해 결정한 사안이다. 벨라루시전 후 고지대 등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호소한 선수단 분위기를 주장 박지성이 코칭스태프에게 전달했고, 허감독은 전격적으로 휴식을 지시했다. 대표팀은 훈련 대신 알프스 산맥의 해발 2천6백20m 고지에 올라 분위기를 전환했다. 과거 같았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벨라루시전에서 드러난 수비 허점도 ‘소통’을 통해 보완했다. 대표팀은 유럽 챔피언 스페인에 졌지만, 한 수 위의 개인기를 지닌 스페인 공격수들의 파상 공세를 잘 막아내며 수비 조직력에 대한 우려를 씻어냈다. 여기에는 수비진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결속력을 다진 이영표(알 힐랄 FC)의 공이 컸다. 스페인전에서 중앙 수비수로 좋은 활약을 펼친 이정수는 경기 후“(이)영표형이 미드필더와 수비진의 간격을 좁히고 컴팩트한 플레이를 펼치자고 주문했다. 오늘 경기에서 이를 100% 이행했다고 생각한다”라고 스페인의 공세를 잘 막아낸 배경을 설명했다. 오스트리아에서 팀 훈련이 끝난 후 수비수들을 별도로 불러 많은 대화를 나눴던 이영표의 노력이 ‘무적 함대’를 상대로 결실을 맺은 셈이다.

 

▲ 스페인과의 평가전을 앞둔 6월2일 허정무 감독이 선수들을 독려하고 있다. ⓒ연합뉴스

 

■ 최종 엔트리 발표 전 긴박했던 24시

허감독은 당초 5월31일(이하 현지 시간) 최종 엔트리를 발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벨라루시전을 치른 후 6월1일 오전 9시로 결단을 연기했다. 대표팀 관계자는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라며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허감독의 타는 속을 전했다. 벨라루시전 선수 기용이 구상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내용과 결과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허감독의 머리가 더욱 복잡해진 것이다. 31일 오후 8시께 저녁 식사 채비를 하던 기자단 숙소로 갑작스럽게 연락이 왔다. 허감독이 엔트리 발표를 위해 잠시 후 출발한다는 것이다. 대표팀 관계자는 “감독이 발표하기에 앞서 최종 엔트리가 외부에 유출될 가능성을 우려해 시간을 앞당겼다”라고 설명했다.

허감독은 무거운 표정으로 이근호(주빌로 이와타), 구자철(제주 유나이티드 FC), 신형민(포항 스틸러스)이 제외되었다는 사실을 밝혔고 “모든 선수와 함께 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이들을 제외하게 되었다. 함께 땀 흘린 선수들을 탈락시키게 되어 마음이 좋지 않다”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밝혔다.

허벅지 부상으로 최종 엔트리 합류가 불투명했던 이동국은 발표 당일 오전 부상 부위의 정밀 검진을 통해 조별 리그 2, 3차전 출전이 가능하다는 판정을 받고 허감독의 ‘OK’ 사인을 받았다. 고심 끝에 허감독은 최근 상승세를 보이는 이승렬(FC 서울)을 선택하고 슬럼프에 빠진 이근호 카드를 제외했다. 

■ 12년 만큼 길었을 이동국의 일주일

이동국은 오스트리아 전지훈련 내내 논란의 중심에 섰다. 비운의 스트라이커 이동국(전북 현대 모터스)의 최종 엔트리 진입 여부에 관심이 집중된 탓이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한국 축구 사상 최연소 출전 기록을 세웠던 이동국에게 이후 월드컵은 남의 얘기였다. 에콰도르전에서 당한 허벅지 부상에도 26명의 원정 엔트리 명단에는 이름을 올렸지만, 이동국의 남아공행은 불투명했다. 이승렬이 에콰도르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리는 등 무서운 기세로 이동국의 자리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허감독은 5월26일 첫 훈련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그는 “1차전에 나가지 못한다고 해도 2차전, 3차전에 출전할 수 있는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라고 이동국을 쉽게 포기할 수 없음을 암시했다.

허감독이 ‘마지막 시험대’라고 의미를 부여한 벨라루시전에서 이동국은 관중석에 앉았다. 끝까지 마음을 졸인 이동국은 결국 6월1일 발표된 최종 엔트리 23명에 포함되었다. 이동국은 탈락한 동료들에 대한 형언하지 못할 만큼의 미안함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두 차례나 월드컵 본선을 목전에 두고 좌절했던 그이기에 탈락의 쓴잔을 든 동료들의 아픔이 남의 일 같지 않았을 것이다. 이동국은 현재의 페이스대로라면 그리스전에 부분적으로 출전하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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