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찾은 ‘망국’의 뿌리
  • 조 철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10.06.22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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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100년, 현지 답사를 거쳐 ‘조선을 침략한 무리’들의 삶과 사상을 분석해

 

한반도는 지옥 경험을 참 많이 한 듯하다. 지금도 ‘불바다’ 발언이 터져나오는 마당이다. 이웃 나라 일본의 침략 때문에 ‘죽었다 살아난’ 나라의 땅이기도 하다.

 <죽어야 사는 나라 - 조선과 일본>은 ‘경술국치 100년, 병탄의 뿌리를 캐다’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19세기 말 근대화라는 대변혁을 맞이하게 된 한국과 일본의 대처 방안을 비교 분석했는데, 주로 일본측의 시대 상황과 당시 조선에 대한 인식을 광범위하고 치밀하게 추적해 눈길을 끈다. 특히 일본의 근대화와 메이지 유신을 이끈 주역들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어떻게 조선이 경술국치를 당했는지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저자의 초점은 쇼카손주쿠(松下村塾)라는 개인 학숙을 열어 일본의 근대화를 주도한 주역들을 제자로 길러 기라성같이 남겨놓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필두로, 메이지 유신·근대화·조선 강점을 주도한 핵심 인물들에 맞춰져 있다. 스승의 유업을 완성한 다카스키 신사쿠(高衫晉作),  죠슈(현재의 야마구치 현) 인맥의 대부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郞), 조선 강점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일본 제국 육군의 태두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이 바로 쇼인의 제자들이었다. 한·일 합병을 기획하고 추진했던 8인을 하나로 묶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죠슈 번, 그것도 대부분 ‘하기(萩)’ 출신이었다. 조선은 일본이 아니라 일본 서남단의 일개 번에 당한 것이다.

천출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배움의 기회가 열린 계기도 쇼인의 파격 덕분이었다. 요시다 쇼인은 1858년 12월26일 막부에 대한 반역 모의로 노야마옥에 수감된 뒤 이런 글을 남겼다.

‘국력을 배양해 취하기 쉬운 조선·만주·지나를 복종시키고, 열강과의 교역에서 잃은 국부와 토지는 선·만(鮮·滿 : 조선과 만주)에서 보상받아야 한다.’

서른에 요절한 요시다 쇼인이 남긴 그림자는 반도 삼천리를 삼켰다. 이데올로그로서 쇼인은 정한론의 뿌리였고, 조선 병탄의 주역 8인은 그 뿌리에서 뻗어나온 가지였다. 저자는 이들의 삶을 추적한 끝에, 근대화 여명기에 변혁의 주체가 되었던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의 생사관과 국가관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일본은 봉건제 사회에서 근대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수만 명의 사무라이들이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투쟁에 목숨을 던졌다. 서구 열강의 외세 공략에 앞서 내부적으로 치열하게 투쟁하며 수백 년간 누적된 갈등과 모순을 정리하고 자존의 기반을 마련했다. 초야의 이름 없는 사무라이들이 근대화를 향한 열정으로 자신의 이념에 목숨을 던졌고, 그 죽음으로 나라는 살았다. 당시 일본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진동과 같은 지사들이 넘쳐났다. 조선은 그와 같은 치열한 내부적 갈등과 혁신의 몸부림이 상대적으로 매우 약했다. 망국에 즈음해서야 초야의 선비들이 의병 봉기를 통해 일어섰으나 이미 국운은 기울었다. 일본의 사무라이와 조선의 선비들은 목숨을 걸고자 했던 동기가 달랐고, 결정적으로는 죽음을 선택한 시점의 선택에서 한 세대의 차이가 있었다. 바로 그 차이가 국운을 갈랐다.”  

 

 

ⓒ문학동네
고향인 전남 장흥을 배경으로 서민들의 애환과 생명력, 한(恨)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루어온 한승원 작가가 <보리 닷 되>(문학동네 펴냄)를 펴내면서 고백했다. 작가가 해산 토굴에 숨어들어 득량만의 바다를 바라보며 건진 옛 고향땅 이야기의 탄생 비화이다.

작가가 토굴에 똬리를 튼 첫날밤에 득량만 바다의 늙은 도깨비 한 놈이 찾아왔다. 도깨비는 “악마에게 영혼을 저당잡히고 젊은 한 생을 새로이 산 파우스트처럼, 너도 그런 삶을 한번 살고 싶지 않으냐?”라고 말했다. 그 말에 작가는 환장할 것 같은 환희에 젖어든 채 대답했다. “그래!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그렇게 영혼을 저당잡히고 쓴, 이 유년 시절의 이야기는 누구나 겪었으며 누구나 얘기하고 싶은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기록이다.

한승원 작가는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목선>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의 작품들은 늘 고향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그 바다는 역사적 상처와 개인의 욕망이 만나 꿈틀대는 곳이며, 새 생명을 길어내는 부활의 터전이다. 그는 지난 1995년 서울을 등지고 전남 장흥 바닷가에 내려가 창작에 몰두하고 있다.

한승원의 소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한’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작가는, “한이 아니라 ‘생명력’이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장편 <연꽃바다>를 쓸 때부터 작품 세계가 크게 변했다. 생명주의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인데, 휴머니즘에 대한 반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인간 본위의 휴머니즘이 우주에 저지른 해악을 극복할 수 있는 단초는 노장(老莊)이나 불교 사상에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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