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 총공격‘최초 제보자’명예 찾고 싶다”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0.06.22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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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숨겨진 영웅’ 홍윤희씨 파란의 인생 스토리

홍윤희씨(81)는 회한이 많아 보였다. 한국전쟁 60주년을 맞는 올해는 그에게 매우 남다르게 다가온다. 자신의 명예를 찾을 수 있는 날들이 많이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홍씨는 전사에는 이름이 올라 있지 않지만, 한국전쟁의 ‘숨겨진 영웅’이다. 그의 용기가 없었다면 우리의 역사가 다시 쓰였을 수도 있다. 홍씨는 연합군과 북한군이 낙동강에서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북한군의 ‘총공격 계획’을 최초로 제보한 주인공이다.

▲ 홍윤희씨가 전쟁기념관 동상 앞에서 자신의 인생 역정을 말하고 있다. ⓒ시사저널 이종현

하지만 ‘홍윤희’의 삶은 불행했다 그는 ‘훈장’ 대신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군사 재판에서 사형까지 선고받았다. ‘빨갱이’라는 낙인도 찍혔다. 대신 ‘최초의 제보’는 한 인민군 소좌가 한 것으로 둔갑해 있다. 이제 백발의 팔순 노인이 된 홍씨는 “죽기 전에 반드시 명예를 되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눈을 못 감는다”라며 울분을 토했다. 그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일까. 지난 6월16일 서울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서 홍씨를 만나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들었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홍윤희씨는 서울에 있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한 후 보병학교 간부 후보생으로 입교하기 위해 잠시 육군본부 감찰실에서 대기 중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일요일 새벽에 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홍씨는 미처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했고, 한강철교가 폭파되자 고립 상태에 놓였다. 살길을 모색하다 가까스로 신당동에 있는 고향 친구 집에 숨어들었다. 그의 친구는 공산당원이었다.

하루하루 죽음의 공포에 떨면서 숨어 지내던 홍씨는 “일단 의용군에 입대한 후 기회를 봐서 탈출하겠다”라며 꾀를 냈다. 그리고 그해 7월10일 공산당 간부인 친구 형이 보증해 의용군에 입대할 수 있었다. 신분은 ‘서울대학생’으로 속이고, 이름은 ‘홍관희’라는 가명을 썼다. 그 후 홍씨는 의용군을 따라 계속 남하했다. 8월 말쯤 대구 근처의 전선에 도착해 인민군 제1사단에 편입되었으나, 집총 경험이 없어 ‘위생병’으로 배치받았다.

당시 인민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마지막 총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홍씨는 그곳에서 극비 정보인 인민군의 ‘9월 총공격 계획’을 입수하게 되었다. 

고급 정보를 알게 된 홍씨의 마음은 다급했다. 만일 국군과 연합군이 미리 알면 불리한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드디어 8월31일 밤 9~10시쯤에 기회가 찾아왔다. 보초가 잠시 자리를 뜨면서 경계가 허술해졌다. 홍씨는 옆에 자고 있던 인민군의 총을 집어들고는 무조건 남쪽으로 뛰었다. 홍씨는 다음 날 새벽 5~6시쯤 국군 진영에 닿을 수 있었다. 홍씨는 국군에게 발견되었고, 곧바로 ‘총공격 정보’를 알려주었다. 9월1일 오후에는 대구 유엔군사령부에 가서 4시간 정도 브리핑까지 했다. 그는 북한군의 총공격 임박과 북한군의 위치, 탱크와 중장비의 위치와 은닉 상황 등을 아는 대로 말해주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홍씨의 정보에 상당한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를 육군 감찰관실로 원대 복귀시켰다.

홍씨의 제보는 정확히 들어맞았다. 인민군은 9월3일부터 9일까지 총공격을 감행했고, 이를 사전에 감지한 아군의 방어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홍씨의 제보가 불리한 전세에 놓여 있던 아군에게 천군만마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홍씨에게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9월11일 아침 헌병들이 들이닥쳐 다짜고짜 홍씨를 헌병대로 연행해 갔다. 그리고 모진 구타와 고문, 협박이 시작되었다. 결국, 그는 간첩 혐의로 수사를 받고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 지난 2000년 12월28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홍윤희씨에게 보낸 ‘6·25 전쟁사 관련 사실 확인 요망서’에 대한 답변서.

