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종’ 없는 월드컵
  • 일요신문 | 이영미 기자 ()
  • 승인 2010.06.22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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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의 치안 불안 때문에 기자들 활동 폭 크게 제한돼

 

▲ 6월14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엘리스파크 스타디움에서 열린 북한 축구대표팀 훈련에서 취재진이 선수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하고 있다. ⓒ연합뉴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2010 남아공월드컵 경기장 밖에서는 또 다른 전쟁이 펼쳐진다. 바로 각국에서 파견된 미디어들 간의 취재 전쟁이다. 한국의 취재기자들 또한 그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사거리를 찾기 위해 치열한 신경전을 펼치고 있다. 그런데 이번 남아공월드컵은 역대 월드컵과는 달리 치안 문제가 불거지면서 기자들의 활동 폭을 제한하고 있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색다른 취재 행태들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대표팀을 취재하는 기자들이 이용하는 교통 수단은 60인승 버스이다. 사진기자들에게는 15인승 승합차가 제공되었다. 버스를 이용하지 않을 경우 개인적으로 택시를 타야 하는데 택시를 타면 범죄의 위험에 노출될 확률이 높아 가급적이면 버스를 타고 단체로 이동한다. 2006년 독일월드컵 현장에서는 언론사별로 차를 렌트하거나 기차 등을 이용해 자유롭게 취재를 다녔지만 남아공에서는 모든 일정을 단체로 움직이다 보니 특종도 없고, 낙종도 없다는 것이 대다수 기자들의 의견이다.

지난 6월5일 오스트리아에서 전지훈련을 마치고 남아공에 입성한 한국 대표팀과 한국에서 취재를 떠난 기자들은 한 시간여의 차이로 요하네스버그 공항에 발을 내디뎠다. 공항에서 버스로 2시간30분을 달려 도착한 루스텐버그가 한국 대표팀의 베이스캠프. 도착한 첫날부터 훈련에 나선 대표팀을 취재하기 위해 훈련장인 올림피아파크 스타디움을 찾는 것으로 남아공월드컵 취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월드컵 기간 동안 대표팀을 취재할 수 있는 시간은 경기 외에는 훈련 시간인 1시간30분이 전부이다. 보통 훈련 시작 10분 전에 허정무 감독이 지시한 선수 두 명이 먼저 기자들 앞에 나타나 인터뷰에 응하는데, 이 인터뷰를 제외하면 훈련을 지켜보고 훈련이 끝난 후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선수 몇 명과 간단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전부이다. 워낙 취재 제한이 심하고 기자들의 동선도 유사한 데다 보고 듣고 쓰는 내용 또한 엇비슷하다 보니 기자들은 저마다 차별화된 기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기 바쁘다.

스포츠서울 정가연 기자는 “대표팀 선수들이 훈련하는 것을 경쟁지 기자들과 함께 웃으면서 지켜보지만 머릿속은 상당히 복잡하다. 취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후부터는 밤이면 밤마다 아이디어 전쟁을 벌이는데 경쟁지에서 무언가 재미있는 기사나 기획물을 생산해내기라도 한다면 회사로부터 ‘우리는 왜 이런 기사를 쓰지 못했느냐’라는 질책을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 대표팀 최종 엔트리 발표 서두른 이유

월드컵 직전에 대표팀이 오스트리아에서 전지훈련을 할 때의 일이다. 26명 예비 엔트리에서 최종 23명을 발표하기로 한 전날, 취재기자들은 사진팀과 친선 축구 경기를 마친 후 바비큐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축구협회 미디어 담당관인 이원재 부장이 기자단 간사에게 급히 연락을 해왔다. 허정무 감독이 한국 시간으로 새벽 2시, 현지 시간으로는 저녁 7시에 23명 최종 엔트리 명단을 발표한다는 것이었다. 월드컵 한국취재단 간사인 연합뉴스 이동칠 기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막 고기를 굽고 저녁을 먹으려는 순간, 그런 연락을 받은 것이다. 허정무 감독 입장에서는 그날 탈락된 선수의 소속팀에 연락을 취하다 행여 중간에 기사가 먼저 나오기라도 할 경우 선수단 전체 분위기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루 전날 명단을 발표하려 했던 것이다. 기자들 사이에서 기자회견 시간 자체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국에는 구워진 고기를 앞에 두고 그 바비큐 장소에서 허정무 감독과의 기자회견을 가졌다.”

매체별로 월드컵 취재를 나온 기자들이 많게는 여섯 명에서, 적게는 한 명 정도이다 보니 선수들을 인터뷰할 때에는 ‘풀’제를 자주 쓰게 된다. 즉, 각자 취재한 후 다른 기자들에게 자신이 들은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오스트리아 전지훈련 중에 최종적으로 탈락 통보를 받은 이근호를 취재하느냐 마느냐를 놓고도 기자들의 의견이 엇갈린 적이 있었다. 취재를 반대하는 기자들은 인간적인 면에서 상심이 클 선수를 상대로 인터뷰를 요구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결국, 이근호와 친분이 두터운 스포츠지의 한 기자가 대표팀 숙소를 떠나는 이근호를 취재한 후 다른 기자들에게 ‘풀’로 전달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런데 문제는 선수의 심경을 직접 들은 기자와 그 내용을 요점 정리만 해서 전달받은 기자들의 기사는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당시 이근호를 직접 취재한 기자는 실감나면서도 감동적인 기사를 내보내 호응이 컸던 반면, 다른 기자들은 스트레이트성 기사를 실었기 때문에 회사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어야만 했고, 이로 인해 이근호를 취재한 기자와 다른 기자들 사이에 언쟁이 오갈 수밖에 없었다.

영상을 담아내는 방송사 기자들의 취재 경쟁은 훨씬 더 심하다. SBS가 월드컵 중계권을 갖고 있어 굉장히 제한된 취재 환경 속에서 일을 하기 때문이다. MBC 보도국의 김세진 기자는 이런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그리스전이 열리는 날 ‘붉은 악마’ 응원단을 취재하려다 SBS측의 제지를 받았다. 그들은 SBS에서 섭외한 응원단이기 때문에 MBC에서는 영상을 찍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응원단도 우리 맘대로 못 찍느냐는 항의에 SBS가 돈을 들여 남아공까지 데리고 온 응원단이라는 얘기에 할 말을 잃었다. 그 후 우리의 취재를 감시하는 사람이 계속 쫓아다녔다.”

■ 선수들, 개별 인터뷰 하지 않기로 약속

지난 그리스전이 끝난 뒤 이래저래 박지성의 인터뷰를 담지 못한 KBS·MBC·YTN 기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 KBS 취재진은 박지성의 인터뷰를 따려고 대표팀 숙소인 헌터스 레스트를 찾았고, 언론담당관인 축구협회 이원재 부장에게 박지성 인터뷰를 부탁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원재 부장은 “대표팀 숙소에서 개별 인터뷰를 하지 않기로 기자들 사이에 약속이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인터뷰 요청을 해와 어쩔 수 없이 거절했다. 더욱이 박지성 선수도 인터뷰하지 않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영하로 떨어진 날씨 속에서 추위에 벌벌 떨며 아르헨티나전을 지켜본 뒤 다시 대표팀을 쫓아 루스텐버그로 돌아온 기자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매체별로 삼삼오오 모여 아이템 회의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때 기자단 간사가 이렇게 외친다.

“내일은 대표팀 회복 훈련이 오전에 있다고 합니다. 아침 10시30분에 버스가 출발 예정이오니 모두 출발 5분 전까지 내려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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