미국·한국 넘나들며 자신과 관련한 기록 찾아내

홍씨는 그 후 우여곡절 끝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최종 10년형을 받고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나중에 다시 5년형으로 형기가 줄어 1955년 출소했다. 빨간 딱지가 붙은 홍씨에게 사회는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그는 ‘이적 행위자’라는 주홍글씨를 숨기고는 한때 시멘트 공장과 석산에서 일을 했다.

그러던 중 1973년 12월 정부가 좌익 경력자 예비 검속을 위한 ‘사회안전법’을 제정하려고 하자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홍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민이 아니라 망명이다”라고 말했다. 홍씨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식료품점과 식당 등을 운영하며 정착했다. 나중에 버클리 대학 체육지도사로 자리를 잡았다.

홍씨의 운명은 1989년 또 한 번 바뀐다. 우연한 기회에 일본 사학자 고지마가 쓴 <조선전쟁>이라는 책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인민군 총공격 계획을 제보한 것이 자신이 아닌 ‘인민군 소좌 김성준’이라고 써 있었기 때문이다.

홍씨는 한국 국방부 및 미국 육군 역사국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사>에도 인민군 총공격 계획을 제보한 사람이 ‘김성준 소좌’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조국에 대한 배신감이 끓어오른  그는 자신의 명예를 찾는 데 여생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홍씨는 이때부터 미국과 한국을 넘나들며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당시 군부대의 정보 보고, 심문 보고서를 찾아냈고, 한글과 한문으로 쓰인 재판 기록과 일본어로 된 <한국전쟁사>도 찾아냈다.

무려 2천명 이상의 포로 및 귀순자 심문 조서를 찾아내서 일일이 조사했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총공격 정보를 제공한 사실이 없다는 것도 확인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는 중요 자료도 찾아냈다. 당시 미군 제1기병사단이 작성한 김성준의 심문 기록을 발견한 것이다. 거기에는 김성준이 인민군의 총공격 사실을 알렸다는 내용이 전혀 없었다. 인민군 장교 포로 명단에는 김성준이 1953년 8월7일 북한으로 송환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홍씨는 자신에 대한 재판 기록을 찾아나섰고, 1999년 6월 부산 용호동 문서보관소에서 1950년 9월20일자 계엄고등군법회의 재판 기록을 찾아냈다. 그곳에는 자신이 “인민군 총공격 정보를 가지고 넘어왔다”라고 분명히 기술되어 있었다.

홍씨는 그가 인민군 부대를 탈출해 넘어왔을 때의 심문 기록을 보면 자신이 ‘최초 제보자’라는 것이 명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엔군사령부, 주한미군, 미8군에도 문의했지만 당시 심문 조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시 심문관을 찾는 데도 주력했으나 한계에 부닥쳤다.

홍씨는 국가 공권력에 기대어보기로 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 김대중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에게 자신과 관련된 자료를 첨부하며 협조를 요청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도 보냈다. 군사편찬연구소에서는 “민원인(홍씨)이 국군에게 적의 총공격 첩보를 제공한 것이 사실로 확인된다. 김성준 소좌의 제보 내용은 총공세에 대한 구체적인 제보가 없다”라는 내용의 서면 답변이 왔다. 즉, 홍씨의 인민군 ‘총공격 제보’에 신빙성이 있고, ‘김성준 소좌와 관련된 내용’은 잘못이라는 것을 확인해준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청와대는, 처음에는 홍씨의 청원이 타당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2000년 9월15일 홍씨가 배석한 가운데 청와대에서 관계 부처 연석회의가 열렸다. 홍씨는 “그날 그 자리에서는 내가 ‘최초 제보자’라는 증명을 찾는 데 적극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그 후 공보비서실과 민정비서실에서 ‘남북 대화에 악영향을 미칠 소지가 있다’라는 이유로 지원을 중단했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지난 6월6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편지를 썼지만 아직까지 회신이 없다고 한다.

홍씨는 요즘 조바심이 든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어떤 포상도 원하지 않는다. 내게 씌워진 ‘이적 행위자’라는 낙인을 지우고, 인민군 ‘총공격 제보자’라는 것만 국가가 공식적으로 확인해주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전쟁 60년, 그의 빼앗긴 명예는 언제쯤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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